갓니버시티에 대해 할 만한 얘기는 다 했다. 사실 아주 다 한 건 아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쓴 물을 착즙하고 싶지도 않다. 그간 글을 쓰면서 창조과학회, 갓니버시티 홈페이지, 정념 가득한 과거 게시물, 각종 사건 관련 페이지 등을 참고하며 고통의 대환장 시간 여행을 다녔다. 우주선도 만능열쇠도 없이 그저 괴로울 뿐인 닥터 후회 같은 게 돼 버린 너덜너덜한 기분이다.

내가 써 온 글을 처음부터 읽어 보니 참 지독하게 늘어놓았구나 싶고,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막막하다. 그러나 어찌어찌 주말 분리수거 때마다 쓰레기봉투 끝을 묶어 내는 데 성공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이 글로 10편 동안 연재해 온 갓니버시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 글로 10편 동안 연재해 온 갓니버시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초창기 '대학'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연구와 교육에 초점을 맞춘 기관으로 세워졌다. 이를 미루어 생각하면, 현대사회의 '미션스쿨'이라는 명칭은 이제 종교가 다른 다양한 가치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만큼 미션스쿨을 매끄럽게 운영하기란 더없이 까다로워졌다.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신앙적 자양분을 공급하고, 학문을 갈고닦아 시민 윤리를 정립하는 '학교'의 기능까지도 충분히 해내어, 다양한 가치가 공존·경합하는 '사회'에서의 안정적인 자리매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미션스쿨을 세우고 운영하는 데는 그만큼의 당위, 사명감, 혹은 욕망이 작용할 테다.

그러나 모든 미션스쿨의 설립·운영을 둘러싼 배경에 반드시 저 수행 요건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미션스쿨이 저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 내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 반대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 판에서 갓니버시티가 명실공히 미션스쿨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갓니버시티는 '믿음과 실력과 인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리더 양성'을 표방한다. 이 말대로 되었다면 갓니버시티는 '교회'만큼의 신앙적 기반과 '학교'만큼의 올바르고 참된 교육을 제공하여 '사회'에서 타의 모범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는 않다는 걸,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들은 알 것이다.

갓니버시티의 미션스쿨적 성질 탐구

일단 '교회'부터 생각해 보자. 갓니버시티는 '신앙'이라는 말을 휘두르며 '세상'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 과정에서 '비기', 빨갱이, 성소수자를 비롯한 온갖 타자와 약자, 아무튼 저들 맘에 안 드는 건 무엇이든 함께 배제당한다. 예수님이었다면 물 긷는 자리에서 먼저 말을 걸고 함께 밥을 먹었을 사람들이, 갓니버시티에서는 뿔 달린 빨간 피부에 팔다리가 열두 쌍이고 빨판과 촉수가 달려 있는 역병 전달자 취급을 받으며 내쳐진다. 그런가 하면, '마음의 중심', '우리 안의 죄', '기도를 통한 회복' 같은 귀중한 말들은 껍데기만 남아 분쟁을 덮어 버리는 도구 정도로 전락한다. 엄밀히 말해 갓니버시티에서 주로 배우는 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핑계 삼아 내 욕망을 채우는 요령이다.

'학교'는 어떨까? 갓니버시티는 여전히 '젊은 지구론'에 기반한 창조과학을 붙들고 있다. 붙들고만 있으면 다행(?)인데 이를 선도하고 있는 판이다. 그 와중에 인문학은 부실하며, 기껏해야 '창의 융합'이라는 이상한 꽃을 피우기 위해 녹아 없어질 강아지 똥처럼 여겨진다. 기독교 인성 교육의 핵심 장인 채플 수업에서는 종종 이상한 소리가 발설되며, 그게 아니어도 교내에는 각종 차별과 혐오와 배제가 난무한다. 학교 리더십은 자기들 생각에 문제라고 판단되는 학생을 따로 불러내 '면담'이라는 명목으로 겁박하곤 한다. 자세한 전공 수업이나 학업 편제를 차치하더라도, 학교가 보여 주는 이런 모습은 비교육적이며 나아가 반교육적이므로, '학교'로서 건강하게 기능하는지 애매할 때가 많다. 특히 불편한 건 우선 미워하고 윽박질러서라도 치워 버리는 갓니버시티 리더십의 태도는 돈을 받아가면서 배우래도 사양이다.

그래도 '사회' 속에서는 가끔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는데, 또 그렇지 않을 때가 참 많다.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갓니버시티에서 드러나는 병폐는 다양하다. 일례로, 학교에서는 후원자들에게 감사 선물로 무를 한 포기씩 나눠 주곤 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이는 학교 앞 무밭의 무는 청소 노동자들이 따로 돌보고 키워야 했던 노동 착취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계약서에 해당 내용은 없었고, 아무튼 여느 학교와 견주어도 부끄러운 만큼 '하나님의 학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할 짓은 절대 아니었다(해당 관행은 대대적인 문제 제기 이후에야 사라졌다). 학교는 학내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비위 사건 앞에서,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최대한 알려지지 않는 데 더 품을 들였다. 이사회-총장-처장으로 연결되는 그들만의 리더십 구조는 헌법이나 인권 등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도 무시해 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갓니버시티를 사회와 동떨어져 자의적인 원칙만이 지배하는 이질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욕망에 잠겨 버린 갓니버시티와 미션스쿨

이처럼 갓니버시티는 신앙적으로 건강하지도 않고, 교육적이지도 않으며, 사회에 모범적인 가치를 선도하기는커녕 폐쇄적인 제멋대로의 사회를 고수한다. 교회-학교-사회 중 어느 영역에서도 실패한 이 '신성-로마-제국' 같은 미션스쿨의 병폐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한 교육을 통해 이 사회에서 타의 귀감이 될 만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기획의 필요성은 물론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고민을 거치지 않은 채 욕망만 들어차는 순간, 인재 양성을 위한 갓니버시티는 '인재(Human disaster) 양성소'로 전락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갓니버시티의 '미션스쿨-하기' 실패는 각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독단적인 위로부터의 결정, '세속화'를 두려워하며 지레 세상을 비난하는 태도, 임의적 성경 해석, 창조과학, '비기' 배척, 인문학 및 사유의 결핍, 괴상한 채플, 겉으로 짐짓 괜찮은듯 보이려는 이미지 메이킹, 성범죄와 착취까지. 이쯤 되면 위와 같은 비위들로 정구각형을 만들어 '애니어그램'처럼 유형별로 작대기를 이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슬픈 도형의 텅 빈 가운데에 하나님이 있을 자리는 없는 것 같고, 있어도 안 될 것 같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뜻을 표방하는 리더십이 있으며, 이들은 면죄부 같은 성경 말씀으로 각 변과 꼭지점을 꼼꼼히 땜질하여 추한 모습들을 숨긴다. 그런 작업이 끝나면 다시금 멀쩡해 보이는 하나님의 대학 인테리어가 완성된다.

대충 갓니버시티 병폐 유형으로 애니어그램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이처럼 갓니버시티를 둘러싼 일련의 병폐들은 그 누구보다 '세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욕망과, 그걸 감추는 '하나님'이란 변명거리로 완성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틀리지 않고, 따라서 자신들이 책임질 필요도 없다. 이런 결에 맞는 학생을 최대한 모아 선발하며, 이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 '아름다운 나의 학교 갓니버시티'를 홍보한다. 편안함을 위해 단순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수로들이 만나는 중심부는 이렇게 서서히 썩는다. 비단 갓니버시티만 이런 것은 아닐 테다. 이런 구조에서 자유로운 미션스쿨이 있을까.

그리고 다시 나아가는 길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잘못되었는지를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뼈아프지만 거쳐야 할 이 반성 작업은 어쩌면 탄생의 순간까지 소급해 올라가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 개신교가 좋아하는 '초대' 어쩌고, '근원으로' 어쩌고가 무조건적인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참조하면 좋을 만한 과거의 선례조차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반비)에서 '먼 곳의 푸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태양 빛은 지구 대기 중의 기체 분자와 부딪치며 여러 색깔로 흩어지는데, 이때 파란색이 많이 퍼지기 때문에 바닷물과 하늘은 푸르게 보이고, 먼 풍경 역시 어렴풋한 푸르스름함에 가려진다. 그 흐릿한 아름다움은 당연하게도, 그곳에 당도하면 신기루처럼 온 데 간 데 없으며, 이제는 다른 어떤 먼 곳이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그러니 이는 영영 지척에서 접할 수 없는 빛깔일 테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뒤틀린 많은 미션스쿨들은 '초대'의 어떤 것이든 미래의 어떤 것이든 막연한 푸르스름함을 좇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솔닛은 말한다.

"어쩌면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마음 없이 그냥 거리를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영영 차지할 수 없는 푸름의 아름다움을 그럼에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갈망도 그런 식으로 소유할 수 있지 않을까?" (53쪽)

이상적인 미션스쿨을 향한 욕망은 주로 먼 거리에 흐릿하게 산재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집중해야 할 것은 단단하고 선명한 근거리다. 즉, 오늘날 미션스쿨이 공유하는 망가진 부분들을 직시하고 고쳐 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만 곳에 하나님을 무작정 내세우던 태도를 잠시 접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우리 이웃들의 이웃, 배우고 연구하는 공동체로서 오늘날 미션스쿨의 모습을 먼저 응시하는 태도다. 너무 상투적으로 변해 버린 '우리 안의 죄'의 원뜻을 되찾고 그 죄로부터 멀어지는 걸음을 떼는 것. '세상이 무너뜨린 가치를 재건한다'는 공허한 선언보다 저 말들의 의미를 재건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이제껏 답습해 왔으므로 언뜻 명확해 보이는 길을 그대로 가기란 쉽다. 그러나 길을 잃어 보는 경험, 길을 잃었음을 깨닫는 경험도 그만큼 중요하다. 그 상태에서야 열리는 감각과 사유가 있고, 이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다. 부디 갓니버시티와 뭇 미션스쿨들이 자신들 나름대로의 길 잃음을 발견하고, 오직 그렇기에 드러나는 길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그 새길을 향해 걸음을 떼는 일은 이전까지의 스스로를 기꺼이 버려야 하므로 힘들겠지만, 첫걸음의 힘듦 역시 어느 순간에는 예의 아름다운 푸른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일이 아닌' 글을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일이 아닌' 글을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우습지만 웃다 보니 웃을 일이 아닌 이 우당탕탕 미션스쿨 대소동을 함께 따라오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의외로 이 연재의 의도는 '갓니버시티와 미션스쿨 따위 하루속히 망해 버려라' 하는 심정으로 보낸 '디지털 땅 밟기 기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서사화를 통한 심리 치료이자 명확히 분리할 수 없는 애증의 면면을 모두 드러내고 건강하게 '애도'하기 위한 작업에 가까웠다. 또한 이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임을 알고 있었고, 공감의 범위가 갓니버시티나 미션스쿨 당사자, 나아가 한국교회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까지 가닿으리라 생각했으며, 또 그러길 바랐다. 그 의도에 얼마나 들어맞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공감하는 만큼 토론하고, 토론이 담론이 되어 일말의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전례 없는 변화로 교회, 학교, 사회 모든 영역이 급변하는 지금, 갓니버시티와 미션스쿨이 잃은 길을 고민하고 다시 찾아가 진정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응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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