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니버시티의 채플이 형식적인 면에서 품은 문제점과 그 안에서 안하무인으로 내뱉어지는 기기괴괴 설교 내용을 돌이켜보려 갖은 노력을 하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한번 정리해 놓으니 오히려 좋다. 채플 이야기에서 추하게 드러난 미션스쿨의 욕망이 곧 앞으로의 갓니버시티 이야기를 이끌어 갈 비료가 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다룰 주제는 갓니버시티의 근본 없는 '인문학 멸시' 풍토다. 사실 갓니버시티에서 인문학 멸시가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다. 없는 걸 어떻게 멸시하나. 하지만 우리의 갓니버시티는 그 어려운 걸 또 해낸다. 이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갓니버시티의 능력이다.

갓니버시티는 그 설립 과정부터 인문학과는 상관이 없었다. '실무형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춰 실전에서 '써먹기' 위한 지식과 전공을 우선시했고, 전 총장을 비롯한 '초대교회' 멤버들 역시 대부분 갓니버시티를 후원하는 교회 출신의 공학도였다(당연히 '창조과학'이 사은품처럼 딸려왔다). 흔히 초대교회는 에덴동산처럼 여겨지지만, 갓니버시티에는 그런 거 없었고 그냥 떡잎부터 갓니버시티였다. 초대 학번 선배들이 학교에 대한 '사랑'으로 작성해 갓니버시티 구성원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승된 어떤 문서에 의하면, 설립 멤버들은 각종 처장을 짬짜미해 나눠 꿰찼고, 교수 임용 절차 역시 입맛대로 진행됐다. 이 당시 있었던 갈등은 기초 인문학부에 당장 필요한 과목인 국사나 물리 관련 교수를 뒤로하고, 기존 강의와 겹치는 수업을 하는 교수를 어떻게든 임용하려는 데서 벌어졌다. 추후 리더십에 대한 얘기를 더 하겠지만, 우선 이 일화를 통해 기초 학문 및 인문학을 배척하는 갓니버시티의 기조를 읽을 수 있다.

우리 대학 인문학 가르칩니다.
우리 대학 인문학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갓니버시티에 인문학 수업을 비롯해 인문학의 'ㅇ'도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갓니버시티의 교양 수업에는 걸출한 교수들이 담당하는 탁월한 수업이 꽤 있다. 한국문학, 한문학, 서양사 및 교회사, 철학 입문, 고전 강독 등의 수업은 흡사 갓니버스텍(TECH) 같은 인문학의 불모지에서 그나마 후마니타스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가 준다. 전공 과목에도 숨은 보석처럼 빛나는 인문학 수업이 있다. 당장 내 전공에서도 영문학, 비평 이론, 언어학, 실기와 혼합된 연극의 역사, 영화사 등은 나로 하여금 감히 인문학 관련 대학원 진학을 꿈꾸게 했는데, 그렇게까지 꿈꿨으면 안 되는 거였지만, 여튼 그렇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을 수 있는데, 저걸 제외한 '전체적인 기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장 위의 수업도 개미 투자자마냥 영혼까지 끌어모은 수준이다. 대놓고 '실무형 인재'를 위한 수업을 제외하면 '순수 학문'을 다루는 수업의 비중은 '대학'이라 부르기에 처참할 정도로 적다. 애초에 이 학교에 인문 사회 관련 학부나 트랙이 따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학교가 정부 정책의 눈치를 볼 때뿐이다. 그렇게 한바탕 일었던 거품이 잦아들고 나면, 급조해서 만든 전공을 무작정 없앨 수도 없어 그냥 놓아둔다. 아니, 놓아두면 다행이다. 과거에는 실제로 '기독교 문화'라는 트랙이 없어지기도 했는데, 군대에 갔다 온 지인은 졸지에 '전공 필수'가 '교양 선택'으로 처리되는 기적의 연금술을 겪기도 했다. 해당 트랙을 담당하던 교수는 지금도 기초학부에서 갓니버시티 인문학의 인공호흡기를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엄밀히 말해, 갓니버시티에서 인문학 관련 전공은 '분재盆栽(화분에 따로 심어 가꾼 화초나 나무)'다. 혹해서 들여놓고는 처리하기 어려워져서, 실상은 선인장처럼 관리(방치)하지만 어쨌든 예쁜 모습으로 보이도록 싹둑싹둑 다듬어 놓는다. 이걸 대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 '글로벌 사회의 다리', '선한 콘텐츠' 같은 말로 마치 기독 인재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홍보한다. 그러나 아주 필수적인 부분만 근근이 남겨둔 채 추가적인 전임 교수는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지 않으며,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튼 사과만 열리면 장땡인 거다.
아무튼 사과만 열리면 장땡인 거다.

5년 전 언론정보문화학부의 공연 영상 트랙에서 영상 관련 교수 한 명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이 '사라진' 교수들 얘기는 추후에 하기로 한다), 학생들이 '영상 교수 없는 공연 영상 전공'이라는 기막힌 상황에 처했음에도 학교 당국은 교수 충원을 거부했다. 당시 해당 전공 학생들이 의견서를 모아 학교에 제출했으나 반영되지 않았고, 학생과 교수가 참여한 임시 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교무처장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학과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라"며 화두를 던지는 주지 스님처럼 굴었다. 결국엔 교수 충원이 결정됐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학교가 외부에 보이기 싫어하는 학생들의 '시위' 등 난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편제나 행정 얘기는 이쯤 하고, 다른 얘기를 해 보자.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여학생들이 인문학부(이게 있나?)를 많이 선택'해서 취업률이 줄어든다느니, 현대사상이 뭐 어떻게 아무튼 사악하니 이런 세상 조류를 조심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학내에서 가장 많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업'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곳이 갓니버시티다. 인문학이 무엇을 배우고 공부하는지, 어떤 개념이 왜 생겼는지 모르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전형적인 '인문학 혐오'다. 애당초 갓니버시티는 인문학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러므로 없었으며, 없으니 모르고, 몰라서 밑도 끝도 없이 미워한다. 써 놓고 보니, 사실관계는 틀려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구성원들이 인문학을 싫어하고 기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모종의 사명감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갓니버시티에서 인문학이 갖는 또다른 이미지는 '고명'이다. 편식으로 일관해 차려 놓은 밥상에, 굳이 안 넣어도 되지만 대외적 이미지를 의식해 균형을 맞추려 살짝 얹어져 있다. 이는 종종 '창의 융합'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비전에서 관찰된다.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인문 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을 도모한다고는 하지만, 여기서의 인문 사회는 중심이 되는 경우가 없으며, 기껏해야 '촉매제'쯤으로 작용한다. 사실 인문학을 향한 이런 시각은 대중을 상대로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인문학'과 비슷하다. 정확히 어느 학문 분과의 어떤 사유나 개념, 방법론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대충 좋아 보이는 것을 범박하게 뭉뚱그린 것으로, 사실상 '교양'이란 말로 대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요리하면서 어떤 재료들에는 "없어도 돼유" 하는 백종원처럼, 이 '창의 융합', '융∙복합 프로젝트'에서 인문 사회는 유사시에 "없어도 돼유" 정도로 취급받을 듯하다.

인문학이유? 없어도 돼유. 백종원 레시피 유튜브 채널 갈무리
인문학이유? 없어도 돼유. 백종원 레시피 유튜브 채널 갈무리

여기까지 오니까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연구하거나 성경을 읽어 내는 데는 다 인문학적 관점이 필요하지 않나? 신성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접근이나 성경을 해석학적 역사학적 관점으로 읽는 일들 말이다. 너무 당연한 질문 같지만 저렇게들 싫어하니 왠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주변 신학대학원생 및 목회자에게 물어봤다. '물이 축축하냐'는 질문을 들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며 당연히 필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신학교와 교회 현장의 상황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아무리 인문학적 관점에 힘입어 공부해도, 그걸 현실 목회 현장에서는 다 드러내기 쉽지 않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담임목사나 노회에서 한 목소리 하는 목회자가 아닌 다음에야 사역하는 교회에서 저런 얘기를 하거나 특정 입장을 표방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갓니버시티의 인문학 혐오는 노동과 생계, 인사권 문제와도 결부된다. 초창기부터 거진 '공대'로 기획된 이 학교 분위기에서, 인문학은 후원받는 교회와 총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는 듯한 이 리더십들은 인문학만 보면 각자 삼원색처럼 변하는지 한없이 무채색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갓니버시티의 인문학은 대-융합 시대를 맞이하는 구색 맞추기 혹은 경계해야 할 세상적인 어떤 것 사이를 오간다. 교회에서 후원 받으며, 다들 반쯤 교회처럼 여기고, 도대체가 내 주변 동료들이 학우인지 형제자매 성도님인지 헷갈리는 이 학교에서, 웬만하면 인문학적 해석 같은 건 일단 접어 두고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는 소리를 해야 한다. 그러니 성경도 '그 과학'으로 설명하길 좋아하고, 교수 충원도 이공계에 우선순위를 둔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갓니버시티의 인문학 혐오에 대한 논의가 돌고 돌아 학교 설립 초창기부터 이어진 제도적 방향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런 걸 문학에서는 '수미상관'이라고 부르니 '인문학' 좋아하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여기까지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가운데서도 도시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던 인문학 수업들이 참 값지고, 수업하신 교수님과 학생들이 정말 고생하고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갓니버시티의 인문학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막 아련한 감상에 젖고 괜히 짠해지고… 그러고 싶지 않다. 교회가 아닌 학교라면(명색이 '대학'이라면), 학생들이 기꺼이 인문학을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마땅하다. 이런 식의 회고가 갓 깨어난 냉동 인간의 '라떼'처럼 들릴 정도로, 더 풍부한 담론과 사유가 갓니버시티 안에서 생동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때에야 비로소 그놈의 '현대사상'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기독교를 깊이 이해하는 갓니버시티의 인재상이 제대로 길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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