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갓니버시티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갓니버시티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들은 왜·어떻게 사라졌으며, 그 빈자리는 어떻게 메워졌는가? 그들은 대체로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사라졌으며, 그 불명예의 대부분은 '성폭력'과 결부돼 있었다. '하나님의 대학에서 성폭력이라니!'라고 탄식할 사람도 있겠지만, 있는 걸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미션스쿨의 성폭력은 여느 대학에서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안 좋은 점들을 특히 빼닮는 경향이 있으며, 대체로 그 정도도 심하다.

사실 입학한 뒤 꽤 오랫동안 성폭력 문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학교가 워낙 온실 같고 구성원들도 다 겉보기에는 일단 착하게 굴려고 노력하니까 최소한 이상한 짓은 안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안일한 착각이 한몫했다. 혹은 내 위치성 때문에 크고 작은 성폭력 문제를 느끼지 못한 탓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더해, 그 사건들이 다만 알려지지 않고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에 학교의 적극적인 은폐가 스리슬쩍 덧대어졌다는 것도.

학교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들, 그들은 왜·어떻게 사라졌을까.
학교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들, 그들은 왜·어떻게 사라졌을까.

갓니버시티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기독교 교양 과목 중에는 기초적인 조직신학이 있다. 내가 다니던 2010년 당시 이를 가르치던 목사 중 한 명은 푸근한 인상의 온건한 중년 남성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늘 자신과 딸의 유대를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돌연 사라졌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것이 성폭력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만 무성했다. 생명공학을 가르치던 어떤 교수는, 신입생들이 반드시 거치는 '명예 서약식'에 앞서 갓니버시티의 명예와 가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졌고, 듣기로는 그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몇 명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정보는 정말이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였다. 그가 사라지면서 진행할 수 없게 된 수업에 대해 해당 학과 임원이 경위를 궁금해할 정도였으니까.

지난 글에서 언급한 '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생회장'을 지냈다는 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운영하는 교육 관련 사단법인에서 멘토링하던 학생을 성추행한 그는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당시 그는 갓니버시티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사건을 변호한 이는 총동문회 부회장이었다. 당연히 법원 선고 이후 총동문회에서는 별안간 회장과 부회장이 한꺼번에 없어졌고, 어찌저찌 다른 선배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유야무야됐다.

그런가 하면 이전에 이야기한 언론정보문화학부 공연 영상 트랙의 '사라진' 교수는, 여느 홍상수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학생과 교제하던 것이 문제가 돼 갓니버시티를 떠났다. 이제는 간통죄가 폐지됐고, 사랑에 빠진 것도 '죄'는 아니지만, 나이 많은 남성이 젊은 여성을 만나려는 '은교' 같은 상황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가 학교를 떠난 걸 보면 학교도 이를 '불명예'라 여겼을 테다. 그 '유사 홍상수(?)'는 이후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기도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성 문제로 사라진 이들이 그후에 어떻게 됐는지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행보를 필사적으로 알려 주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숨기기에 가장 급급한 쪽이 학교 당국이었다는 점이다.

성폭력 사실을 숨기기에 가장 급급한 쪽은 학교 당국이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성폭력 사실을 숨기기에 가장 급급한 쪽은 학교 당국이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렇게 '사라질' 정도로 큰일 외에 알려지지 않은 성폭력은 또 얼마나 있을까. 미투 운동 물결 속에서 이어졌던 교내 성폭력 제보 활동(We Too)에서도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교수'이자 '상담사'이자 '목사'인 누군가가 벌인 지속적인 성추행, 교목실 주관 프로그램에서 총괄 목사가 했던 "한번 섹시하게 꾸며 보라. 그러면 예쁠 텐데"라는 성희롱 발언, 유명 남성 배우들의 성폭력을 고발한 미투 운동에 대해 "○○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가해자와 가족들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했던 모 교수의 수업 중 발언, 데이트 폭력 피해자에게 "혼쭐을 냈으니 마음이 편해지려면 가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던 폭력적 중재는 물론이고, 버젓이 음란물 이야기를 꺼내며 "○○(제보자)가 듣잖아"라고 낄낄대던 남학생들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니 당연히 학생 간 성폭력도 일어났을 것이다. 수없이 많았을(그리고 덮였을) 사건 중 2014년 2학기의 성추행 사건, 2018년 1월의 화장실 불법 촬영 사건 정도가 그나마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식이다.

2014년 2학기 성추행 사던 당시 이를 다룬 교내 독립 언론은 갓니버시티가 얼마나 성폭력에 미흡하고 악의적으로 대처하는지 고발했다. 그 당시 성폭력 문제는 별도의 전문 기구 없이 교내 상담 센터에서 여타 상담과 함께 다뤘고, 거기서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치료가 동시에 이뤄졌다. 이런 주먹구구식 대처는 성폭력에 대한 갓니버시티의 무지와 무관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성희롱·성폭력 처리 규정은 유명무실했고, 매번 비슷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나눠 먹는 학생처장들 중에도 관련 대처를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미지수였다. 적어도 당시 학생처장은 규정도 모르는 채 "상담 센터에 물어보라"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관련 규정에 따라 해당 가해자를 제적 처리했다는 징계 결과 공지가 12월 16일에 올라왔지만, 이마저도 곧 삭제됐다.

2018년 1월 불법 촬영 사건에 대해서도 갓니버시티의 대처는 여전했다. 가해자는 휴대폰 카메라로 화장실 옆 칸을 불법촬영했다. 당시 교내 여성 단체는 모든 화장실에 불법 촬영 장치가 있는지 수색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학교 당국은 "사건에 사용된 카메라는 이동형이므로 설치형 몰카는 없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해당 가해자에 대한 조치 결과는 5월 29일 공지로 올라왔지만, 마찬가지로 삭제했는지 지금은 찾을 수 없고, 오직 당시 활동한 관련 단체의 캡쳐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보수적이고 혐오적인 전제 위에서 '순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갓니버시티 공동체는 '성폭력'이란 주제가 언급되는 것 자체를 꺼린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공동체'를 위해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종용하며, 이도저도 안 될 때는 '우리 안의 죄악'이니 뭐니 하면서 기도로 퉁 치려 한다. 존경과 증오가 뒤섞인 모순을 견디고, '피해자다움'에 얽매여 스스로와 남은 나날을 어떻게 추스려 가야 할지 생각하며 괴로워할 피해자를, 미션스쿨이 신앙을 빌미로 부드럽게 겁박하기란 아주 쉬울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교수에 대한 공지는 그가 아주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전혀 없으며, 학생 징계에 대한 공지도 올라왔다가 어느 순간 아주 없었던 일인 것처럼 사라진다.

미션스쿨은 '공동체', '우리 안의 죄' 등 신앙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미션스쿨은 '공동체', '우리 안의 죄' 등 신앙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이 맞물리면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고, 이에 대한 목소리도 점점 크고 잦게 들린다. 갑자기 부쩍 성폭력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성폭력이 별안간 많이 일어나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혐오이며 성폭력이라는 인식과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대략 창조과학론, 크툴루론, 지구평평론 정도보다 조금만 비논리적인) 설거지'론' 같은 '유사-유사-유사(×∞)' 사회학이나, 여성들의 '숏 커트'에 부들부들 떨고 '집게손가락'에 게거품을 무는 애처로운 행태 이전에도 이미, 백래시(backlash)는 주로 음침하게 모니터 뒤에 숨어 총여학생회 폐지를 도모하는 식으로 드러나곤 했다. 그런 움직임을 보면서 한심하다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놀라웠던 것은, 그 학교들에 폐지할 총여학생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갓니버시티에는 총여학생회의 'ㅊ' 자도 없었지만, 해일 같던 여성운동의 세례는 뒤늦게 조금씩이나마 결과를 만들어 냈다. 2019년 말, 뜻있는 졸업생·재학생들의 부단한 문제 제기와 노력에 힘입어 교내 성폭력 전담 상담 센터가 따로 분리됐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필사적인 노력 없이 갓니버시티가 성폭력 문제에 제대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가 정말 이런 문제점을 인식∙파악해서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학생들의 요구를 의식해 '승인'한 데 가까웠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봤을 때 성폭력을 다루는 갓니버시티의 대처는, 상처가 곪아서 터지고 흉터로 남는 동안 지혈도 하지 않고 붕대 대신 커버 시트를 붙여 가리기에 급급한 행태였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누군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유령처럼 이야기가 떠돌고, 올라오지 않는 공지와 '공동체', '우리 안의 죄악' 같은 말로 덮을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갓니버시티라도 그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아니, 애초에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은 안 하나?

"파괴적인 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
길을 찾아 돌아가려는 /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어떤 혼잣말을 상상해 본다"
(이랑,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부디 신설된 센터가 제 역할을 다하며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잘 운영됐으면 좋겠다. 사실 이 센터에서 할 일이 없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갓니버시티가 '우리 안의 죄악' 같은 모호한 말보다는 '교내 성폭력'이라는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며 마땅히 마주했어야 할 부끄러움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회복'은 다쳤음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한편, 숱한 성폭력과 추가적인 가해들 속에서 생존했고 여전히 생존해 가고 있는 이들에게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없다. 그저 잘 해 왔고,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고, 앞으로의 삶이 여전히 빛나길 바란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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