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지."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명절 가족 모임에 안 가게 된 게 언제부터더라. 신실한 목사·장로·권사들로 구성된 친가 어른들은 조카가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얼굴만 보면 "이제 가정 꾸려야지", "좋은 소식 없니", "그런 기사(?) 쓰면 누가 데려가니…" 같은 말을 툭툭 던졌다. 웃는 얼굴로 "좋은 사람이나 소개해 주고 그런 말씀 하세요"라고 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별것도 아닌 말들 때문에 명절만 다가오면 명치 부근이 답답해졌다.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족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가족 모임에 가지 않고 명절을 온전히 휴가처럼 보내도 쓴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명절이니까 다 같이 모여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를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다 그대로인데 나만 참여하지 않는 추석 예배를 상상하면 뭔가 혼자 죄(?)를 짓는 것도 같았다. 이런 생각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고….

교회 다니는 여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개발원·홍보연 원장)이 가부장적 교회 주류 문화 속에서 길 잃은 청년들이 눈여겨볼 만한 추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교회에서 듣고 자란 '정상 가족' 담론이 어떻게 여성의 자리를 지우고 드러내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명절 예배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자리다.

모임을 이끄는 개발원 연구원 장근지 전도사는 8월 31일 <뉴스앤조이>와 만나 "열심히 준비 중"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장 전도사가 준비한 '슬기로운 추석 생활'은 두 차례에 걸쳐 열린다. 1과는 9월 13일 오전 혹은 오후를 선택해 참여할 수 있다. 1과에서는 주로 '언어'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일상생활의 호칭, 명절 문화에서 여성이 어떻게 지워지거나 드러나는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장근지 전도사는 개신교인에게 가장 친숙한 예배에 새로운 언어를 녹여 내고, 틀에서 벗어난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일주일 뒤인 9월 20일 열리는 이번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여성주의 추석 예배'다. 주제도 '추석' 하면 떠오르는 송편을 염두에 두고 '그 떡 말고 이 떡 먹자'로 정했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추석 예배를 드리며 삶을 나누는 시간이다. 장근지 전도사는 "예배는 개신교인들에게 익숙한 행위다. 이 익숙한 틀 안에 우리의 언어를 녹여 내고, 이를 통해 서로 위안과 용기를 받아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예배의 가능성을 상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근지 전도사와의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누군가에겐 축제,
누군가에겐 괴로운 명절
개신교인에게 가장 친숙한
예배 언어로 풀어내기

- 프로그램 제목이 '슬기로운 추석 생활'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저도 명절에 큰집 가지 않은 지 꽤 됐어요. 친척들과 만날 때마다 '왜 이렇게 무례하지?'라고 생각한 순간들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리니까, 나만 조용히 하면 평화로우니까 그냥 참으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가족이어도 나는 그런 무례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거든요. 성차별적 문화 속에서 내 존재가 다른 여성에게 또 다른 노동을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걸 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안 가는 게 좋겠다 선언하고 아예 몇 년 전부터는 안 가고 있어요.

그런데 혼자 지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추석은 사실 축제잖아요. 그런데 왜 무례한 몇 명 때문에 우리는 이 축제를 축제처럼 즐기지 못하는가 싶었어요. 추석뿐만 아니라 명절이 돌아오면 저처럼 젠더 이슈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거든요. 마침 TV에서 '슬기로운' 드라마 시리즈를 했잖아요. 우리도 '슬기롭게' 추석을 보내는 방법을 고민해 보면 좋겠다 싶어 기획하게 됐어요.

- 여성주의 추석 '예배'에 눈길이 갑니다. 왜 예배인가요?

몇 년 전 개발원에서 노량진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을 염두에 두고 'n포 세대를 위한 추석 명절 탄식' 예배를 기획한 적이 있어요.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노량진을 지키는 청년들을 위한 예배문을 만들었죠. 그게 떠올랐어요. 이번에는 대상을 바꿔서 무례한 발언에 분노한 사람들을 위한 예배를 기획해 보기로 한 거예요.

명절이면 모여서 떠들썩하게 보내야 하는데 일단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일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개신교 신앙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포맷은 '예배'라고 생각했어요. 예배에도 축제의 의미가 있고, 이 형식 안에서 말씀과 성찬을 나누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떡'은 사실 진짜 먹는 떡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채워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추석 때 먹는 송편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해 예배까지 이어지게 됐지요. 물론 모여서 신나게 수다 떠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드는 '그 떡'이 아닌 생명의 말씀인 '이 떡'을 먹자는 취지로 제작한 포스터. 사진 제공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드는 '그 떡'이 아닌 생명의 말씀인 '이 떡'을 먹자는 취지로 제작한 포스터. 사진 제공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여성주의' 추석 예배는 어떤 내용으로 구성하나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대부분 예배로의 부름, 회개, 말씀, 성찬, 결단 및 파송으로 이어지잖아요. 이 틀은 유지하면서 명절에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가부장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하려 해요. 명절이라는 큰 행사에 여성들의 노동이나 슬픔은 가려져 있잖아요. 보통의 명절 예배문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죠. 개발원에 창조적 여성주의 예배 연구팀이 있어요. 명절뿐만 아니라 여성의 생활 리듬에 맞춰 만든 예배문이 많이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이번 명절 예배도 여성주의 시각이 반영된 예배로 구성해 보려고 해요.

틀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 예배가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다른 예배에서 경험했던 건데, 시작하기 전에 '평등한 예배를 위한 우리들의 약속문' 같은 걸 만들어요. 참가 신청을 받을 때부터 어떤 예배가 되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평등한 언어를 사용해요', '실수와 미완을 인정해 줘요',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 고개를 끄덕여요' 등 원하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남기시더라고요. 그러면 전 그걸 취합해서 예배에 최대한 반영을 하죠.

이번 '여성주의 추석 예배'에서도 일단 이 틀을 유지하려고 해요. 평소 기성 예배에서는 일반적인 교독문을 사용하잖아요. 이번에는 <여성 시편>(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에 나오는 여성주의 시편을 교독하고, 최근 강남역 여성 혐오 범죄 5주기 여성주의 연합 예배에서 발표한 '주기-도문'으로 주기도문을 대신하려고 해요. 그동안 해 온 것과 같은 기도이긴 하나, 여성주의 요소를 조금 더해서 고백하려는 시도죠. 불평등한 명절 문화에 대한 추모, 당연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노동을 애도하는 시간도 따로 마련하려고 합니다.

성찬을 나누면서도 다양성을 염두에 두려고 해요. 추석이니까 꼭 송편을 먹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명절에 먹고 싶었던 음식이 꼭 송편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었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순서도 갖고요. 기존에 하던 찬양에 더해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찬양들을 우선적으로 불러 보려고 해요.

마지막으로는 공동 축도를 위한 기도문을 함께 읽고 헤어질 건데요. 이 기도문을 좀 잘 써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 삶을 붙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갈 수 있는 거라서요. 이번 명절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유용하게 쓰이는 기도문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요. 구약 시대에도 보면 절기마다 기뻐하면서 서로 환대하는 풍습이 많잖아요. 우리 명절과 그걸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조금 더 창조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도록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어요.(웃음)

- 수많은 예배 중에 '여성주의'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 같기는 해요. 여성주의 예배가 갖는 장점이 있을까요.

다른 단체에서 여성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함께 예배한 적 있어요. 한 반 년 정도 진행했는데 참석자들 만족도가 상당히 높더라고요. 참석자가 어떤 정체성을 가졌더라도 그 예배에서만큼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대요. 40살 넘게 자신이 사랑하는 개신교 신앙과 페미니즘은 함께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본 거죠.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다시 고백할 수 있어서 좋다"는 고백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그들이 버린 혹은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하나님은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된 하나님이었어요. 자신의 경험으로 다시 만난 하나님이 아니었던 거죠.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셨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벽을 만들어 놓았고 그걸 모른 채 살았던 셈이죠. 개발원에서 진행하는 이런 예배들이 그 벽을 조금씩 허무는 데 기여하면 좋겠어요. 그 누가 참여해도 포기하거나 도망가지 않을 만한 예배가 되면 좋겠어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는 찬송가 가사는 누군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는 찬송가 가사는 누군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솔직히 '정상 가족'과 '남성 중심주의'가 주류인 교회 문화에서 이런 움직임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맞아요. 누군가는 극소수의 이런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일단 한 사람을 위한 예배, 한 사람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예배로 만족하고 있어요. 제가 여성주의 예배 모임을 인도하면서 보면, 처음에는 다들 마음이 좀 닫혀 있는 게 보여요. 그런데 2~3주 흐른 후에는 한두 분씩 얼굴을 보여 주세요. 그 사람은 분명 마음에 동요함이 있었다는 얘기죠. 실제로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더 이상 예배자로서의 삶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여성주의 예배에 와서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온전한 예배자로 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면서 오열을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찬양하면서 눈물 흘리시는 분이 많았어요.

제가 여성주의 예배를 지속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예배가 닫히면 우리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 말이 제 마음을 정말 크게 움직였어요. 모이는 사람은 비록 스무 명도 안 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이면 무려 스무 개의 이야기가 되는 거잖아요. 파송받은 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전도도 하시고(웃음), 페미니스트로서, 개신교인으로서 삶을 충실히 살아 내시거든요. 이게 과연 사소하고 가치 없는 일일까요.

- 예배 얘기만 잔뜩 했는데요, 1과는 여성과 가족의 언어에 대한 강의로 구성하셨더라고요.

제가 사역하는 교회가 농촌 교회인데요.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저에게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 그곳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들께는 낯설었더라고요. 소통이 잘 안 되고 이해를 못 하시겠는데 어린 전도사에게 얘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나중에 담임목사님을 통해 그 사실을 전달받았는데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언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 '슬기로운 추석 생활' 1과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들이 얼마나 정상 가족 중심적인지 살펴보려고 해요.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은 아니고요. 일단 참여자들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가 뭔지, 여성의 경험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재현된 여성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을 살펴보려고 해요. 이런 주제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결혼, 연애, 관계로 이어지겠죠. 관계를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는 언어인데,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는 과연 평등한지 질문해 보려고 해요. 평등하지 못한 언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시간도 가져 보고요.

원래는 예배만 기획을 해도 되는데요, 명절은 일단 가족이 중심이 되잖아요.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가족 시스템에서는 가족의 언어로 여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여성을 들어내기도 하죠. 틀을 정해 놓고 이 틀에 맞는 사람은 '착한 며느리 혹은 착한 딸'이라고 칭찬하고 상을 주고, 여기서 벗어난 여성은 철저하게 지워요. 이런 것들을 1과에서 다루면서 가족 내 여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여성주의 시선으로 명절 예배를 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함께 경험하면 좋겠어요.

-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예배를 추천하고 싶나요.

앞에서 쭉 설명한 것들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분이라면 누구나 오셔서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혼자 지내던 분들, 여성주의 관점으로 성평등한 명절을 함께 보내고 싶은 분은 누구나 오셔서 안전하고 평등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 그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슬기로운 추석 생활' 참가 신청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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