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시아버님은 7남매의 맏이셨다. 명절 아침이면 스무 명이 넘는 작은 집 가족들이 죄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에서 늘 부르는 찬송이 '사철에 봄바람'이다. 결혼하고 첫 명절, 남편 가족의 가정 예배 분위기는 야릇하게 생소했다. 시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그야말로 예배를 '보는(구경하는)' 분으로 앉아 계셨다. 사연이 있었다. 맏며느리였던 시어머니는 일찍이 홀로 신앙을 갖게 된 이후 제사 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으셨다고 한다. 어느 날 기회를 잡아 (어머니 표현으로) '제사를 엎으시고' 추도 예배를 드리겠다고 선언하시고부터 친척들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그 자리에 합류한 시점은 오랜 갈등이 일상이 된 어느 명절이었던 것이다. 형식상 예배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앉아 있어 주는 것도 감지덕지인 분위기였다. 무언의 저항 속에서 홀로 '고마워라 임마누엘' 힘주어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은 안타까웠다. 어머니께 힘을 실어 드리기 위해 힘을 내어 찬송을 불러 보지만 어쩐지 더욱 민망하고 어색해지는 분위기.

이런 분위기에서 불렀던 찬송의 가사를 보시라. 부조화의 극치요, 이율배반의 전형이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즐거운 하루하루." 아, 차라리 다른 찬송이면 어땠을까? 어쩌다 이 찬송이 명절 18번이 되었을까.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고'라는데, 갈등에 휩싸인 동기들이 민망한 노래 속에 어정쩡하게 마주하고 있다. 조상의 복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근본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가족들이 '하나님 아버지 모셔서 믿음의 반석이 든든하다' 노래하고 있다. 어서 이 예배가 끝나 식사 시간이 오길, 아니 이 불편한 명절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조차 그러했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이 찬송의 가사를 일말의 아픔 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명절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를 부르던 나의 원가정 역시 말로 내놓기 어려운 갈등과 복잡한 사연이 공기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명절 아침 부르는 '복의 근원'은 상실과 슬픔 그 자체였다. "산에서 10마일쯤 떨어져 있을 때만 그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가정도 그 사정을 모를 때만 평.범.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C.S. 루이스가 어느 편지에 썼다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개인 상담이나 집단 상담, 아니 사사로운 얘기를 하더라도 조금만 진실하게 개인의 고통을 나누다 보면 가족 이야기를 피할 수 없다. 중독자 부모로 인한 고통, 폭력, 경제적 어려움, 단절된 친인척 관계, 차별과 편애로 인한 분열, 한집에 살지만 소통은 포기한 채 남남처럼 사는 가족들… 백 사람이면 백 개의 크고 작은 아픈 가족 이야기가 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는' 가정은 꿈을 담은 상징이지 현실에선 없다. 사실 봄에는 봄바람이 불고 여름엔 태풍이 불고 겨울엔 칼바람이 부는 것이 자연스럽지, 사철 내내 봄바람이 말이 되는가. 부모가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학대로 죽음에 내모는 뉴스가 미세 먼지 온다는 뉴스만큼 흔한데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니.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정상적인 가족은 없다. 박제된 행복한 가족, 정상적인 가족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소셜미디어에 뜬 친구네 명절 풍경, 풍성하고 행복해 보여 그대로 <행복이 가득한 집> 잡지 표지로 써도 손색이 없을 사진. 그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옆에 있는 휴지 치우고 다시 찍고, 각도 변경해 다시 찍고, 그렇게 최소 열 장은 버렸다는 데 500원 건다. 소셜미디어 창을 통해 바라보는 남의 스위트 홈은 판타지일 뿐임을 알면서도 속는 게 우리다. 어쩐지 우리 가족만 이런 것 같아 부끄럽고 마음이 무겁다.

동화 속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행복한 가정, 드라마에 나오는 그 거실은 없다. 어느 가족이든 알고 보면 크고 작은 갈등으로 아파하며, 명절에 만나는 친척들끼린 다들 조금씩 불편하다. 이제껏 상담으로 만나 본 사람 중 가족 때문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행복한 가정 판타지로 바라보는 한 우리는 모두 창밖의 성냥팔이 소녀 신세가 되고 만다. 거기에 더해 '믿음의 가정'이라는 신화까지 덧씌워 몇 안 되는 '평범한'(평안한) 가정마저 불신자가 섞인 '미전도 집안'이라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은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고 작은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로 습관처럼 집결하는 명절이다. 상처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 따스한 음식이 주는 든든한 에너지 같은 것이 당연히 공존한다.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소속감과 함께 치명적 고립감을 주는 곳이기에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리하여 갈등의 불씨 또한 상존한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갈등의 불씨를 안고, 고속도로 위에 줄을 서서 밀리고 밀려 명절의 가족에게로 내려간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명절을 기다리는 이는 해외 여행 가려고 비행기 표를 끊어 놓은 사람들뿐인 것 같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피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전 부치는 기름 냄새 진동하는 가족 집결 기간을 살짝 피했다가 귀성길 매연과 전 부치고 갈비 굽느라 생긴 미세 먼지가 끝난 일상의 공기로 돌아온다면.

아무튼 해외 여행을 도모하지 못한 우리는 명절의 미세 먼지, 아니 미세 트라우마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트라우마'라고 하는 이유는 '명절'이 다가오면 심장이 뛰고 불안과 공포가 밀려온다 하시는 50년 차 장손 며느리인 시어머니의 증상이 떠올라서다. 20인분 떡국을 포함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고된 노동 때문이겠고. '제사를 엎으며' 겪으셔야 했던 불화로 인한 마음고생, 이에 더하여 불신 가족 전도에 대한 사명감 또는 압박감 때문이다. 몇 년 사이 명절 풍경이 달라졌다. 어른들 몇 분이 돌아가시고, 이런저런 변화로 명절 집결이 유야무야된 것이다. 혼자 전쟁을 치르듯 '사철의 봄바람'을 부르는 명절 아침이 아니다. '예수만 섬기는' 자녀들과 조촐하게, 힘 안 들이고 드리는 명절 예배가 되었다. 그런데도 명절이 가까우면 심장이 뛰고 불안이 심해지는 증세는 여전하시니 트라우마라 부를밖에.

명절이 끝나면 으레 가족 간의 극단적 폭력 사태가 뉴스로 등장한다. 저마다 풀지 못한 해묵은 가족 상처를 안고, 트라우마를 안고 다시 모였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처음부터 다짜고짜 극단적으로 표출되진 않는다. 나름대로 피차 애쓰고 노력할 것이다. 제사 대신 예배라는 것이 달갑지 않지만 화난 표정으로라도 꾹 참고 앉아 있어 주는 친척들처럼. 명절 준비를 위한 노동과 강요된 희생이 억울하지만 결국 예배를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하여 감수하시는 어머니처럼. 나름대로 긴장 속에 참고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1박 2일이 지나면… 휴우, 끝났다. 올해도 무사히!

말 한마디 어긋나기 시작하여 어긋맞은 사이로 틈이 생긴다. 벌어진 틈으로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싸움이 된다. 오래 묵히고 꾹꾹 눌러 온 상처와 감정은 긴 세월의 강한 압력 때문에 파괴적으로 분출된다. 가족 간 갈등의 극단적 폭력은 거기서 기인할 것이다. 어긋남의 시작은 늘 말 한마디이다. 툭 던지고 탁 받고, 다시 툭툭 더 세게 던지고, 탁탁타닥 받아치며 말 폭탄의 파괴력은 증폭된다.

시작하는 '툭'은 떡국 먹고 틀어 놓은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에 보태는 논평 한마디 같은 것이다. "나라가 뭐가 되려고", "세상 좋아졌다. 여자가 어디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폭력적이다. 그런데 댐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을 낸 첫 마디를 던진 그 사람은 자기 말이 가진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안) 한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냐? 텔레비전 나오는 여자애들 말한 거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그러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여자들한테 무슨 말을 못 하겠다며 차라리 입을 다물겠다고 한다. 정말 입을 다물고 계시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몇 년 전부터 명절이 가까워 오면 소셜미디어나 뉴스 기사로 '하지 말아야 할 말' 목록이 올라오는 것을 본다. "올해는 취업해야지", "국수는 언제 먹여 주냐?", "슬슬 아이를 가져야지", "살 좀 빼셔야겠어요." 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하면서 해도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수학 문제 풀이를 그냥 통으로 외워 버린 적이 있다. 이해를 못 하고도 정답은 써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좋지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그대로 외워 두면 어떨까 싶다. 한두 마디 외워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안다. 언어 습관이란 존재의 습관인데, 어리고 약한 사람을 존중하는 근본적 태도 변화 없이 툭 나오는 말이 달라지긴 어렵다. 하지만 외워서라도 내 안에 집어넣겠다는 의지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명절은 짧고 관계 맺고 살아갈 날은 기니 말이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반가운 변화는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의 섬세한 발달이다. 젊은 세대의 인권 감각은 저 앞을 달리고 있다. 부모 세대가 매뉴얼 놓고 공부하듯 배워 사용하는 IT 기기를 아이들은 척척 쓰고 있다. IT 기기 다루는 본능적 감각처럼 부모와 다른 인권 감수성도 장착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이유도 모르고 순종해야 하는데요?" "여성스러운 게 뭐죠?" 권위주의의 세례로 자란 세대로서는 금방 따라잡아지지 않는 감각이다. 별말 아닌데 분위기를 냉동시키는 반응에 민망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지난 추석에 화제가 되었던 김영민 교수의 칼럼으로 '추석이란 무엇인가' 화법(어쩌면 권법)을 익힌 조카라면 "결혼이 뭔데요?" "명절이 뭔데요?" 작심하고 정체성 되묻기를 할 것이다. 걱정이라고 한 말이, 웃자고 툭 던진 말이 이렇듯 예상치 않은 답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배울 때이다. 당장 이해가 안 되어도 일단 외우고 볼 일이다.

우리 집에선 어머니 시대의 명절 증후군은 끝나 간다. 산더미 같은 음식 만들다 허리 휘는 일도, 명절 아침 식사에 무조건 모여야 하는 규칙도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는' 신화와 현실의 괴리, 갈등의 불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따뜻한 감옥, 부드럽지만 질긴 족쇄 같은 가족 관계는 가늘게라도 늘 이어져 있다. 다시 명절이다. 정치, 젠더, 세대, 신앙의 차이와 갈등이 고스란히 명절 식탁에 함께할 것이다. 오랜 가족 문제가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방바닥에 굴러다닐 것이다.

스캇 펙의 그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가정은 따스하고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픔과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금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갈 수 있다. 태극기와 촛불, 세대의 차이, 젠더에 대한 입장의 차이. 다르다는 말로 부족한 간극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잇는 곳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이 현실감 없는 찬송이, 소망이 노래가 될 것이다.

정신실 /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작가. 저서로는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에니어그램>(죠이선교회), <연애의 태도>(두란노), <신앙 사춘기>(뉴스앤조이) 등이 있다.

※이 글의 일부는 정신실 작가가 2018년 5월 <큐티진>에서 연재했던 '내 맘에 한 노래 있어'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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