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 메뉴판.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여러 버전의 메뉴판이 명절 때마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닌다. 다이나믹플랜 블로그 갈무리

언제부턴가 명절이 스트레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명절 전이면 여성·청년 단체 소셜미디어에는 서로를 응원하는 글이 올라온다. 내 소셜미디어도 명절 이야기로 점령되는데, 불쾌한 일화나 불쾌한 일에 대한 통쾌한 대응을 다루는 글들이었다.

그중 '잔소리 메뉴판'은 명절 때마다 꾸준히 올라온다. 많은 문화 공간과 학원에서 청년들을 겨냥해 명절마다 '명절 대피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왜 명절만 되면 '잔소리 메뉴판'과 '명절 대피소'가 등장할까. 내 이야기를 모든 젊은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에 따라 20대 여성인 내가 어떤 말을 들을 때 스트레스받는지 정리했다.

1. 연애, 결혼(출산), 취업과 관련한 말

"(네가) 원래는 예뻤는데 살쪄서 연애하겠니?"

친척들이 모이면 꼭 누군가는 하는 말이다. 살찌면 연애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연애하지 않으면 소위 정상이 아니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한다. 연애하면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이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면 연애를 왜 하냐고 되물으신다.

"능력 있는 목회자(남성) 만나서 결혼해야지."

신학대를 졸업하며 전도사를 하고 있는 나의 경우, 능력 있는 목회자를 만나 결혼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하신다. 여기서 '능력'이란 대형 교회 혹은 중형 교회 목회자 자녀이거나 큰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제가 능력 있는 목사가 될게요"라고 이야기하면, 여자는 사모를 하면서 남편 목회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훈계를 듣는다. 목사가 되더라도 적당한 때에 결혼해서 남편 목회에 힘을 합쳐야 한단다.

결혼하지 않아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말들은 다행히도(?)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청년들은 명절 잔소리 메뉴판에도 등장하는 연애·결혼·취업과 관련한 주제의 말을 듣고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애를 안 하면 "외모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애를 하지 못한다"는 말도 한다. 연애하면 결혼은 언제 하는지, 상대방 연봉은 높은지 물어보며 평가와 충고를 이어 간다. '비혼'이란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 결혼했다면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아이가 있으면 둘은 낳아야 한다든지 생애 주기별로 예약돼 있는 말들이 줄을 잇는다.

내가 취업 준비생이었다면 어떤 말을 들었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취업에 관해 응원해 주지 못할망정 어깨에 짐 하나씩 더 얹는 말들…. 취업에 성공해도 더 그럴듯한 직장에 들어가라는 잔소리가 이어지니 할 말이 없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청년은 연애·결혼·직장에 대한 미래를 본인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다.

2. 외모와 관련한 말

"여자가 살이 찌면 보기 싫어."
"여자가 머리가 길어야지."

외모와 관련한 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이미 녹아들어 있다. 어른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외모 평가나 외모 충고가 빠지지 않는다. "살 빼야/화장해야/예쁘게 꾸며야, 연애/결혼/취업을 하지." 20대 여성에게 외모에 대한 부분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다. 지금은 단발이지만 과거 머리를 숏커트로 자른 뒤 가족, 친척에게 들은 참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길러야 예뻐지고 여성스러워진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내 몸에 관해, 내 외모에 관해 그렇게 평가와 참견을 할 일인지 모르겠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페미니즘 물결로 젊은 여성들은 '여자라면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문제의식을 품기 시작했다. 외모 가꾸는 것, 머리 기르는 것, 살 빼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하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 명절은 외모 평가와 차별 발언을 온몸으로 들어야 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없어져야 할 적폐에 가깝다. '여자가~', '남자가~' 고정관념이 담긴 말까지 들을 때면 저절로 다음 명절 비행기 표를 알아보게 된다.

3. '태극기 부대'와 관련한 말

"나라가 잘되게 기도해야 돼."

교회를 다닌다면 '태극기 부대' 어르신이 꼭 한 명씩, 많게는 여러 명 계신다. 명절에 함께 밥을 먹으면 꼭 나오는 태극기 부대 관련 이야기들…. 큰 스트레스다. 물론 나도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근거로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니, 답답할 때가 많다.

정치 이야기는 피할 수 없다 치더라도, 탄핵당한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말은 듣고 있기가 어렵다. 거기에 전광훈 목사를 목사랍시고 따르는 친척 어르신. 우리 어머니. 심하면 전광훈 목사야말로 핍박당하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시기까지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울화가 치민다.

4. '미투 운동'에 대한 말

"저 여자도 이상해."

모두 함께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미투 운동'이 연일 뉴스에서 흘러나올 때 특히 그랬다. "고발한 저 사람도 똑같이 잘한 것 없다"고 말할 때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인터넷 뉴스 댓글들도 고발한 여성을 탓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유언비어를 보고 "저 여자도 이상했다더라"고 말할 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득해진다.

미투 운동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피해자를 평가하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특히 20대 여성들은 대학 내 성폭력, 사이버 성폭력, 단톡방 성희롱 등과 같은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어쩌면 피해 당사자일 수 있다. 공감 없는 평가와 감수성 없는 말은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닫게 만든다.

이외에도 많은 말이 있고, 생각할수록 스트레스받지만, 이번 설에도 사랑스러운 조카들을 보기 위해 집으로 간다. 예수님도 바리새파 사람들 잔소리에 이렇게 응답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막 2:27)."

이 말씀을 오늘에 맞게 고쳐 본다.

"명절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명절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이은재 /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는 상임연구원으로, 성문밖교회에서는 전도사로 즐겁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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