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처음부터 평신도 운동이었다. 교회 역사에 있었던 교회 갱신이나 부흥은 성직자의 권력 독점에 대항해 평신도의 권리와 의무를 되찾으려 했던 운동이었다." - <존 스토트가 말하는 목회자와 평신도>(아바서원)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봉사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뉴스앤조이>는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격의 교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진격하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 보여 줘야 할 진정한 기독교의 역할과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기로에서 소명과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 전문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고군분투하며 사는 집사님·권사님·장로님,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좇아 약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교인분들을 소개합니다. 제보도 환영합니다. 주변에 '진격의 교인'이 있다면 언제든지 <뉴스앤조이> 홈페이지이메일페이스북카카오톡 등으로 알려 주세요.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구권효 편집국장] 박제민 녹색당 서울시당 사무처장(38)은 올해 1월 말까지 9년간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에서 일했다. 열악한 구조로 직원들 경력이 대부분 짧은 복음주의 운동 단체에서 꽤 오랜 시간 활동가로 지냈다. 기윤실 활동가 중에서도 최고참이었던 그가 돌연 서울녹색당 사무처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기독 시민운동 다음 행보가 정치라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야기해 볼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박제민 처장을 다시 본 건 11월 18일 평화 저널 <플랜P> 포럼에 그가 패널로 참여했을 때였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그는 포럼 중간에 녹색당 강령을 소개했다. "우리는 '녹색당'이라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싹틔워 인류가 지구별의 뭇 생명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빛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조곤조곤 말하던 그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 놀란 눈치. '설마 울컥한 거야? 어디가 그런 타이밍이야?' 정당 강령을 읽다가 울컥하는 사람을 본 건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오버 아닌가"라고 짓궂게 물었다. 11월 26일 서울녹색당사에서 만난 박제민 처장은 "부끄럽다"고 맞장구쳤다. "내가 좀 오버를 잘한다. 그때 얼마나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모른다." 우리는 크게 웃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정말 '오버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일요일 오후 동네 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단다. 녹색당으로 거취를 옮긴 10개월 만에 완연한 정치인이 된 그의 사연을 들어 보자.

감수성 풍부한 녹색당 서울시당 박제민 사무처장을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감수성 풍부한 녹색당 서울시당 박제민 사무처장을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어린이 시절부터 "민자당이 말이에요"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목격하며
"마음속에서 지도자들 모두 탄핵
내가, 내 친구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

- 지금 하는 일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올해 2월부터 서울녹색당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무처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고요. 공교롭게도 제가 들어올 때 사무처 인원이 전부 교체됐어요. 새롭게 구성된 사무처를 안정시키고 일이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무처 활동가들이 안정감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그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두려움도 있었고 도전도 됐어요. 10개월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비교적 신뢰와 우정을 쌓으면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큰 사고 안 치고.(웃음)

- 어쩌다 정당에서 일할 생각을 하셨어요? 기윤실에 계속 계실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신문 오면 2~3면에 있는 정치면 되게 재밌게 보고.

- 좀 이상한 아이였네요?

하하. 맞아요, 진짜 이상했어요. 어린이였는데 "민자당이 말이에요" 이런 얘기나 하고 다니고. 정치는 왠지 모르게 관심 가는 영역이었고, 그러다 보니 진로를 시민단체 쪽으로 정하게 됐어요. 직접 정치 활동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았거든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라는 생각으로 일했던 거죠.

- 그러면 어쩌다가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제 삶의 변곡점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용산 참사를 목격했던 거. 그건 제가 거의 목격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NGO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을 땐데, 출근길이 그 용산 한강대로였거든요. 그날 평소와 다르게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단체에 전화해서 늦을 것 같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현장 앞을 지나가는데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 걸 보고, 출근해서 검색해 보니 철거민들이 시위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다음 날 다시 출근길에 거기를 지나치면서, 폐허, 잿더미가 된 현장을 보게 된 거죠. 마음이 이상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 주 일요일 교회에 가니까 용산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그 전 주까지는 별로 이질적이지 않았던 찬양 인도자가 내뱉는 멘트들 "우리 기뻐합시다" 이런 게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못 앉아 있겠어서 그냥 나왔어요. 그게 저한테는 직접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과 관련한 활동을 해 보고 싶다는 계기가 됐어요. 신앙적으로는 건물로서의 교회 안에 머물던 신앙에서 교회 밖으로 나가는 신앙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그게 계기가 돼서 시민운동을 했다면. 두 번째는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거예요. 저는 그전에도 제주 평화 순례를 갈 때 세월호를 타고 갔거든요. 그 참사가 없었다면 그해에도 세월호를 탔을 거고. 지금도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선하게 기억이 나요. 일본 배 특유의 디자인에 110v 콘센트가 있는. 제주 평화 순례 갈 때 그런 사고가 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인솔자인데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살아서 나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더 이입이 되더라고요.

좀 더 구체적인 계기는 세월호 참사 1주기 때예요. 그때 정말 험악했거든요. 광화문 일대에 경찰들이 방패 진을 짜고 앉아 있고, 시민들은 그걸 뚫어 보겠다고 하다가 다 흩어져 버리고…. 그러면서 너무 화가 났어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요. 그때 한국에서 소위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 마음에서 다 탄핵시켰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내가 하는 게 낫겠다', '내 친구들이 하는 게 낫겠다', '그러려면 지금 정치체제를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 좀 실례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요. 이왕 할 거면 좀 더 '가능성 있는' 정당으로 갈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일단 민주당이 저한테 오라고 하지 않았고.(웃음) 지금 민주당을 비롯한 기성 정당 체제는 저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닌 것 같아요. 이미 짜여 있는 기득권 체제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첨병이 되어 활동하지 않으면 정치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어요.

물론 실제적인 권력을 획득하는 문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민주당 사람이 한 명 더 탄생하는 것, 국민의힘 사람이 한 명 더 탄생하는 것이 내가 보고 싶은 세상에 부합하는가라고 그려 봤을 때, 아니었던 거죠. 그것보다는 녹색당 정치인이 한 명 더 나오는 것이, 수는 적겠고 가능성은 작겠지만, 만약 이 가능성이 현실화한다면 그게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 좀 더 부합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민의 여지가 없었어요.

사실 이 질문을 사전에 받고 혼자서 머리를 막 굴리다가… 사람 일은 모르니까.(웃음) '내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다른 정당에서 활동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이 인터뷰가 두고두고 날 괴롭히겠구나' 이런 생각까지 해 봤는데.(웃음) 결론은 '아 그랬으면 좋겠다. 이 인터뷰가 기록으로 남아서,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때 이것이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면 좋겠다'였어요.

- 그럼 왜 녹색당이었던 거예요?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다른 나라에는 녹색당이 있다고 알고 있었어요. 녹색당은 핵 발전에 반대하고 탈성장을 지향한다는 얘기를 들었죠. 거기에 동의가 됐어요. 어려서부터 민주 시민이라면 정당이나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고 받아들였고, 당적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 했어요. 꽤나 조심스럽게 여러 정당을 살펴봤던 것 같아요. 다른 정당에 가입하려고도 했다가 꼭 직전에 망설여지더라고요. '정말 나랑 맞을까.'

그러다 한국에서 녹색당이 창당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뻤어요. 2012년 창당 때부터 당원을 했죠. 오래 고민해서 선택했기 때문에 애정이 있어요. 창당 초기부터 한동안 보여 줬던 녹색당의 모습은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설렘과 기쁨이 많았거든요. 힘은 없지만 녹색당원이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최근 여러 상황 때문에 당 내외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버티려 하고 있죠. 많은 당원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당의 강령을 기억하면서 버티고, 힐링하는 것 같아요.

- <플랜P> 포럼 때 강령 읽다가 울컥한 거 맞죠? 아니 아무리 당이 좋아도 강령 읽다가 울먹이는 건 좀 오버 아닌가.(웃음)

저도 매번 부끄러운데. 그때 정말 얼마나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모릅니다.(웃음) 제가 좀 감수성이 풍부해요, 인간 자체가. '세상의 어떤 정당이 뭇 생명들과 함께 지구별에서 춤추고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정치하겠다는 강령을 가지고 있을까.' 녹색당이 자랑할 게 여러 개 있지만, 그런 강령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라는 것과. 저희 당가도 되게 아름답거든요.(웃음) 그런 것들이 저를 여전히 울컥하게 해요. 오버하는 거 맞아요. 안 그러고 싶은데. 그래도 그런 맘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일하는 것 같아요.

정치 자체가 관심인 '정치 덕후'
'덕업일치'의 삶을 살게 되다
정치 혐오의 시대, 박제민 처장이 정치 자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실제 삶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정치 혐오의 시대, 박제민 처장이 정치 자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실제 삶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그러고 보니 4월 15일에 총선이 있었잖아요. 정당인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게 남달랐을 것 같은데, 소감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사실 녹색당이 당내 갈등 때문에 2월이 지나서 총선 본부가 생겼어요. 그만큼 이번 총선은 준비되지 않은 거죠. 결과도 좋지 않았고요. 그에 비해 거대 정당들은 굉장히 조직돼 있고, 심지어 민주당은 휴대폰 통신 기록을 선거운동에 활용하기도 했잖아요. 불법은 아니지만 저래도 되나 싶은 일이었죠.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 선거운동은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었죠.

한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녹색당은 유급 사무원을 쓸 만한 여력도 없는 상황이라, 당원들이 자기 시간, 자기 돈 써서 피케팅을 나와요. 유동 인구가 많을 것 같은 곳으로 나갔는데, 어찌 된 게 점점 사람이 줄더라고요. 다들 피켓을 땅에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다음 선거는 이렇게 아마추어적으로 치르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좋게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자기 시간·돈 쓰면서 나온 사람들이, 더 하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그랬어요. 그런 모습 보면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정당 활동을 하게 된 게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착한 사람들과 앞으로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고.

- 소수 정당에는 이번 총선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처장님은 녹색당에서 일하기 전부터 연동형 비례제에 관심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관련해서 <복음과상황>에 글도 여러 번 쓰셨는데.

저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찬성론자예요. 지금 한국 선거제도는 지역구에서 한 표만 더 많이 얻으면 당선되는 구조잖아요. 대부분 당선자도 50% 이하의 득표율이죠. 바꿔 말하면 50% 이상 표는 무의미하게 돼 버린다는 거예요. 왜 항상 선거 때 당선자를 찍은 표보다 더 많은 표가 무용지물이 돼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선거 결과가 거대 정당에 유리하게 날 수밖에 없고요. 늘 A당 B당이 치고받는 것이 과연 내 삶과 내가 챙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인가 질문했을 때, 전혀 아닌 거죠.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연동형 비례제라는 게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떤 표도 거의 무시되지 않으니 공정하게 정치권력을 배분해 줄 것이고, 그러면 소외된 목소리가 줄어들 테니까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럼 정당이 너무 많아질 것 같은데, 너무 혼란스럽지 않아?'라는 우려가 있는데요. 저는 '그럼 두 당이 왔다 갔다 하는 지금이 좋아요?'라고 되물어요.

-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사실상 연동형 비례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어요. 소위 '위성 정당' 때문에 소수 정당이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 셈인데요.

제도를 만들었는데도 정치권력에 욕심 있는 거대 정당들이 인위적으로 양당제로 회귀시킨 거라고 생각해요. 연동형 비례제 취지가 크게 두 번 훼손됐다고 봐요. 연동형 앞에 '준' 자를 붙였을 때.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에 '캡'을 씌우겠다고 했을 때. 거기에다 위성 정당까지 만들었죠. 연동형 비례제 취지가 완전히 훼손됐고, 결과적으로 지금 민주당의 1.5당 체제처럼 돼 버린 게 너무 안타까워요. 화도 나고요.

민주당이 처음에 왜 연동형 비례제에 찬성했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걸 기획했던 사람들의 의도는 옳다고 봐요. 이번에 거의 180석 가까운 의석을 획득했지만, 소위 격전지에서의 표 차이는 얼마 안 나거든요. 다음에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러면 다시 제1야당이 압도적 의석을 갖게 되는 구조로 회귀하게 될 거란 말이죠. 민주당에서 이걸 추진했던 사람이 말했는데, 연동형 비례제를 통해 진보파가 당분간 다수파가 되도록 하고, 민주당이 다수파의 리더가 되는 구조를 오래 가져가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합리적이라고 봤어요.

근데 준을 붙이고 캡을 씌웠죠. 일시적으로는 대박을 쳤지만, 너무 불안한 구조로 회귀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박근혜 탄핵 이후로 총선까지 한국 정치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테면 보수당의 변화라든지. 연동형 비례제 도입도 그렇죠.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온건한 다당제로 가는 것. 정부·여당의 욕심이 이걸 날려 버린 거예요.

- 다음번에는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제를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거대 정당들 탓해서 뭐하나라는 생각도 해요. 저는 연동형 비례제 찬성론자이고 저에게 허락된 것들을 통해서 그걸 통과시키고자 하는 운동가인데, 결국 국민 다수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해외에서 연동형 비례제가 도입된 사례를 보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정치권이 버티지 못하고 기득권 체제가 무너져 내려 도입된 걸 볼 수 있거든요. 우리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차근차근 국민들을 설득하면서 뚫어 내야 하는데… 이게 과연 언제 가능할까, 내 생전에 가능할까라는 생각도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원외 소수 정당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선거제도 개편에 찬성하는 운동가로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여기에 사활을 걸어야만 정치적 활로가 열리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일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녹색당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페미니즘이나 성평등에 관심이 있는 분, 동물권·식물권 말씀하시는 분, 전통적으로 탈핵 이야기하시는 분, 최근에는 기후 위기 말씀하시는 분 등등. 저는 이게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뭔가를 바꿔 낼 수 있는 도구는 정치라고 생각해요. 굳이 말하자면 정치 그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죠. 그래서 선거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정치학을 더 공부해 보고 싶어서 이번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어요. 낮에는 정당 일을 하고, 저녁에는 대학원에서 정치 실무와 관련한 일을 배워요. 저에게는 굉장히 기쁘고 좋은 일이에요. 소위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어서 만족감도 커요.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하나. 지금 닥친 현실이 쉽지 않지만,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일요일 오후 한 카페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
청년들에게 일요일 오후를 돌려줬다면
박제민 처장은 기윤실에 9년간 몸담으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사진은 작년 9월 예장통합 104회 총회 현장에서 기자회견 사회를 보는 박제민 처장. 뉴스앤조이 이용필

- 코로나 시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 가고 있는지.

사실 지금 교회 모습을 보면 어디 가서 종교가 개신교라고 밝히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일부러 '그냥 존경하는 사람이 예수다'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누가 저한테 '너 크리스천이야?'라고 하면 그건 또 맞는 것 같아요. 기록된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비슷하게 흉내 내면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걸 계속 기억하려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인을 통해서 독일 개신교 찬송가에 있는 요일별 기도문이라는 걸 받았어요. 그 기도문이 참 좋더라고요, 짧고.(웃음) 아침·점심·저녁으로 나뉘어 있는데, 때마다 반려인에게 텔레그램으로 기도문을 보내요. 예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예수도 사실은 유대교인이었잖아요. 그의 기도 생활은 유대교에서 가르침 받은 대로 아마 시간을 지켜서 정해진 기도문을 암송하는 형태였을 것이라고요. 그걸 흉내 내서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서 짧은 기도문을 읽어요.

코로나가 시작된 후로는 집에서 명상도 하게 됐고요. 반려인과 간단하게 예배하기도 해요. 제가 또 오버해서 예식도 만들고.(웃음) 좋더라고요. 그 시간에 깊은 안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코로나 시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저의 신앙생활 내지는 내적인 평화를 지켜 가는 방법인 것 같아요.

- 복음주의 운동에 오래 몸담으면서 교회의 민낯도 많이 보셨죠.

코로나 전에 언젠가, 일요일에 예배만 드리고 오후를 즐기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일요일 오후 카페에 앉아서 커피 마시고 책 좀 보다가, 갑자기 창밖을 보니 햇빛이 촤악 비치는데… 감수성이 풍부하다 보니까(웃음) 갑자기 막 울음이 나더라고요. 이 순간이 너무 평안해서.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 한국교회가 진짜 나빴다…'. 젊은이들에게 일요일 오후를 빼앗아 가다니. 그들에게 일요일 오후를 돌려줬다면 지금 한국교회도 훨씬 좋아졌을 텐데….

이 평화를 다시 교회 일로 내어 줄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할 만큼 했어요, 저는.(웃음) 제 젊은 시절 바쳐서 할 만큼 했고, 가능하면 다음 젊은이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결론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교회도 더 건강해졌을 것 같아요. 제가 그 일요일 오후에 흘렸던 눈물은, 뒤늦게라도 이런 시간을 찾은 것에 대한 회한과 감사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교회에서 할 만큼 했는데(웃음), 돌아보면 그 시간이 아깝기도 해요.

행복하고 재밌기도 했죠. 교회가 시켰어도 제가 동의한 거긴 하고요. 근데 교회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게 있잖아요. 뭐랄까… 국가 동원 체제와 비슷하달까. 토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일하게 하는. 어쨌든 제 결론은 '다른 사람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일요일 오후 시간까지 일하기보다는, 맛있는 차 한잔 마시면서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는 게 그 사람에게도, 교회에도,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에도 더 좋은 일일 것 같아요. 그런 게 결여된 시간이 너무 긴 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의 한 이유라고 봐요.

또 하나는 이런 거죠. 그때는 저도 그런 오류를 범했는데… 사실 젊은 사람이라면 사고가 더 열려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제일 많이 아는 것처럼 행동했는지. 이게 아니면 너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그런 단정적 발언을 많이 했죠. 얼마나 교만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니 '이불킥' 할 일이 많아요. 한국교회에서 자신이 젊은이를 생각하는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을 시킬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앙을 사고하게 할 것인지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일요일 오후를 빼앗아 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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