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웰치채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변선환 학장. 변선환아키브 갈무리
감신대 웰치채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변선환 학장. 변선환아키브 갈무리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1992년,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는 감리교신학대학 변선환 학장(1927~1995)을 출교했다. 교권을 잡은 교단 내 극우·보수 목회자들이 그를 종교다원주의자라며 이단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변 학장이 출교 판결을 받은 재판정은 당시 김홍도 목사가 담임했던 금란교회 교인들의 통성기도와 찬양, 야유로 얼룩졌다. 광란의 종교 재판이 끝난 후 변선환 학장은 고통스럽게 교단을 떠나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리회가 지금처럼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감리회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교회 성장을 우선시하는 근본주의 성향 목회자가 있었던 반면, 토착화 신학과 민중 교회 운동을 하던 목회자·신학자도 있었다. 1964년부터 28년간 몸담아 온 감신대를 떠나던 날인 1992년 10월, 변선환 학장이 남긴 송별사에서 감신대가 어떤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곳인지 알 수 있다.

"탁사 최병헌의 종교변증신학을 이어받은 토착화 신학자 해천 윤성범 선생님과 유동식 선생님의 한국적 신학을, 오늘의 다원주의 종교해방신학의 패러다임 속에서 재형성하려고 하였던 거룩한 곳, 감신대. 1988년 가을, 민주화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전대협이 대학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폭풍 거세게 불어 헤치던 그때 학장직을 받은 이래, 역사의 거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뇌하며 저항하는, 젊은 예언자들과 열려진 대화를 시도하며 리이벤다 캄프(Liebender Kampf),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통하여서 굳게 지켜 나아가야 하였던 곳, 감신대. (중략) 영광스러운 20세기와 함께하여 왔던, 100년의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최초의 신학대학, 웨슬리 신학의 유산인 경건·학문·실천이라고 하는 세 가지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맺혀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며 동료 교수와 총학이 한마음이 되어서 애썼던 거룩한 예언자 동산."

이동환 목사(영광제일교회) 역시 감리회와 감리회 신학을 자랑스러워했다. 재판 최후 진술에서 그는 "웨슬리 정신에 따라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이 감리회가 좋고 굉장히 자랑스럽다. 나처럼 젊은 목회자가 부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감리회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단은 정직 2년이라는 중징계로 그의 자긍심을 짓밟았다. 성소수자에게 축복을 베풀었을 뿐인데, 교단 내 목소리 큰 극우·보수 목사들이 만든, '동성애 지지 행위'를 '마약 및 도박'과 같은 선상에 놓은 법 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죄되었다. 28년 전 '종교다원주의'라는 주홍 글씨는 지금 '동성애 지지'로 바뀌었다.

변선환 학장 출교는 감리회 역사에서 부끄러운 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를 쫓아낸 김홍도 목사는 1996년 감독회장이 되었고, 감신대는 전·현직 감독과 대형 교회 목사들의 정치판으로 전락했다. 2010년대 들어 감신대는 탈동성애 강의를 허가하고 성평등 세미나를 취소하는 등 반동성애 기조를 강화하는 교단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내가 감신대에 다닐 때, 교수들과 선배들은 "그때 선생님을 지키지 못해 이 모양이 됐다"며 죄책감을 느끼고 수시로 한탄했다. 다양한 신학과 사상이 공존하던 학교와 교단이, 지금은 보수 일색인 타 교단과 별다른 것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제 감리회는 다른 교단에 비해 선구적으로 동성애 지지자를 색출하고 징벌하는 교단이 됐다.

변선환 학장의 종교 재판 역사를 기록한 최대광 목사(공덕교회)는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신앙과지성사)에서 "학자가 학설을 소개했다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면,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중세일 것"이라고 썼다. 목사가 축복을 베풀었다고 징계를 내린다면,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중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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