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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같이 일하는 직원이 찍어 온 사촌교회 예배당 사진을 받았을 때,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시절인 2010년 9월 16일, '대전 목회자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시집 <풀꽃과 놀다>(푸른길)를 읽고 나태주 시인을 초청해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사촌 형님 이근배 시인(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께서 당시 공주문화원 원장이었던 나태주 시인을 소개해 줬습니다. 나 시인은 소박하고 진솔하게 시와 삶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나 시인의 가장 유명한 시는 '풀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요즘처럼 척박한 시대에는 시 '사랑에 답함'을 품고 살아야겠지요.

"예쁘지 않은 것을 /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2019년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나태주 시인은 자기소개부터 남다르게 했다고 합니다. 시를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예쁜 마음을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연애편지"라고 정의하더니, 시인은 "그런 시를 써서 세상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서비스맨"이라 했습니다. 또 자신을 일러 "바로 그게 일흔 넘어 용도 폐기된 한 인간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라며 넉넉히 웃었는데, 이런 마음이 담겨서인지 시가 참 담백합니다.

이름이 '사촌'이라 친근한 사촌교회(김동일 목사)는 123년간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 뿌리내린 구원과 생명의 옹달샘입니다. 1897년 3월, 호주장로교회 손안로(Andrew Adamson) 선교사의 전도 활동으로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손안로 선교사는 순회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부산 초량은 물론 동래와 울산·마산·창원·통영·거제도 등 경남 일원을 순방했고, 한국인 전도사들을 택해 약품과 책자를 배부하고 이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부산 양산교회, 마산 문창교회, 창원 월백교회, 의령 상정리교회 등과 함께 함안 사촌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손 선교사가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집안의 조동규 씨를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조 씨는 예수를 믿으면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지 되물었고, 선교사가 "조선 사람 100만 명만 믿으면 자동으로 독립할 것이요"라고 답하자, 기독 신앙의 가치를 확신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기독 신앙에 감화되어 독립에 대한 확신을 얻은 조동규·조용관 형제는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600평의 논을 헌납했고, 기와도 직접 사서 덮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헌신적으로 노력과 열정을 쏟아 산골에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근방의 광산에 노동자 2000여 명이 상주한 것도, 외딴 이곳에 교회를 설립한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1908년 손안로 선교사는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위해 창신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맡았습니다. 이 창신학교는 3·1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신사참배와 성경 교육 금지 등에 저항해 폐교를 맞는 비운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파하고 개화사상을 고취하는 등 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조동규 씨 맏아들 조용석 씨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과에 입학하고, 3학년 때인 1919년 2월에 2·8 독립선언서를 동경 한인YMCA회관에서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원들을 조국에 파송하는 등 3·1 독립 만세 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사촌교회 출신으로 주목할 분은 이태준 순국열사입니다. 근면 성실을 인정받아 선교사를 통해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고, 재학 시절 안창호 선생에게 감화를 받아 항일 독립운동의 뜻을 세웁니다. 제2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된 후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기독회의원에서 일하다가, 1914년 김규식 선생 권유로 몽골로 건너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원합니다.

몽골에서 근대적 의술로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몽골 마지막 국왕의 주치의가 되어 1919년 7월 몽골 최고 훈장을 받았으며, 지금도 몽골에서는 신의神醫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의 병원은 중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거점 기지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했으며, 영사관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비밀 항일 활동으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군의관으로도 활약했으며, 한인사회당과 의열단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의열단에 폭탄 제조 기술자 헝가리인 마쟈르를 김원봉 단장에게 소개해, 그의 도움으로 제조한 폭탄들로 의열단은 여러 파괴 공작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레닌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에 지원하기로 한 금괴 일부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합니다. 2001년 몽골 울란바토르에 '이태준기념공원'이 조성되었으며,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함안 사촌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함안 사촌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의 사촌교회는 서부 경남 지역 복음의 단초를 제공했던 만큼 많은 교역자가 거쳐 갔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감당하는 김 목사님은 그림을 배우지 않았지만, 자연을 그림으로 옮겨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2018년 4월 부산에서 '자연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교회를 그릴 때 두드러진 것은, 높이 솟은 네 기둥이 떠받치는 종탑이었습니다. 고산준령을 병풍 삼아 서 있는 작고 소박한 사촌교회 예배당에, 굴곡진 교회 역사를 대변하는 보물이 매달려 있습니다. 1943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쓸 탄환 제작용으로 종을 압류하려 할 때, 교인들은 이 종을 지키기 위해 예배당 마루 밑을 파고 덮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수수하지만 치열한 여정을 담은 사진글을 읽으며, 사촌교회가 123년을 넘어 구원과 사랑,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복음 여정을 더욱 치열하게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나일강 동쪽에 펼쳐진 광대한 누비아사막 / 피라미드는 찬란한 신비를 품고 묵언 중이고

낙타 떼는 불타는 사막을 가로질러 간다.

인생의 어느 고비길이 사막 같다고 /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은 막막하여라.

그러나 막막함이 사라지고 나면 숨 막힘인 것을, 삶은 그 막막함을 가꿔 나가는 여정인 것을."

[<길 – 박노해 사진 에세이 3>(느린걸음), '막막한 사막', 105쪽]

이근복 /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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