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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950년 6·25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6월에 백령도로 가서 평화를 기원하며 중화동교회를 탐방하려고 기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코로나19도 심상치 않아 포기하게 됐습니다. 중화동교회 조정헌 담임목사에게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민족과 세계에 깊은 상흔을 드리운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137만 명이 넘습니다. 더구나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로 100만 명 넘게 사망했습니다. 때마침 한국전쟁을 새롭게 해석했다고 평가받는 박명림 교수(연세대)가 <한겨레> '6·25 한국전쟁 70년 :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기획 연재에 세 차례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뛰어난 내용 중 세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념과 민족, 이념 통일과 민족 통일은 빨리 내려놓을수록 좋다.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한 뒤 국가 대 국가 사이의 평화와 공존이 정답이다. (중략) 코로나19 이전부터 지구상에서 한국 국민과 청년들이 자유롭게 갈 수 없는 유일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통일 폭력으로서 한국전쟁의 유산 때문이었다. (중략) 분단의 반대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적대의 반대도 통일이 아니고 평화 공존이다. 통일이 목적이 되면 언젠가는 한국전쟁처럼 통일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

중화동교회는 그 자체로 한국교회 선교의 역사입니다. 방문 선교사들 흔적이 뚜렷한 것은 백령도가 중국에서 한반도로 접근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서해안 해로를 탐사하던 영국 해군 클리포드와 바실 홀이 1816년 상륙하여 한문 성경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 일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경 반입이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군함 암허스트호 일원이었던 독일인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성경과 기독교 교리책을 백령도에 남긴 첫 방문 선교사로 일컬어집니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 영국인 목사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1865년 9월 백령도에 상륙하여 두 달간 머물며 성경을 반포했습니다. 그 후 토마스는 풍랑 때문에 중국으로 물러갔다가 이듬해 대동강변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중화동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나 선교 단체가 아닌 개화파 정치인 허득과 중화동 주민이 자발적으로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 허득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정3품 당상관, 현 차관보급) 관직에 오른 백령도 지도급 인사였습니다. 정쟁에 휘말려 백령도로 유배당한 김성진은 신약성경을 집주인 허득에게 전하고 함께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허득은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개혁하는 가장 빠른 길은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이라 믿고, 섬 전체를 복음의 땅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가 소래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자 서경조 장로와 홍종욱 집사 등이 백령도를 찾아와 성경과 예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896년 8월 25일 동네 서당에서 예배가 시작되었고, 1898년 10월 9일 중화동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1899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실어 와 예배당을 세웁니다. 1900년 9월 중화동교회에 와서 허득을 비롯한 7명에게 세례를 준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화동교회 첫 담임목사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백령도는 전 인구 5200명 중 약 65%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교회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에 기독교인 비율이 90%에 달했던 것은 허득의 아들 허간 목사가 23년간 백령도 주민들에게 깊이 신앙의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고 양육한 열매라고 합니다. 백령도에 중화동교회 외에 세 교회가 설립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백령도·소청도·대청도 출신 목회자도 100여 명이라고 합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10개 교회가 함께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 왼편에 2001년 세워진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있습니다. 30여 평 규모 역사관에는 초기 중화동교회 모습, 최초 백령도 복음 전파 장면, 언더우드 선교사의 세례 집례 등을 표현한 모형물들에는 1816년부터 1902년까지의 백령도 기독교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중화동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중화동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백령도는 북한과 거리가 17km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북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6·25 때 잠시 내려왔다가 되돌아가지 못한 황해도 출신들로, 지척에 부모 형제를 두고 한 맺힌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백령도에서 특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섬을 삽시간에 장악한 인민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안심하고 예배드리세요. 우리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헌법에 신앙의자유가 있습니다." 이 말에 교인들은 피난 가지 않고 수복될 때까지 3개월간 아무 제재 없이 예배했습니다. 국군이 3·8선을 넘는다는 소식을 들은 인민군들이 북한에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자, 교인들은 배 한 척을 준비해 장연군 쪽으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백령도는 좌우익 간에 원한이 없다고 합니다.

바다로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백령도 주민들 간에 좌우 대립이 없는 것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 선언 관점에서 보면 참 소중한 현장입니다. 7·7 선언은 적대·대결·경쟁의 남북 관계를 화해·협력·동반의 관계로 바꾸었습니다. 남북 관계에 물꼬를 튼 획기적 내용으로, 북한을 타도 대상이 아닌 함께 번영할 동반자로 규정했으니 백령도는 평화의 유산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남북이 동반자로서 더불어 살려면, 진정한 소통이 필요합니다. 6월 중순, 북한이 갑자기 군사 도발 직전까지 몰고 갔을 때,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인 저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요즘 북한의 행태에 당혹스럽고 억장이 무너진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남북 군사 합의를 파기 선언 등 강경 기조로 나가더니, 16일 남북 화해의 상징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다. 급기야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방하는 내용이 담긴 대남 삐라(전단)를 대량 살포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잠시 보류되었다. 남북 관계가 이렇게 한순간에 악화되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겨울은 어차피 춥고 힘들지만, 이 겨울에 봄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한이 북한의 입장이 되어서 북한을 더 이해하려고 하며 인내할 때 창의적인 길이 열릴 것이다.

 

(중략)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이야말로 중심을 잡고, 예수님 사역의 토대인 '긍휼'의 마음을 품고 역지사지하며 남북 관계의 대전환을 위해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저보다 한 주간 앞서 이만열 장로님은 평화 칼럼에서 "'6·25' 한국전쟁 70주년, 이제는 한반도에서도 휴전 체제를 종전 체제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불통에도 불구하고, 70년이라는 세월은 '6·25'의 적대 관계를 종전 선언과 평화 관계로 해소시켜야 했다"고 쓰셨습니다.

일찍이 중국과 서양의 해상 관문이었고, 전쟁에서도 남북이 동반자로 살았던 귀한 유산을 품고 있는 백령도. 백령도의 중화동교회가 이제는 한반도 평화라는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 가길 기도합니다.

이근복 /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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