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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두 가지를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요,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이웃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실체를 꾸준히, 훈련받은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복있는사람), 167~168쪽]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 사회현상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국면에서, 월터 브루그만의 저서 <안식일은 저항이다>(복있는사람)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는 바닥이지만, 지역사회가 변화하는 데 교회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정치사회학자들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성적 성찰을 통해 관점을 바르게 세우고 예언자적 저항 정신을 살린다면,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 경쟁주의, 양극화, 빈번한 산업재해, 차별과 혐오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인 저항은 원천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이기에, 월터 브루그만의 주장은 중요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깊이 새길 때 저항 정신을 갖고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 때, 시장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상품 소비 시스템이 지배하고,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약탈·착취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대안적 삶의 가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해 제대로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나머지 6일을 대충 살 수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언자적 저항 정신으로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베를린-테겔 감옥에 갇혔을 때, 동료 수감자였던 이탈리아 과학자 가이따노 라뜨미랄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요, 목사인 자가 독재자의 생명을 노리는 음모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본회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쿠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 베를린 번화가)에서 자동차를 인도로 몬다면, 그렇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 주고, 유족들을 위로나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저항의 가치가 소중한 때인지라, 일제의 통치에 저항함으로 부흥을 경험한 강경성결교회를 주목하게 됐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을 뒤흔들 때, 일제 경제 침략의 폐해를 직접 겪고 있었던 강경 주민들은 3월 12일 논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적극 호응해 100여 명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3월 21일 장날에는 1000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만세 운동을 계속 이어 갔는데, 그 거점은 옥녀봉이었습니다. 이런 때, 강경교회의 새 자리를 답사하던 동양선교회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일제 경찰에게 구타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만세를 부르며 지나갈 때, 경찰이 선교사 일행을 시위대로 여기고 선교사가 여행 증명서를 보여 줬는데도 그를 무자비하게 폭행·연행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영국·일본 사이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영국 공사는 긴 소송 끝에 총독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 냈습니다. 배상금 5만 달러는 북옥리에 새 예배당을 짓는 기금이 됐지만, 본국에 돌아간 토마스 선교사는 구타 후유증으로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1924년, 일제는 강경 사람들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훼손할 목적으로 3·1 독립 만세 운동의 현장이었던 옥녀봉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일제는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이 신사에서 참배하도록 했는데,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김복희 선생과 학생 60여 명은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으로,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됐으며, 3·1 운동 직후 항일 비밀 조직 '애국부인회'의 결사대장으로 옥고를 치른 백신영 전도사가 1922년부터 강경교회에 부임해 가르쳐 온 결실이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신앙적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서, 신앙 운동과 민족운동이 결합된 것입니다. 1925년 3월에는 주일학교 윤판석 학생을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육에 대한 거부와 항거가 일어났고, 1943년 6월에는 이헌영 목사가 "천황도 심판받는다"고 주장해 구타·수감당하고, 교회가 잠시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일련의 저항 사건들은 강경 주민들이 교회를 우호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데 튼실한 그루터기가 됐습니다.

새해 1월 29일 호남선 무궁화를 타고 강경에 가던 날, 일찍 일어나 <한겨레> 신문을 펴 들었는데, 마침 강경에 관한 책이 소개돼 있었습니다. <식민지 민족 차별의 일상사>(푸른역사)는 강경상업학교 개교 이래 25년간, 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한·일 학생 1489명의 학적부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민족 차별이 신입생 선발부터 졸업 이후 취업에까지 일상적이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자행됐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충남 논산시 금강 하구에 터를 잡은 강경은 해운 교통의 요지로 상업이 활발해, 과거 평양·대구와 함께 3대 상권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관공서가 많이 세워졌고, 교육이 발달하고 종교도 왕성했습니다. 일제 때는 논산, 호남평야의 쌀을 착취해 실어 나르던 대표 항구였지만, 오늘날 강경 시내는 온통 각종 젓갈 가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강경성결교회는 1918년 김달성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로, 1930년대에 충남의 대표적인 성결교회가 됐습니다. 이인범 전도사가 설계한 한식 목조 양식의 예배당은 '논산 근대화 골목'이라고 불리는 좁은 골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은 1924년 완공됐고, 2002년 9월 등록 문화재 42호로 지정됐습니다.

건축한 지 100년이 돼 가는 한옥 예배당을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천장의 많은 목재들이 아직도 튼튼하게 보였고, 정사각형으로 된 36평짜리 예배당 구조는 단순미를 잘 드러냈습니다. 예배당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강경성결교회 환원소사"라는 글귀를 새긴 특이한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강경성결교회가 흥왕했던 1957년, 홍교리 옛 은행 건물로 이전하며 한옥 예배당의 소유권을 감리회로 넘겼는데, 그 건물을 옛 예배당 환원 운동으로 되찾은 일을 기념하는 비석이었습니다. 비석에는 2011년 성결교 총회에서 매입을 결의하고 추진해 성도들과 교회의 후원으로 2012년 12월 20일에 하나님 앞에서 환원 예배를 드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라고 써진 표지판에는 한옥 예배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옥 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 구성을 보여 준다. 특히 목재의 치목 수법과 가구 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 시기 건축 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옥 교회의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거의 1:1인 정방형의 평면으로, 중앙 부분이 있는 나무 주초 위에 세워진 두 개의 고주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한 칸막이 교회이다."

예배당을 찍은 후 논산 근대화 골목 끝에 있는 유서 깊은 옥녀동에 올랐습니다.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강경 시내가 눈에 훤히 들어왔는데, 유난히 큰 규모의 교회가 많이 보였습니다. 추웠지만 화사한 햇살에 들판과 금강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습니다.

나치와 히틀러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본회퍼의 깊은 고뇌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중략)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 불행한 나날을 내가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자일까? /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하략)"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간>(대한기독교서회), 212~213쪽)

지금은 한국교회가 일제에 저항하며 신앙과 민족을 지키려고 애쓴 강경성결교회를 기억할 때입니다. 그리고 본회퍼처럼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깊이 고뇌하고, 저항 정신을 살려 자신과 사회를 새롭게 열어 가려고 힘쓴다면, 비로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명확해질 것입니다.

이근복 /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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