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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하다 천년세월 찬란했던 신라문화 / 고려왕조 오백년에 조선왕조 오백여년

일제시대 육이오난 모진풍상 다겪으며 / 오늘까지 남았으니 장하도다 자랑일세

(중략)

경주시내 번화가의 대릉원이 남쪽이라 / 대릉원의 안에들면 아늑하기 그지없다

미추황릉 천마총에 황남대총 포함하여 / 이십여기 고분군이 풍만하고 편안하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어린아기 안기듯이 / 병풍처럼 두른능들 포근함이 그만일세

보름달이 뜨는밤엔 능이더욱 둥글구나 / 들불처럼 밝은만월 둥실둥실 떠다니네 (하략)"

- 김형기 목사, '이천 년 고도 서라벌 유람기' 중

고도 경주의 모든 유적, 산, 인물을 다 망라하고 있는 기막힌 사사조 시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경주제일교회에서 시무했던 김형기 목사님(경주 팔복교회)의 시집 <서라벌의 봄소식>(시간의물레)에 실린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새문안교회 대학부에서 저를 지도한 선배들 중 한 분입니다. 저는 1973년부터 탁월한 선배들에게 배우며 신학과 문학,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당시의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낭만 감정을 누르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노동자 야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일을 통해 저의 신앙과 삶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한번쯤은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의 떨어짐은 떨어짐이 아닙니다. 마침입니다. 그리고 시작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떨어지면서 다음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배를 두고 가야 하듯이 이 가을에는 우리 인생의 마침과 준비를 바르게 하는 겸손한 교훈을 마음에 품읍시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 정영택 목사, '낙엽의 떨어짐'

자기 성찰을 자극하는 이 짧은 글은 기독교 주간지 <가스펠투데이>에 실리는 정영택 목사님의 단상 '희망의 편지'(11월 26일)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선배이신 정 목사님은 2003년 경주제일교회에 부임하여 2018년에 은퇴하셨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역임했습니다.

2000년 고도古都 경주에 복음이 전파된 시점은 1902년이었습니다. 1886년 대구에 부임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미국 안의와(James Edward Adams) 선교사는 1902년 봄 경주 장날 노방전도에 나섰습니다. 불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땅에서 예수를 받아들인 박수은·김순명·이남생 등 10여 명이 1902년 5월 10일, 성건동 초가집에서 안의와 선교사 인도로 예배하면서 '경주읍노동교회'(현 경주제일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박수은·김순명 두 분을 영수로 세워 교회를 돌보게 하지만, 불교가 꽃피워 사찰과 불교 유물이 많은 경주의 특징 때문에 복음 전도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기성 종교와 갈등을 피하고, 근대 문화를 통해 기독교를 정착시키고자 교육 선교에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1909년 교회 부설 계남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경주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였던 이 학교에 김동리 작가도 다녔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에 망연자실한 시민들은 교회로 몰렸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는 설교는 1919년 3·1 만세 운동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일경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박영조 목사와 청년들을 투옥했고, 박 목사가 출감하자 대구 남산정교회로 쫓았습니다. 또 일제는 반일 민족 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계남학교마저 폐교시켰습니다. 1945년 7월 29일에는 성수주일을 방해할 목적으로 경보 사이렌을 울려 양화석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는데, 임오순·강철수 등 교인들이 거세게 항의했고 일경은 10여 명을 연행해 구금했습니다.

경주제일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경주제일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2018년 11월 26일 자 <경북연합일보>는 경주 교회의 역사·문화적 기여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기자는 경주제일교회가 일제강점기 경주 3·1 운동의 주역이었음을 밝히며, 만세 시위가 벌어진 경주 장터 신한은행 앞 사거리가 국내 독립운동 국가 수호 사적지로 지정됐다고 썼습니다. 경주제일교회가 2018년 11월 25일 아라키 준 박사를 초청해서 진행한 '신앙과 민족 문화의 만남 - 경주제일교회의 역사적 위상'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 또한 보도했습니다.

아라키 준 박사는 교회가 1921년 발견된 금관총 출토 유물을 경주에 유치하는 주역이었고 <동아일보>와 협력하여 신라 문화를 최초로 시각적으로 민족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아 교회의 역사적 위상이 높아졌다고 평가합니다. 경주제일교회는 경주 지역 기독교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문화를 전국 조선인들에게 전파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여행하지 못한 까닭인지 경주 가는 날은 수학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좀 이른 시간에 KTX를 탔습니다. 교회 사무실에서 친절하게도 교회 요람에 있는 역사 부분을 복사해 주었습니다. 아침 햇살로 경주제일교회의 석조 예배당은 단아하게 보였습니다.

1951년 건립할 당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는 단순한 형태의 100여 평 석조 예배당은 200명이 예배했는데, 지금은 사회봉사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쁘게 물든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1980년 건축한 본당과 석조 예배당을 찍고, 왕들의 계곡인 '대릉원'으로 걸어갔습니다. 20여 고분으로 이루어진 왕들의 무덤에 대하여 대구 출신이지만 경주에 사는 소설가 강석경은 <능으로 가는 길>(창비)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대릉원에서 유목민의 흔적이 묻힌 거대고분들을 만나며 내 뿌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한 것 같다. (중략) 그들이 신라를 국가로 만들었고 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와 오늘에까지 이어졌으니, 그 뿌리는 한국 문화의 원형이며 이곳은 정신적인 고향이다." (84쪽)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봉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스럽습니다. 아침 햇살에 잔디는 금관총의 금제 장식들처럼 화사했고, 고분 사이로 걸으니 영혼이 잠든 묘지가 주는 선물인지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무성한 송림을 지나 정문으로 나가 더 걸어가니 선덕여왕 때 건립한 첨성대가 들판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눈높이가 달라져서인지 첨성대가 이전보다 더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은 작았지만, 신라 1000년을 보여 주는 무성한 고목들에 눈길을 주며 산책하는 여유로움을 만끽했습니다.

지난 11월 19일 충남·대전 목회 아카데미 강사였던 백광훈 목사는 '우리 시대의 문화 변동과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와 문화는 궁극적으로 상관관계적이며 상호 변혁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와 문화는 서로 관계를 주며 형성되어 왔다. 교회는 문화를 변혁하지만, 거꾸로 문화 역시 교회의 변화를 촉발시키기도 한다."

지난해 1월 1일 경주제일교회에 부임한 박동한 담임목사님이 경주의 찬란한 전통 문화를 기독교와 잘 접목하여,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가 변혁되는 데 기여하면 좋겠습니다.

이근복 /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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