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대립하고 양극화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사회적으로 내가 일관되게 지켜온 자리는 양극의 어느 쪽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대립된 양쪽을 넘어선 제3지대였다." - 강원용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격변의 시대,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 일평생 대화와 상생의 길을 추구해 온 여해如海 강원용 목사(1917~2006)는 큰 족적을 남긴 신앙의 거인이다. 강 목사를 뿌리 삼아 나온 빼어난 인물이 적지 않다. 여성 신학자 정미현 교수(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도 그중 한 사람이다. 개혁주의 전통과 여성주의 관점을 엮는 유니크한 신학자로, 국제적으로도 그와 같은 신학을 추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는 자칫 개혁주의와 여성주의 양쪽에서 배척받을 수 있는 주제를 엮어 내, 오늘날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한국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제적으로 많은 활동을 해 왔다. 개신교에서 처음 세운 스위스 선교 교육기관 '미션21'(Mission21) 총경영자팀의 일원이자 여성과젠더데스크의장을 맡아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일했다. 유색인 중 유일하게 경영자 지위에 오른 것이었다. 신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에는 독일개신교회연합(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이 1986년 제정한 '칼바르트상'을 전 세계 여성 신학자 중 최초(비서구권 신학자 중에서는 남녀 통틀어 처음)로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여성신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가 있는 '마가뷔리상'을 비서구권 신학자 최초로 받았다.

정미현 교수는 2017년 세계개혁교회협의회(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에서 선정한 '1517년 종교개혁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10대 개혁신학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20세기 신학의 교부라 불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정 교수의 스승인 체코계 신학자 얀 말리치 로흐만(Jan Milic Lochman, 1922~2004) 교수와 함께 선정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정미현 교수는 모태에서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의 산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경동교회에 속해 있었다. 그의 가족은 경동교회의 장공長空 김재준(1901~1987) 목사, 강원용 목사와 연이 깊다. 정 교수가 기장 목사이자 신학자가 된 것도 강원용 목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 석사과정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로흐만 교수 지도하에 '칼 바르트와 요제프 흐로마드카의 계시와 역사 이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정미현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13년부터 연세대 교목이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정미현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13년부터 연세대 교목이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정 교수는 현재 연세대 교수이자 교목이다. 2013년, 연세대 설립 128년 만에 첫 여성 교목으로 부임했다. 그의 연구실이 있는 루스채플 원일한홀에서 8월 20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용은 두 편으로 나눠 싣는다. 첫 번째 글은 미션21 경영자팀에 합류하기까지 겪은 이야기를, 두 번째 글은 미션21에서의 경험과 그 이후에 대해 담았다.

- 신앙생활은 언제 시작했나.

태어난 곳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일찍 접했다. 조부모님이 1930년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를 지으셨다. 당시 할아버지가 영수(미조직 교회를 인도하는 임시 직분 - 기자 주)를 맡았고, 현재 이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에 소속돼 있다.

내 모태가 되는 곳은 기장 경동교회다. 부모님이 김재준 목사님 주례로 약혼했고, 강원용 목사님 주례로 결혼했다. 아버지 장로 장립식 때 김재준 목사님이 오셔서 축사를 남겼는데, 이 행사가 이분이 공적으로 했던 마지막 활동이었다. 김 목사님 추모일이면 항상 생전 육성으로 이날의 음성이 나오고는 했다. 남매간은 오빠 둘에 나 하나인데, 모두 강원용 목사님에게 아기세례와 견신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문턱을 밟고 다니며 강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자랐다. 경동교회 영향이 내게 결정적이다.

나는 1960~1970년대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미군 부대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학교 뒤 운동장 쪽으로 미군들이 보였다. 어린 나이여서 미군 주둔의 배경은 잘 몰랐지만, 왜 미군 아저씨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는 했다. 당시는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의 노동 인권 문제가 불거지고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경동교회가 피복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진행했기에, 노동자들을 교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은연중 분단과 경제 격차로 발생하는 한국 노동자 문제를 인식하게 했다.

그 시대에는 예배할 때 항상 경찰이 앉아 있었고, 강원용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열렬히 이야기하시고는 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의미가 담겼을 텐데, 초등학생 때 무엇을 알았겠나.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은 화를 잘 내셨다. 날카롭고 비판적이고 엄한 분이셨다. 예배에 늦으면 전혀 봐주는 게 없이 막 야단을 쳤다. 보통 교회 목사님을 생각할 때 온화하고 인자한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솔직 담백하셔서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생 때 주일학교 반사(교회학교 선생님을 학교 교사와 구별하기 위해 쓰는 말 - 기자 주)를 맡은 적이 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아이들을 모아 놓고 열심히 준비한 연극을 리허설했는데, 목사님이 보시고는 "도대체 내용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냐"고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신학적 깊이를 담기 원하셨던 것 같다. 솔직히 어린 나이에 칭찬받고 싶지, 야단맞고 싶겠나. 참 야속했다. 그렇게 철저한 완벽주의자셨다. 이런 경험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교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 이화여대 독문과로 진학했는데, 독문과를 선택한 계기와 이후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강원용 목사님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이셔서 경동교회에 외국 학자, 특히 독일 신학자·목회자가 많이 왔다. 이분들 설교를 자주 접하면서 막연하게 '저분들 옆에서 설교를 통역하면 부모님이 굉장히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독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점이 고등학교 1학년인데, 강 목사님이 여성주의 관점을 강조하셔서 대학도 여성운동을 하는 이화여대로 진학하기로 이때 정했다. 감사하게도 목표한 대로 됐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해에 강원용 목사님이 "너 여성 목사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 "저한테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답했다.(웃음) 신학이나 목회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통역 설교가 뭔가 있어 보여서 독문과에 온 것이지, 설교자가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장은 1970년대부터 여성 안수가 가능했지만, 여성 목회자들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독문학을 공부하고 난 뒤 다른 공부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사회학·역사학·예술사학 같은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그 길이 신학이 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 못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서 강 목사님이 다시 똑같은 제안을 하시더라. 겉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조금 철이 들었는지 1년 전과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지켜봤고, 이 정도로 혜안이 있는 분이 말씀하는 거면 뭔가 있는 게 아닐까.'

그 뒤로 신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기 위해 책을 뒤적거렸다. 박순경 교수님 책이 마음에 들더라. 박 교수님 책을 통해 신학이 무엇인지 정리하면서 조직신학에 관심이 생겼다. 3학년 때부터 이화여대에 개설된 신학 과목을 들었고, 기독교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해 박순경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다.

2004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수련회 옥한흠 목사와의 대담에서 발언 중인 강원용 목사(왼쪽)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 예배당 외관.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2004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수련회 옥한흠 목사와의 대담에서 발언 중인 강원용 목사(왼쪽)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 예배당 외관.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 석사를 마치고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바젤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대학교 4학년 때 얀 밀리치 로흐만 교수님이 경동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독문학을 공부하고 독일문화원도 다녀서 교수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길과 야고보, 헤롯의 길을 언급하면서 성서 본문과 상황을 연결했다. 그간 몰트만 교수님을 비롯해 유명한 학자들 설교를 경동교회에서 들어 봤는데, 나에게는 로흐만 교수님 설교가 가장 강력하게 와닿았다.

이후로 로흐만 교수님이 어떤 신학자인지 궁금해 저서를 찾아봤고, 편지까지 쓰게 됐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석사과정에 들어갔으며, 향후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내가 뭐든지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라 편지를 보낸 것인데,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면 학생으로 받아서 지도해 주겠다고 답장이 왔다. 그렇게 석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졸업하면 곧장 스위스로 가기 위해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스위스가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단지 로흐만 교수님이 스위스 바젤에 있어서 간 것이다. 바젤이 어디 속했는지도 몰라서, 대충 지도 보고 독일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러 갔더니 그곳 직원이 막 웃더라. 독일 접경지대지만, 엄연히 스위스에 속한 도시라고 했다. 그렇게 로흐만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받아 준 지도 학생이 나였다. 그게 어떤 자리인지 몰랐는데, 어느 날 학회 같은 데서 한 독일 학생이 나더러 좋겠다고 하더라. 자기는 학생 수가 많다는 이유로 지도 학생으로 안 받아 줬다는 것이다. 멀리서 오는 학생을 도와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 바젤에서는 어떤 것을 공부했나.

내 연구의 한 축은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근거해 제네바의 칼뱅으로부터 비롯된 개혁신학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20세기 칼 바르트가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 맥락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공부했다. 스위스 개혁 전통이 바르트 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구한 셈이다.

유럽에서 공부할 때 가장 도움이 됐던 점은 칼 바르트가 살았던 현장에서 공부한 것이다. 1910년대 바르트의 초기 목회지였던 스위스 작은 마을 자펜빌은 공장 지대였다. 그는 여기서 경제적 문제, 노동 불평등 문제에 접근했다. 나도 이런 현장에서 많이 배웠다. 나치즘과 분단 상황, 냉전 시대 문제도 현장 학습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체코 태생의 로흐만 교수님 덕분에 덤으로 얻게 된 것은 체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맥락과 상황이다. 연구하면서 1930년대 나치 시대에 칼 바르트와 같이 활동했던 체코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드카(Josef Lukl Hromadka, 1889~1969)에 주목했는데, 바르트와 신학적 동지 관계이자 친구로서 우애를 나눴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바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신학적 차이도 확실했다. 흐로마드카의 신학 전통을 거슬러 가면 얀 후스((Jan Hus, 1372~1415)까지 이어지는 체코의 종교개혁이 보인다.

- 사실상 로흐만 교수에게 배우고 싶어 바젤대로 유학을 간 건데,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다.

바젤대는 스위스 최초로 1460년 세워진 대학이며 종교개혁 이후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1482~1531)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여전히 전통 유럽 신학부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여성신학이 공부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로흐만 교수님은 겸허한 분이라 "여성신학은 한국에서 박순경 교수님에게 많이 배웠을 것이다. 거꾸로 네가 나를 가르쳐 줘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여성신학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 신학과 우머니스트 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기도 하고, 미국 주류 여성신학에 관한 이야기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로흐만 교수님은 체코에서 나고 자라며 공부했고,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칼 바르트 제자였으며, 체코의 공산화 이후 미국 유니언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실력을 인정받아 바젤대 교수로 청빙되었고 총장까지 역임했다. 내가 유학했던 당시 바젤대에는 프리치 부리, 하인리히 오트, 로흐만 이렇게 세 분이 조직신학을 맡고 있었고, 저마다 신학의 방향이 무척 달랐다. 세 사람은 신학적 논쟁 가운데서 각자의 영역을 이어 갔다.

교수님 배경에는 체코의 역사와 신학이 있지만, 이분이 던진 화두 중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가 있다. 예수의 길과 프로메테우스의 길을 대비한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혁명을 통해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을 돕고자 불을 가져온다. 로흐만 교수님은 이에 대비해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길, 그리스도론을 강조했다. 충실한 바르트의 제자인 셈이다.

이분은 세계교회협의회와 세계개혁교회연맹(현 세계개혁교회협의회) 신학 자문을 맡아, 두 단체의 신학적 맥락을 잡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세계의 경제 불평등과 사회구조 문제에 대응했지만, 정치신학·여성신학을 언급할 때는 앞에 붙는 형용사가 아닌 '신학'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봤다. 상황에 가변성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설교단을 지켰다.

마틴 안톤 슈미트(Martin Anton Schmidt, 1919~2015. 왼쪽) 교수와 얀 말리치 로흐만 교수. 슈미트 교수는 중세신학을 전공한 교회사 교수로, 바젤에서 부전공으로 교회사를 공부한 정미현 교수를 지도했다. 사진 제공 정미현
마틴 안톤 슈미트(Martin Anton Schmidt, 1919~2015. 왼쪽) 교수와 얀 말리치 로흐만 교수. 슈미트 교수는 중세신학을 전공한 교회사 교수로, 바젤에서 부전공으로 교회사를 공부한 정미현 교수를 지도했다. 사진 제공 정미현

말년에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Iohannes Amos Comenius, 1592~1670)를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교육학·교육철학 분야에서 알려진 학자다. 데카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데카르트가 서구의 주객 이원론 도식을 언급할 때 통전적 시각을 설파했다. 아시아 맥락에 맞는 셈인데, 피조물의 상호 연관성, 신학이 전 우주의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코메니우스를 비롯해 체코 신학 전통에서 내려온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신학이 기후변화 시대를 비중 있게 고민하면서 전 지구적 문제에도 도움을 줘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20~21세기 기후변화 및 환경문제를 다룰 때 이 같은 신학이 통찰을 준다. 경제학자 오타 식(Ota Sik, 1919~2004), 기독교 윤리학자 아르투어 리히(Arthur Rich, 1910~1992) 같은 분과 공동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로흐만 교수님은 신학적 입장에서 토론에 임했는데, 사회·경제·환경의 문제가 학생들의 신학적 화두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체코 신학의 지형도>를 내거나 관련 논문을 쓰는 등, 그간 체코의 종교개혁과 신학을 소개해 왔다. 한국에서 체코의 신학에 주목할 이유가 있다면.

내가 유학을 간 1988년은 한국과 체코 사이에 국교가 없던 시기였다. 한국에서는 체코의 신학과 전통을 전혀 몰랐다. 로흐만 교수님에게 지도를 받으러 간다고 했더니, 한 교수님이 체코의 신학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책임을 느끼면서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 체코는 우리에게 중요한 국가다. 공산주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이고, 한국전쟁 때 4개 중립국 대표로 북한 편을 들었다.

우리 같은 경우,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화를 제대로 다룰 기회가 없지 않았나. 일단 그런 점에서 체코와의 교류에 의의가 있다. 체코 신학자 얀 후스는 공산주의권에서 혁명가로 많이 이용됐지만, 사실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 정신을 이야기했다. 시대적 선구자였다. 루터의 경우와 질적으로 다른 부분은 민중 가운데 더 파고들어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는 데 있다.

대학교 때만 하더라도, 체코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는 교회가 없다는 교육을 받고는 했다. 틀린 답이다. 우리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동구권 국가들에서 기독교가 몰락했느냐고 물을 때,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우리 오해를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줄 나라가 체코다. 그리고 체코가 겪는 현재 문제를 들여다보면, 소련을 향한 증오심이 무척 강하다.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친미적 경향도 있다.

우리는 소련과 미국을 다 경험해 보지 않았나. 서로 도움을 줄 부분이 있다. 체코에는 한국교회가 지닌 역동성이 필요하다. 체코 신학자와 교류하면서 서로 체질을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재작년에 흐로마드카 손자가 한국에 오기도 했다. 그분도 교류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 '바르트와 흐로마드카의 계시와 역사 이해'라는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계시와 역사의 이해에 대한 문제가 어렸을 때부터 관심사였다고. 논문 내용도 간단히 소개해 줬으면 좋겠다.

내 할머니는 집 앞 가까운 교회를 다녔고, 기도원을 좋아하셨다. 나를 데리고 산에 있는 기도원에 같이 가고는 했다. 사실 내가 자란 경동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조용하게 예배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기도원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경동교회 방식에 익숙했다. 많은 사람이 각자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원에 가지 않나. 도대체 어떻게 산에서 기도하다가 계시를 받고 내려가나 싶었다. 한국인 심성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서는 이 계시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시는 다른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다.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로 가는 도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지 않나. 어쩌면 간단한 이야기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역사적 책임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이 있다. 파악할 수 없다는 접근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파악한 것 같아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제로 바르트와 흐로마드카도 역사 안의 많은 현상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흐로마드카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비중 있게 언급하면서, 이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 반면, 바르트는 이 표현에 담긴 위험성을 염려했다.

나치즘이 등장했을 때 '히틀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표현이 나왔다. 독일 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했던 역사가 있지 않나. 그랬기에 바르트는 신학을 통해 계시라는 표현의 위험성을 밝혔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인데, 인간이 특정한 것을 계시라고 규정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그 계시는 인간의 이념이나 이상의 구현일 따름이다. 하나님일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사회적 책임이나 역사적 사건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을 논문에 담았다.

<복음과상황> 1997년 1월호에 실린 정미현 교수의 글. 체코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드카를 소개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복음과상황> 1997년 1월호에 실린 정미현 교수의 글. 체코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드카를 소개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 교수님 논문들을 보면, 칼 바르트 신학과 여성신학을 접목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초월적 신학을 강조하는 학자이고, 여성신학은 상황적 맥락을 중시한다. 바르트 신학을 반여성신학으로 보는 경향이 적지 않은 한국의 풍토 때문에 난감했던 경험을 저서에 언급하기도 했다. 둘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칼 바르트에게는 초지일관하는 맥락이 있다. 초기에 공장 지대에서 목회할 때는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문제, 노동운동에서 나타나는 문제의식을 품었다. 철저히 상황성을 중시한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자본, 사회구조 등을 둘러싼 갈등 문제에 대한 고민은 여성신학이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이다.

흔히 말하는 바르트 좌파 해석 방법론에 더 가까울 수 있는데, 이 방법론으로 접근하면 여성주의 등이 말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접근할 때 충분히 접목할 가능성이 있다. 바르트가 초월 개념을 이야기한 것도, 당시 인간의 이성과 이념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신학의 자만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초월 개념 아닌가.

여성신학자들이 칼 바르트를 비판할 때, 상황을 무시하고 형이상학적으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바르트를 제대로 안 읽고서 하는 말이거나, 미국 여성신학자들 비판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고 본다. 여성신학 대가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 1936~)나 메리 데일리(Mary Daly, 1928~2010)의 주장이다. 바르트가 백인-남성 우월주의 신학자였다고 간주하는 몇 가지 도식이 있다.

사실 초월 개념은 여성신학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여성신학이 가부장주의 대안으로 가모장주의를 택하자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남성 신이 지금까지 수천 년 지배해 왔으니까 여성 신 이미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여성신학의 한 부류지만, 이걸로 다 커버할 수 없다. 그것 또한 하나님을 여성 신 이미지에 국한하는 거니까.

대안적으로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거나 다른 상징을 이용할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여지를 준다거나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는 관점이다. 다만, 그 안에 갇혀 버리면 또다시 다른 이념만 재현하는 일밖에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초월 개념이 여성신학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 점에서 바르트를 원용할 수 있다.

-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어떤 활동을 했나.

1990년대 중반, 유학 끝나고 한국에 왔을 때 느낀 것은 권위주의였다. 대학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은 말도 못 한다. 내부 권력 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당시 신학계와 대학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나에게 "네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라"고까지 하더라.

또 한결같이 들었던 비판 중 하나는 앞서 말한 바르트와 여성신학이 어떻게 접목되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돌이켜 봤을 때 한국에 돌아와 활동했던 시점이 동구권이 무너진 때다. 당시에는 못 느꼈는데, 아마 내가 공부한 동구권의 신학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도 같다. 교계에 흐로마드카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기독교사상>에 원고를 보냈다. 지금 동구권이 완전히 끝나 버렸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느냐고 거절 메시지를 받았다.

재밌는 점은 <기독교사상>이 거절해 싣지 못한 글을 <복음과상황>에서 1·2부로 나눠서 실어 줬다는 것이다. 나는 진보 진영에서 주로 활동해서 <복음과상황> 성격을 잘 몰랐다. 집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서 무턱대고 보내 본 것이다. 당시 예장통합만 봐도 많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복음과상황> 운영 주체가 예장통합·합동 분들이었으니. 동구권에 기독교 선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받아 줬는지 모르겠지만,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기독교사상>에서 6·25 전쟁을 특집으로 다루는데 흐로마드카에 대한 해석을 써 달라는 요청이 왔다.(웃음) 예전에는 싣고 싶었어도 시대착오적이라며 기회를 안 주더니 2020년에 써 달라고 한 것이다. 다른 원고들도 있고 일정이 촉박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로흐만 교수님이 1995년 연세대에 와서 했던 강연이 있다. 제목이 '사회주의의 꿈은 남았는가'였다. 체제로서 사회주의는 무너졌지만, 그 꿈과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기에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보면 선구자적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동구권이 무너졌으니까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만 남으면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고, 자본주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다 덮어 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시기 이화여대와 다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꽤 오랫동안 대학 강사 생활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강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연구 업적을 쌓아도 인맥이나 구조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었다. 사실 스위스나 해외에서는 계속해서 일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더 많은 역량을 펼칠 길이 있었지만,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로흐만 교수가 1995년 당시 '사회주의의 꿈은 남았는가'라는 주제로 진행한 연세대 강연 플래카드 아래 서 있다(왼쪽 정장 차림). 사진 제공 정미현
로흐만 교수가 1995년 당시 '사회주의의 꿈은 남았는가'라는 주제로 진행한 연세대 강연 플래카드 아래 서 있다(오른쪽 정장 차림). 사진 제공 정미현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진행한 로흐만 교수의 강연 당시 모습. 사진 제공 정미현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진행한 로흐만 교수의 강연 당시 모습. 사진 제공 정미현

- 약력을 보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0년 정도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해외로 나갔더라. 한국 생활이 쉽지 않았다면 곧바로 외국으로 다시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로흐만 교수님과 강원용 목사님 때문이다. 로흐만 교수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한국에 가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이분의 지조였다. 한국교회에서 신학 분야에 특히 발전시킬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잠재력은 있지만, 많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화가 하나 있다. 로흐만 교수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교단 총회에 같이 참석한 적이 있는데, 나보고 "지금 설교가 제대로 통역되고 있는지 봐라"고 하시더라. 내가 "유감스럽지만, 설교 통역은 굉장히 정확한데요" 했더니 통탄을 금치 못하셨다. 설교 내용이 "힘들게 하는 장로 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기도해야 한다"와 같은 유였다. 지금도 이렇게 말하는 분이 적지 않지만, 당시는 더 그랬다. 거의 목사들만 모인 자리였는데, 당시 설교 본문이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세우라'는 에베소서 구절이었다.(웃음)

로흐만 교수님이 "이토록 좋은 바울의 본문을 이렇게나 오용할 수 있느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절대로 어디 갈 생각하지 마라. 한국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다. 강사 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치이는 상황에서 "얼마나 치열한지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라고 해도, 때가 되면 길이 열릴 테니 참으라고 하셨다.

2003년 성탄절 인사 겸 안부차 주고받은 이메일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밴쿠버신학교 초빙교수로 캐나다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잘 지내면서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냈더니 "내가 늘 이야기했듯이 6개월 이상 외국에서 보내지 마라"고 하시더라. 심장 질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분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무척 힘들게 답장을 쓰신 것이었다. 바로 다음 해 1월에 돌아가셨다.

로흐만 교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견디다 못해 결국 스위스에서 온 요청을 받아들였는데, 이때 강원용 목사님이 만류하셨다. 스위스로 떠나기 직전, 매우 비싼 음식점으로 데려가 밥을 사 주시면서 "꼭 가야 하겠나. 할 일이 많은 한국을 두고, 다 갖춰진 나라에서 뭐하겠나"라고 물으셨다. "10년을 버텼는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을 잊지 않고, 스위스에서 갖춰지지 않은 나라를 위해 일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가지 말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갔는데, 2006년에 강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가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만류, 특별히 강 목사님이 마지막에 당부하며 만류하시던 모습과 말씀은 뇌리에서 늘 떠나지 않았다.(계속)

정미현 교수는 2005년부터 스위스 선교 교육기관 바젤선교회에서 일했다. 1815년 개신교 최초로 세워진 선교 교육기관으로, 현재 명칭은 미션21로 바뀌었다.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이자, 젠더 측면에서 신학 교육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아 8년여간 몸담았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정미현 교수는 2005년부터 스위스 선교 교육기관 바젤선교회에서 일했다. 1815년 개신교 최초로 세워진 선교 교육기관으로, 현재 명칭은 미션21로 바뀌었다.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이자, 젠더 측면에서 신학 교육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아 8년여간 몸담았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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