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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는 평화를 지향하고 실천하는가. 언뜻 당연한 명제 같은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은 현실 속 종교의 모습이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종교는 평화를 가르치고 증진하는가. 평화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과 실천이 실제로 평화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오늘날 수많은 갈등 중 다수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종교적 갈등과 연관된 현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세계화한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요인으로 복잡하게 얽혀 장기간 쉽게 풀리지 않는 갈등 사례를 종교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종교'와 '평화'는 어쩌면 가장 어색한 조합으로 느껴질 수 있다.

평화란 눈에 보이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개념에 가깝다. 반면, 폭력은 우리 앞에 생생하게 목격되는 현실이다. 개인적·일상적 관계에서도 일어나고, 집단과 국가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물리적 폭력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벌어지는 구조적·문화적 폭력도 존재한다.

폭력과 갈등의 원인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남북 관계를 생각해 보라. 너무 많은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어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실타래 같다. 평화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름과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공통점을 발견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대화의 핵심은 내 입장만 고수하는 독선적인 자세를 버리고 상대방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에 있다.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더 알아 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진정한 대화란 종교적 수행과 같다. 필자를 포함해 종교가 종교적 수행으로서 대화를 유지하고 실천했다면 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웠을지 모른다. 제 살 깎아 먹기인 말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출간된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모시는사람들)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 그 역전을 위한 종교적 대화> / 레페스포럼 기획 / 모시는사람들 펴냄 / 368쪽 / 1만 8000원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 그 역전을 위한 종교적 대화> / 레페스포럼 기획 / 모시는사람들 펴냄 / 368쪽 / 1만 8000원

이 책은 평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열린 대화의 산물이다. 2015년 겨울, 종교와 평화 연구를 위한 대화 모임 '레페스포럼'(REPES, REligion + PEace + Studies)이 만들어졌다. 이듬해부터 약 3년 동안 10번에 걸쳐 진행한 대화 모임에서 논의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종교와 평화라는 주제로 짧지 않게 모임을 이어 왔고, 그 결과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고 빠르게 쓰인 여느 책과는 차별점이 있다.

포럼에 참가한 22명의 다양한 구성원도 눈에 띈다. 이들은 각기 종교적 배경이 다르고 각각 연구하는 분야도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평화를 고민하는 열린 자세로 대화에 참여했다. 토론 참가자들이 다양한 배경과 이해관계 속에서도 어떻게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생각을 나누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 책이 선사하는 색다른 즐거움이자 유익이다.

책은 총 10가지 토론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각 장에 구체적 토론을 위한 문제 제기 형식의 글이 있고 토론이 뒤를 잇는다. 주제는 △국가 종교 △비폭력 △이슬람 △구조화한 폭력 △정체성과 차별 등 평화에 꼭 필요하지만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것들이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친절하게 소개하는 점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평화에 대한 깊고 진지한 논의를 대중 눈높이에서 비교적 쉽게 접근하도록 한다. 대화와 토론 형식으로 쓰여서 독자에게 큰 부담이 없다. 하지만 그 행간에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들이 숨어 있으니 천천히 씹고 음미해야 한다.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라는 제목은 '레페스포럼'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 준다. 평화 이해는 우리가 당면한 복잡다단한 폭력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출신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주장하듯, 폭력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구조화되어 있다. 구조적 폭력이 토양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한, 개인적·집단적·사회적 차원의 폭력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 폭력의 가장 깊은 곳에는 정신문화 혹은 사회 문화가 자리한다. 종교는 개인과 사회의 정신문화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종교적 성찰 없이 구조적 폭력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종교가 유일한 해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를 포함한 사회구조가 폭력의 문화에서 평화의 문화로 전환되지 않는 한, 폭력은 지속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폭력은 우리 가까이 내재화·일상화해 있다.

출판 직전 추가된 10장을 제외하면, 실제 마지막 장이었던 9장 '종교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는 이 책이 씨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자 결론이다. 구조적·지속적 폭력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간헐적 평화'로 표현한다. 포럼을 기획한 이찬수는 서문에서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인류와 종교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평화가 간헐적이라고 해서 불연속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불연속적 간헐성이 견고해 보이는 폭력적 구조를 근저에서 흔드는 심층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인류의 평화 운동이 끊어져 본 적도 없다. 현실이 아무리 엄혹해도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상상조차 사라진 적은 없다. 표층적으로는 불연속적인 듯 해도 심층적으로는 연속적이다." (8~9쪽)

이 책 하나로 종교와 평화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거나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 출간이 반가운 것은 평화를 위한 우리 노력이 간헐적으로나마 지속되고 있음을 우리 두 손으로 만지고 두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이런 대화 모임이 더 많아지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 글은 <일간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김상덕 /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공공신학, 평화,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명지대학교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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