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인 여성학 교수님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마치면서 퀴즈를 냈다고 한다. "이별에도 OO이 필요하다. 빈칸에 들어갈 말이 무엇일까요?" 대부분 중년 남성이었던 경찰들은 '눈물, 정산(현금), 낭만, 예의' 등 많은 답변을 내놨지만, 정답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 여대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바로 답변이 나왔다고 한다. 정답은 '안전'이다. "안전 이별하세요!"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인사다. 다양한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경찰이면서도 막상 남녀 관계에서 '안전'을 생각지 못했던 남성, 행복하고 즐거운 연애를 앞두고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여성. 이같이 극명한 현실 인식 차이는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 있는 젠더 의식을 반영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은 온‧오프라인을 통해 숨겨 왔던 경험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광풍처럼 일어난 미투 운동과 위드유 운동은 정치‧사회‧문화 등 조직이나 집단 내 만연한, 그러나 은폐돼 왔던 성추행‧성폭력 문제를 본격적으로 가시화했다. 여성들의 발화發話는 발화發火가 됐다. 오랜 침묵을 깨고 말하는 행위만으로도 여성은 분노를 표출하고 저항 담론을 형성하며 다른 여성들과 연대했다. 불법 촬영, 사법 불평등 반대 시위(광화문, 혜화역 시위)에서 낙태죄 폐지, 탈코르셋 운동까지 성차별 현실을 규탄하며 그간 개별화되고 억눌렸던 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나의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피켓을 든 이들은 여성을 타자화‧대상화했던 남성 중심적 사회에 뜨거운 활시위를 당겼다.

고통스럽고 슬프고 처절하기까지 했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 속에서 여성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치심, 낙인, 피해자다움이라는 억압 기제는 오롯이 여성에게만 작동했다. 젠더 갈등은 증폭됐고 혐오는 난무했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서로 지지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 사회에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타자화된 여성,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 가부장제에 순응해야 하는 여성이 다름 아니라 당신의 가족, 직장, 학교 등 사회 공동체 안에 함께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게 했다. 이전 페미니즘과의 차별성 속에서 태동한 지금의 페미니즘이 정치‧경제‧문화 등 중층 사회구조를 비틀고 틈 낼 즈음, 가부장제 권력 질서와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디지털 기반 가상 공간에서 여성을 타자화‧대상화해 소비하고 놀이감으로 착취한 사건들 역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2019년 5월에 기소된 성매매 알선 사이트 '밤의 전쟁'은 전국 2600여 개 성매매 업소로부터 광고비 명목으로 210억 원을 받으며 70만 회원을 보유했다. 국내 최대 규모다. 직장인, 기간제 교사, 시민단체 대표 등 숱한 남성들이 성매매 후기를 올리며 방장으로 활동했다. 경찰은 범죄 사실을 묵인하며 대가를 챙겼다. 수많은 대학의 남성 단톡방에서 벌어진 여성 품평회, 직장 내 남성 채팅방 사건에 이어 집단적 성 착취 조직인 박사방과 N번방은 상상 이상의 성폭력이 일상 깊숙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침투해 있음을 보여 줬다. 디지털 성 산업은 참여‧공유‧협력을 중시하는 탈중심성이 비시장‧비독점을 지향하는 디지털 시대 생산 원리와 맞물렸다. 남성의 욕망과 놀이를 넘어선 거대 산업 그 자체였다. 소비와 생산의 경계가 파괴되고, 공유와 참여를 통해 소비자가 공동 가해자가 되는 디지털 경제 시스템에서 성도착과 폭력성은 곧 남성성을 의미했다. 여성의 일상은 포르노가 되었고, 불법 촬영, 리벤지 포르노, 성희롱과 성폭력, 디지털 기반 성매매와 성 착취는 긴밀한 남성 연대 카르텔을 기반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적‧집단적 성 놀이, 성범죄다.¹⁾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부여받는다. 어떠한 구속과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모두에게 있다. 이는 자신의 성적 행동을 포함해서 내 삶의 섹슈얼리티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실천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인 성적 자기 결정권까지도 포함한다. 위계적 힘의 구조와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의사 결정을 행사하며 존중받을 권리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 몸과 성은 누군가의 놀이와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매매와 폭력 대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자명한 사실이 우리 시대에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깨어지고 뒤틀리고 훼손당하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는 로마제국 식민 지배 아래 놓인 유대 사회의 정치, 종교, 경제적 억압과 착취 속에서 인간 존엄을 선포했다. 수탈과 폭력을 당하며 인간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피식민지민들이 가난과 육체적‧정신적 질환을 겪으며 종교적 죄인이자 사회적 배제자로 살아가는 처참한 현실을 목도했다. 예수는 열병 앓는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사마리아 여인과 물 한 잔 나누며 담소하고, 간음하여 끌려온 여인과 같은 눈높이에 쭈그려 앉아 제국 정치와 율법주의적 종교 체제가 빚어낸 남성 중심 사회에 틈을 냈다. 그가 본 것은 여성의 몸에 가해진 시선의 폭력,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 배후에 있는 위계적 힘의 구조였다. 힘의 구조가 한 인간을 어떻게 짓밟고 존재를 지울 수 있는지, 동시에 남성 중심의 견고한 연대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모든 인간이 출생과 동시에 부여받은 존엄과 가치를 예수는 '하나님 자녀'라는 쉬운 언어로 표현했다. 예수는 깨어지고 뭉개진 인간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려 했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말하고 실천했기에 처형당해야 했다.

성은 몸의 언어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누구와 말하기를 원하는지, 어떤 말을 말해야 할지 알고 경험하고 경험되는 몸의 말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의 몸과 말은 상대에 대한 존중‧배려‧공감 속에서 표현돼야 한다. 유아기 때부터 체현된 몸의 언어이자 몸의 예의다. 예수는 성별‧연령‧인종‧지위 등 다양한 힘의 차이를 넘어 존재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나라는 사랑으로 서로 스미며 공명하는 습관, 몸의 예의와 더불어 이루어지며, 예의 없는 것들은 밥상을 뒤집어서라도 혼나며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 예수는 처형당했지만 지금 우리는 다르다(고 믿고 싶다). 수많은 이들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내면화된 힘의 구조를 넘어 거대 자본과 욕망에 결합된 뒤틀린 몸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맞는 몸의 예의를 재발견하고 교육해야 할 것이다.

송진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이화여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