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한국의 가구 중 절반(2018년 통계청 조사)은 아파트에 살지만, 많은 사람이 아파트의 '국회'에 해당하는 입주자대표회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수백 수천 세대 관리비를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수천만 원이 넘는 사업을 하는 기구지만 감시와 견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남기업 소장(토지+자유연구소)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문제를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다. 그는 2015년 10월부터 4년간 아파트 회장을 맡으면서 해임 요구와 압박에 시달리고, 수십 건의 민·형사소송을 겪으면서 아파트 개혁 과정을 밟아 왔다. 자신을 몰아내려는 이들에 맞서 결국 승리했고, 아파트가 민주적으로 관리·통제되도록 초석을 놓았다.

그는 이 경험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자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연재한 내용이 지난달 <아파트 민주주의>(이상북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강남이온다'를 통해 아파트 제도 개혁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남기업 소장은 7월 3일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4년이나 갈 줄 알았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 소장은 힘들었던 지난날을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의를 입에 달고 살면서 동네일에는 왜 관심이 없느냐'는 이웃의 타박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주민이 자치하는 아파트를 만들어 보겠다는 이상을 갖고 뛰어들었는데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장은 평소 부동산 개혁, 토지공개념, 기본 소득 도입 등을 주장해 온 '토지 정의' 전문가다. 그는 "정의를 입에 달고 사면서 동네일에는 왜 관심 없냐"는 말에 찔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 일을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장은 평소 부동산 개혁, 토지공개념, 기본 소득 도입 등을 주장해 온 '토지 정의' 전문가다. 그는 "정의를 입에 달고 사면서 동네일에는 왜 관심 없냐"는 말에 찔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 일을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두 달 만에 쫓아내려 해임 투표, 각종 소송
가족까지 정신적 스트레스 시달려
법적 분쟁 끝에 결국 승리
"나 같은 사람 또 나오면 안 돼…답은 제도 개혁"

<뉴스앤조이>는 남기업 소장이 아파트 회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2016년 2월 그의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자신을 쫓아내려는 동대표들에게 맞서 아파트 입구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하고 입주민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사연을 소개했다. 평소 토지공개념, 부동산 개혁 등을 주제로 연구 활동을 해 오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기본 소득형 국토 보유세' 설계에도 참여한 학자인 그가 아파트 회장이 되어 현실과 맞부딪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책 출간 후 다시 만난 남기업 소장은, 4년 전 인터뷰 이후 온갖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동대표들은 아파트 회의록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취임 두 달 만에 자신에 대한 해임 투표를 밀어붙이더니, 경비원들을 시켜 집집마다 해임 서명을 받고, 회장 동의 없이 무단으로 직인을 찍어 사문서를 위조하고, 회의 때마다 사이렌 확성기를 들고 와 발언을 막는 등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남 소장에게 맞서는 아파트 관리소장은 "어제도 교회에서 방언 기도를 하고 왔다"고 말하는 안수집사였고, 동대표 중 한 명은 순복음교회 목회자였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도 다투면서 괴로웠지만, 그가 버티고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아파트를 만들려는 진정성을 알아준 입주민들 덕분이었다고 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울 때가 많았다. 제대 날짜가 한참 남은 이등병 같았다. 자다 일어나 '원수를 죽여 달라'고 호소하는 다윗의 시편을 읽기도 했다. 가족들도 괴로워했다. 그만둬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나에게는 집요함이 있었고, 경찰 출신 등 수많은 입주민이 함께해 줬다. 법적으로도 오재욱 변호사(법무법인 에셀)가 큰 힘을 줬다."

<아파트 민주주의>에는 교회 분쟁을 방불케 하는 법적 공방과 대결 장면이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결국 아파트 비리 문제에 가장 깊숙이 연관돼 있던 동대표와 그에게 긴밀히 붙어 움직이는 관리소장의 유죄판결을 받아 내 이들을 몰아냈다. 이후 상식적인 사람들을 동대표로 선출하면서 아파트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기업 소장은 자신의 경험 자체보다 아파트 역시 개혁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봐 달라고 했다. 그는 "더 이상 나 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분투기가 '아파트 제도 개혁'을 위한 마중물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4년간 회장을 맡으며 분쟁을 몸소 체험해 보니, 무엇보다 제도 개혁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일부 입주민의 정의감과 상식에 호소할 게 아니라, 부패한 동대표들이 노리는 뒷돈 챙기기, 권력 휘두르기가 불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개선될 것이라고 헀다.

"연재 글이 나간 후 전국 아파트에서 연락이 왔다. 이 일은 한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바뀔 수 없다. 사례를 들어 보고 정도가 심한 경우는 굳이 무리해서 나서지 말라고 한다. 그 일이 가져오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결국은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아파트 외벽 균열 대형 사고 나자
"무너져야 재건축돼" 입주민들 아쉬워해
"집은 불로소득 대상 아냐"

남기업 소장은 아파트 회장을 맡으면서 다시금 '토지 불로소득' 문제를 절실히 체험했다고 말했다. 2019년 8월, 임기 만료 두 달을 앞두고 아파트 외벽 환기구에 균열이 생겨 분리되는 사고가 있었다.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수원시에서도 긴급재난대응반이 설치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고 건물 안전에도 이상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몇몇 입주민이 "건물이 무너져야 재건축 허가가 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남 소장은 아파트가 '사고파는 곳'이 아닌 '사람 사는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에서 "재건축을 앞당겨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을수록 아파트 관리비가 제대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220쪽)고 지적한 그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관리를 못해야 하고 건물 상태가 나빠져야 한다. 그래야 재건축이 앞당겨져서 집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돈 많이 벌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는 건물 상태에 관심 가질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불의가 존재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집값이 오르면 언제든 팔고 나갈 수 있는 구조라서 굳이 감정을 소모하면서까지 불의에 맞서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500만 원을 남겨 먹는 입찰 비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쉽다. 1000세대가 500만 원을 분담하면 1가구에 5000원꼴이다. 5000원 더 내고 말지 그거 때문에 동대표들과 감정적으로 싸우고 절박하게 매달려 다툴 이유가 없다. 반면 500만 원을 남겨 먹으려는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정말 목숨 걸고 한다. 공익과 사익이 충돌할 때, 공익은 분산돼 있어서 이기기가 어렵다."

남기업 소장은 <아파트 민주주의>에서 4년간 ㄱ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벌어진 일을 토대로 '주민 자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이를 어떻게 실현하면 좋을지 제언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남기업 소장은 <아파트 민주주의>에서 4년간 ㄱ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벌어진 일을 토대로 '주민 자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이를 어떻게 실현하면 좋을지 제언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남기업 소장이 회장을 맡은 지난 4년간 그가 사는 ㄱ아파트는 주민이 직접 개선에 참여한 놀이터, 아이들이 직접 가꾼 화단과 정원, 청년들이 드나드는 푸드 트럭 등으로 활기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잠시 머무르는 곳이 아닌 정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입주민들이 하나둘 변화에 동참하는 '아파트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했다. 남 소장이 임기를 마친 후 이런 뜻을 공유하는 동대표들이 선출된 일도 고무적이다.

그는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보다 입주민의 무관심을 접할 때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공동 책임은 무책임한 것(Everybody's business is nobody's business)"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아파트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입주민들의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이 일에 정의감을 갖고 나설 기독교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 소장은 아파트 제도 개혁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도 연결돼 있다고 했다. 그는 "보상이 제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여한 게 전체 이익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아파트야말로 기독교인이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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