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가 인터뷰한 부교역자 아내들 중 30대 여성 두 명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두 사람은 평범한 교회 청년이었지만 결혼한 사람이 목회자라는 이유로 한순간에 '사모'의 삶을 살게 됐습니다. 독박 육아와 고용 불안정, 교회의 각종 검열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어디에서도 속 시원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이 여성들 목소리를 경청해 보면 좋겠습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곽승연 기자] 1985년 가을, 김수영 씨(가명)는 한 시골집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이웃에게 전도를 받은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생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아 중학생 때부터 10년간 성가대 반주로 봉사했다. 학창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교회에 헌신하며 살았다. 평범한 '교회 다니는 착한 청년'이었다.

'사모'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남편을 처음 소개받을 때도, 처음에는 목회자 후보생이라는 점이 부담스러워 거절했다. 하지만 1년 뒤 지인 권유로 한번 만나 보게 됐다. 대화해 보니 마음이 잘 통하고 삶의 지향점도 비슷했다. 당시 김수영 씨는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일했다. 청소년들과 함께 부대끼며 사는 것이 행복하고 보람됐다. 남편도 청소년 사역에 비전이 있었다. 3년 연애하고 28세가 되던 해 결혼했다. 그렇게 그는 전도사 아내가 됐다.

출산 100일 후 옮기게 된 사역지
혈혈단신 감내해야 했던 육아

반년의 신혼 생활을 보내고 첫아이가 생겼다. 아이를 낳고 100일이 갓 지났을 때, 김수영 씨는 남편 사역지를 따라 거처를 옮기게 됐다.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남편을 부교역자로 청빙했다. 지방 신학교 출신 전도사가 서울로 사역지를 옮겨 가는 경우는 드물어서,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가면 친정도 시댁도 멀어지기 때문에, 오롯이 혼자 육아를 감당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막막하기도 했다.

"아기를 처음 키우는 건데 도와주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야 하고, 생소한 도시에서 새로운 환경과 교회에 적응도 해야 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지낸 첫 1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데는 가족밖에 없는데, 전임 전도사가 된 남편은 교회 일로 너무 바빴다. 아이는 갑자기 바뀐 환경 탓인지 잔병치레가 많았다.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갓난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다니며 김 씨는 많이 울었다. 그는 이때가 가장 힘들고 외로웠다고 말했다.

김수영 씨는 부교역자 아내로 살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시기에 옮길 수 없어서 항상 불안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곽승연
김수영 씨는 부교역자 아내로 살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시기에 옮길 수 없어서 항상 불안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곽승연

첫아이를 낳고 1년 7개월 뒤 둘째를 출산했다. 이후 꼬박 4년을 육아와 내조에 매진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조금 길게 맡길 수 있게 됐을 때, 한 사립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청소년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김수영 씨는 1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일과 육아, 교회까지 신경 쓰다 보니 과로로 응급실에 가기도 했지만, 계속 일하고 싶었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붙었다.

문제는 남편의 사역이었다. 서울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부교역자로 5년째 일하고 있던 남편은 다시 지방에 내려가고 싶어 했다. 남편은 서울에서 쉼 없이 달려온 탓에 심신이 지친 듯했다. 김수영 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부교역자의 삶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어렵게 잡은 일을 그만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지방에 내려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건 큰 부담이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시기에 옮길 수 없어서 항상 불안했다.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과 정붙이고 살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어린이집에 잘 적응해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아이들을 또 낯선 환경으로 내모는 것 아닌가' 싶었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왔을 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첫째가 유치원 생활을 힘들어했다.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미안했다. 특히 전 교회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할 때 참 가슴이 아팠다."

김수영 씨는 "부부가 대화를 통해 하나의 공통된 비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곽승연
김수영 씨는 "부부가 대화를 통해 하나의 공통된 비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곽승연
남편 사역지 옮겨 다니며 육아 매진
다시 일자리 알아보려니 '경력 단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방에서의 사역은 1년 만에 마무리됐다. 남편은 서울에 있을 때 학교를 다니며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방에서도 학업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편은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고, 김수영 씨는 남편을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서울로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남편 사역지에 따라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것은 김수영 씨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 씨가 결국 거처를 옮긴 것은 남편의 사역을 남편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소년 사역은 하나님이 김 씨 가정에 주신 비전이었다. 부부는 인생의 큰 결정을 내릴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대화들이 김 씨가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부부가 대화를 통해 하나의 공통된 비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애들을 재워 놓고 남편과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시간마저 없었다면 정말 불행했을 것이다."

김수영 씨 가족은 결국 올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남편은 새로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교회다 보니,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남편 사례비가 넉넉지 않았다. 교회는 맞벌이를 권장했다. 나이 서른여섯에 다시 취업하려고 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남편을 따라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김수영 씨는 제대로 된 경력을 쌓을 수 없었다.

"취업 문턱은 높아졌는데 내 이력은 그대로였다. 다시 도전해야 하는데 나이도 많은 것 같고 경력도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재취업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에 한없이 위축되기도 했다."

"'사모님' 되자 조심해야 할 것 많아져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자기 잃어
교회 다니면서도 신앙생활 피폐"
김수영 씨는
김수영 씨는 "사모는 신앙의 사각지대에 있다. 목사 아내들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서 자기 신앙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신앙'이었다. 목회자 아내로 8년을 살면서 김수영 씨는 자기를 잃었다. 평범한 교회 청년이 한순간에 '사모님'이 되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교인들 눈치를 보기 시작하니, 점점 '김수영'은 사라졌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다른 사람 시선을 의식하게 되니 신앙생활도 점점 피폐해졌다.

"사모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대로 나를 만들어 갔다. '사모라면 이런 걸 좋아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로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이자 사모로서의 역할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예배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자기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계기는 지난해 교회에서 했던 성경 공부였다. 그 성경 공부는 '여성' 교인만 대상으로 진행했다. 여성만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성경 공부에 참여한 교인들은 김수영 씨를 '사모'가 아닌 한 명의 크리스천으로 봐 주었다. 그들과 나눴던 교제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모임 안에서는 서로를 직분으로 나누지 않아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교인들이 내가 사모라고 멀리하지도 않고, 격식을 차리지도 않았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교제하니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엄마·아내·사모'라는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모'는 프레임이었다. 김수영 씨는 이를 깨닫고 조금씩 그 벽을 깨 보려 한다. 아직 시작하는 단계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강요받은 목회자 아내 이미지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을 가지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다.

"교회에만 갇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나가 충분히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사모들이 본인의 이름을 찾고 사명을 좇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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