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뭉쳐 있는 장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양민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회, 이를 조장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등을 주요하게 다루며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있지만, 사건 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평범한 사람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사료집을 읽고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이들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피해자 편에 섰던 이가 있는 반면, 가해자 곁에서 총칼을 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같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모순처럼 다가왔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앞서 '서북청년회' 기사를 연재했습니다. 이번 기획은 그 후속편입니다. 4·3 사건에서 나타난 기독교인들 모습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길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제주 4·3 사건에서 삶은 무참했다. 말 한마디에, 손짓 하나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집단 광기 시대에 생명은 보잘것없었다. 군경과 서북청년회(서청)는 죄 없는 주민을 붙잡아 고문하고 총살했다. 전날 밤 무장대 습격이 있으면 다음 날 내통자가 있다거나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했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거나 1947년 3·1절 시위에 나선 이력도 죽음의 이유가 됐다. 가족 중 사라진 이가 있는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서 대살代殺했다. 여성도 갓난아이도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덕과 이성이 짓밟히는 상황에서도 선의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제주도민 대다수가 폭도로 간주되는 시대였다. 도민 편을 든다는 건 자칫 좌익 사상에 물들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이 지닌 권한을 활용해 죄 없는 도민을 보호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총칼 앞에서 올바른 소리를 내는 이도 있었다. 4·3평화재단(양조훈 이사장)은 이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 부르며, 4·3평화공원에 이들을 위한 특별전시관을 마련했다.

많은 사람을 학살에서 구했지만 의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서청 출신 한 기독교인은, 마을에서 비기독교인을 총살하고 기독교인은 살려 주었다. 4·3 사건이 끝나고 그는 제주를 떠났다가 세월이 지나 다시 섬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자기가 구해 준 교인들에게 감사는커녕 도리어 외면을 받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4·3 사건에서 의로운 행동을 했던 기독교인을 소개한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의인은 될 수 없었던 신앙인도 함께 다룬다. 이들은 현재 작고하거나 소재가 불분명하다. <뉴스앤조이>는 <4·3은 말한다 5·6>와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에서 이들과 관련한 내용을 발췌해 정리했다.

집단 광기 시대에도 옳은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성산면 서청 단원 고희준
총살 위기 처한 주민 11명 보호
찬송가 다수 작곡
한국성가작곡가협회회장 역임

고희준 씨(1929~?)는 4·3 사건 당시 제주 성산면에 파견된 서청 단원이었다. 그는 본관이 제주이지만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평양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 월남해 서청 단원이 됐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제주 성산면 시흥리 주민들에게 다른 서청 단원과 달리 '좋은 사람'으로 회자되고 있다.

1948년 12월, 성산면에서는 서청 단원으로만 구성된 2연대 특별중대가 마을을 돌며 도민을 학살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9년 1월 성산면 오조리에서 벌어진 '다이너마이트 사건'이 있다. 특별중대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오조리 주민 20여 명을 끌고 가 고문 후 총살했다.

당시 제주도민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사용하고 있었다. 4·3 사건 초기 토벌 작전을 펼친 9연대는 도민이 경비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러나 1948년 12월 말 토벌군이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되면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성산면 오조리 옆 시흥리에서도 다이너마이트 사건의 여파로 주민 12명이 특별중대에 체포됐다. 시흥리에 있던 서청 단원 고희준 씨는 책임자 최 소위(이름 미상)를 찾아가 학살을 말렸다. 다음은 당시 시흥리 민보단장을 지낸 강인옥 옹의 증언이다.

"내가 우리 마을 사람들의 무고함을 말하니 책임자인 최 소위는 다짜고짜 내 오메가 시계를 빼앗은 후 '포로 1명 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김일성비행기 태워 주랴, 스탈린비행기 태워 주랴' 하면서 날 거꾸로 매달아 각목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서청 단원 고희준 씨가 나타났어요. 고희준 씨는 서청 중에서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지요. 그는 '이 사람은 민보단장인데 이러면 제주 사람 다 죽이게 된다'며 말렸어요. 그랬더니 최 소위는 '지금은 계엄령하인데 계엄령은 사람 죽이는 게 계엄령이다'라고 하더군요." [<4·3은 말한다 5>(김종민)]

특별중대는 다이너마이트 기술자라는 이유로 시흥리 주민 한 사람을 총살했다. 나머지 주민은 모두 고 씨의 중재로 살 수 있었다.

고 씨는 4·3 사건 이후 연세대학교·포클랜드대학교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음악을 전공한 그는 청주대학교 음악교육과에서 교수를 지내다 1994년 정년 퇴임했다. '놀라우신 주 은혜', '푸른 숲 맑은 시내' 등 찬송가 10여 곡을 작곡했으며, 한국성가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희준 씨 외에도 '의로운 사람들'에는 김익렬 중령, 김성홍 구장, 강계봉 순경, 장성순 경사, 방 경사(이름 미상), 문형순 서장 등이 있다. 이들은 집단 광기 시대에서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조남수 목사(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자수 선무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4·3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국의 쉰들러' 조남수 목사 
자수자, 총살·예비검속 처하기도
4·3 사건에 대한 인식 한계

조남수 목사(모슬포교회)는 문형순 서장(모슬포경찰서)과 함께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다. 그는 1948년 11월부터 문 서장과 함께 자수 선무 활동을 펼쳤다. 가족 중에 산에 오르거나, 무장대에 음식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에게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고 살려 준다"고 권해, 1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모슬포 하모리 진개동산에는 조 목사와 문 서장을 위한 공덕비가 세워졌다.

억울한 희생을 막기 위해 펼친 자수 선무 활동이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1948년 12월 13일, 대정읍 동일1리 주민들은 "자수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조 목사 말을 듣고 자수를 선택하지만, 며칠 안 돼 군경에 끌려가 총살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자수해서 목숨을 구했던 이들이 '예비검속'돼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4·3평화재단이 조 목사를 '의로운 사람들'에 포함하지 않은 건 자수 선무 활동의 부작용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1988년 회고록 <4·3 진상>(월간관광제주)에서 4·3 사건을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를 점령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으로 단정 지었다. 학살 피해 사례를 명확히 밝혀 억울한 희생자를 추모하자는 진상 규명 운동에 대해 "서로 죽이고 죽는 판에 도덕성을 찾고 성현 군자들만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탁상공론이고 한갓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교계에서 기독교인인 내게 조남수 목사에 대한 평을 종종 묻는다. 그가 자수 선무 활동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건 사실이지만, 자수해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도 적지 않다. 회고록에 밝혔듯이 4·3 사건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자수했던 도민은 한국전쟁 때 '예비검속'돼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림면 수원리 '예수하르방'
생사여탈권 쥐고 기독교인들 구명
비기독교인의 무고, 알면서도 방치

조남수 목사는 자수 선무 활동뿐만 아니라 군경에 붙잡힌 사람들의 신원을 보증해 주는 일도 했다. 감방에 갇힌 사람을 변호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구명 활동은 다른 지역에도 있었는데, 한림면 수원리에 사는 '예수하르방'이라고 불리는 서청 단원도 억울하게 갇힌 사람의 신원을 보증해 줘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하르방'은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예수하르방'은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런 그를 사람들이 '하르방'이라며 존대한 건, 말 한마디면 생사가 오갈 정도로 그에게 막강한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예수하르방'이라고 불렸다. 서청 단원이라며 '서북하르방'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수원리에서는 김 아무개의 밀고로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평소 마을에서 천대받던 김 아무개가 4·3 사건 발발 이후 복수심에 젖어 무고한 주민을 밀고해 여러 사람이 희생된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총살당하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김 아무개에 대한 원성이 커졌다. 결국 예수하르방은 "이 사람을 살려 두면 애꿎은 사람 수십 명이 죽을 것"이라며 그를 군경에 넘겨 총살에 처하게 했다.

힘 있는 사람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쉽게 죽고 사는 시대였다. 뇌물도 성행했다. <4·3은 말한다 6>에는, 토벌대에 끌려간 한 주민이 면회를 온 아내에게 "우는 아기에게는 젖을 줘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슨 의미인지 금세 깨달은 아내는 여기저기에 돈을 바쳐 남편을 살려 냈다고 한다.

당시 수원리를 취재한 김종민 전 <제민일보> 기자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예수하르방 일화를 소개한 고성범 씨(현재 작고)는 당시 많은 사람이 누명을 쓰고 희생되는 상황에서, 다수의 기독교인은 예수하르방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예수하르방이 기독교인들만 신원을 보증해 줬기 때문이다. 고성범 씨 친척들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감방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예수하르방은 4·3 사건 이후 다른 의인들과 달리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세월이 오래 지나고 그가 수원리에 방문했을 때, 그에게 점심 한 끼 대접하겠다고 나선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구해 준 사람들조차도. 예수하르방은 마을을 떠날 때 원망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죽였어야 할 놈들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김종민 전 기자는 예수하르방이 이름과 달리 정말 신앙인이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예수하르방에게는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누구는 죽게 하고 일부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살려 줬다. 그런데 비기독교인 주민 역시 무고한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기독교인만 구했을까. 그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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