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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드러낸 신앙①] 두 군인
9연대 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소대장 채명신 소위
  • 박요셉 기자 (josef@newsnjoy.or.kr)
  • 승인 2018.06.01 08:30

제주 4·3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뭉쳐 있는 장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양민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회, 이를 방치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등을 주요하게 다루며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있지만, 사건 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평범한 사람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사료집을 읽고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이들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피해자 편에 섰던 이가 있는 반면, 가해자 곁에서 총칼을 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같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모순처럼 다가왔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앞서 '서북청년회' 기사를 연재했습니다. 이번 기획은 그 후속편입니다. 4·3 사건에서 나타난 기독교인들 모습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길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제주 4·3 사건 당시 기독교인은 어디에나 있었다. 미군정에도, 제주 군경에도, 군경의 검거를 피해 산으로 달아난 도민 중에도, 그들을 뒤쫓는 반공 단체에도 기독교인은 있었다. 이성을 잃은 폭력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은 비극을 멈추지 못했다. 신앙은 개개인의 이념과 사상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제주 9연대 3중대장 문상길 중위(당시 23세)와 3중대 2소대장 채명신 소위(당시 22세 중장 예편, 1926~2013). 이 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4·3 사건이 한창 일어났던 1948년, 같은 부대 직속상관과 부하로 만난 두 사람은 비슷한 연배에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각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4·3의 광풍은 이들도 피해 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4·3 사건이 종결하자(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해제),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 잊혀졌고 다른 이는 전쟁 영웅으로 기억됐다.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사진 왼쪽)과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중령. 뉴스앤조이 박요셉

'중립' 취한 9연대 김익렬 중령,
무장대 측과 평화협정 체결
우익 단체 방화 사건으로 무산
유혈 사태 장기화 고착

4·3 사건 발발 초기, 토벌 작전을 펼치던 제주 경찰과 달리 제주 국방경비대(오늘날 국군의 전신) 9연대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1947년 9월 제주에 부임한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중령(중장 예편, 1921~1988)은 일찍부터 연대 정보과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듣고 도내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어느 정도 예견했던 그는, 무장봉기를 단순히 제주도 전체를 적화하려는 공산 폭동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유고·회고록 <4·3의 진실>에서 "제주도에 이주해 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 대립이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 폭동으로 전개됐다. 공산주의 이념 투쟁 폭동으로는 볼 수 없었고 또 경찰력에 대항할 만한 그러한 조직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유혈을 최소화하고 가급적 평화적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무장대와 협상을 진행했다. 제주도 민정관 맨스필드(John Sugar Mansfield) 중령도 김 중령에게 무장대가 귀순할 수 있도록 회담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익렬 중령은 1948년 4월 28일 제주 대정면 구억리에서 무장대 총책 김달삼을 만났다. 4시간 회담 끝에 다음과 같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 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맨스필드 중령은 회담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제주 지역 모든 경찰에 지서 및 외부 활동을 일체 금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사흘 후인 5월 1일, 반공 청년 단체가 제주읍 오라리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서 평화협정이 결렬되고 만다. 무장봉기 1달도 안 돼 종결할 수 있었던 제주 4·3 사건은 기나긴 유혈 충돌로 치닫게 됐다.

새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 작전으로 한 달 내에 도민 수천 명을 포로로 삼았다. 영화 '지슬' 스틸컷.

반공주의자 박진경 연대장 부임
한 달 만에 수천 명 포로
독실한 기독교인 문상길 중위
무모한 토벌 막기 위해 상관 암살

미군정은 5월 5일 대책 회의를 열었다. 김익렬 중령은 미군정장관 딘 장군(William Frishe Dean)에게 4·3 무장봉기 배경을 설명하면서, 제주 경찰에도 책임이 있으니 자신에게 통솔권을 위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딘 장관이 옆에 있는 조병옥 경무부장(오늘날 경찰총장)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조 부장은 오히려 김 중령을 향해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앉아 있다"고 거짓말했다. 김익렬 중령은 그 자리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난투극을 벌였고,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다음 날 부로 김 중령은 9연대장직에서 경질됐다.

5월 6일, 새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반공 사상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9연대장 취임식에서 "폭동을 모두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실제로 그는 중산간마을을 휩쓸며 한 달 사이 수천 명을 포로로 삼고, 그 공을 인정받아 대령으로 특진했다.

9연대 중대장이었던 문상길 중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켜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전임 지휘관 김익렬 중령의 정세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1946년, 9연대 창설 초기부터 소대장으로 부임해 제주에 살면서 도민 사회를 이해하고 있었다. 무장봉기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단독 행동이었고, 동기는 관과 경찰, 우익 단체에 대한 불만이었다. 총칼이 아닌 대화로 얼마든지 진정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문 중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불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은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부하들과 '일'을 저지른다. 6월 18일 새벽, 대령 진급 기념식을 마치고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다. 직접 총을 쏜 사람은 문 중위의 부하 손선호 하사였다. 이들의 행동은 얼마 안 돼 군 당국으로 들어온 투서로 꼬리가 붙잡혔다. 암살 사건에 연루된 문상길 중위 등 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당시 암살 배후에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상길 중위는 법정에서 의혹을 부인했다. 이들은 김익렬 중령과 박진경 대령의 작전을 비교하면서 무모한 토벌을 막고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암살을 벌였다고 밝혔다. 박 대령을 직접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재판에서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박 대령은 반민족적"이었다며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주동자인 문상길 중위와 암살에 직접 가담한 손선호 하사는 총살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무기형 및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문 중위는 재판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일이다. (중략) 우리는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재판을 지켜본 옛 상관 김익렬 중령은 회고록에서 "(이들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드렸다"고 전했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25일 자 기사. 문상일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형이 집행됐다는 내용이다. 사진 출처 4·3아카이브

베트남전 영웅 채명신
4·3 사건 당시 제주 9연대 소대장
"남로당 인민해방군이 주민들 이용"

9연대에서 문상길 중위와 함께 복무했던 채명신 당시 소위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크게 활약했던 인물로, 오늘날까지 참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전쟁 중 장교 숙소를 거부하고 소대원들과 함께 지냈으며, 노년에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겨, 죽어서도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안장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군복을 벗어 대쪽 같은 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채명신 소위는 문상길 중위의 직속 부하였지만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박진경 대령을 높이 평가하며 토벌대 소대장으로 활약했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보면, 그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4·3 사건 초기,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 많은 주민이 입산했다.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이 하산하는 데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평북 곡산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꿈이 목사였다. 해방 이후 소련군이 북에 내려온 이후 공산당에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서울로 월남했다. 신앙의자유를 지키고 공산당의 위협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군에 입대했다.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4·3 사건 당시 9연대 소대장을 지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이미지

그런 그가 보는 4·3 사건은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시각과 달랐다. 그는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에서 "남로당의 인민해방군은 주민들의 배타성을 이용,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그는 중립적인 위치를 자처한 김익렬 중령을 "색깔이 불분명하고 미온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문상길 중위는 "좌익 사상에 물들어 김달삼 지령에 따라 연대장을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진경 대령은 뛰어난 토벌 작전을 펼친 우수한 군인으로 치켜세우고, 무장대 진압에 앞장선 서북청년단원들도 용맹스럽다며 높이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은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에서 그 진상이 밝혀졌다. 군경과 우익 단체들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으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채명신은 보고서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는 우익적 시각에서 기술한 <제주 4·3 사건의 진상>(이선교, 현대사포럼)이라는 책 추천사에 "정부에서는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을 통과해 사건 진상 조사를 하도록 하였는데, 이 보고서가 황당하게 서술됐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찾아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였는데 폭도까지 희생자로 결정한 것은 크게 잘못됐다"고 썼다. 몇몇 우익 인사와 함께 4·3특별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였던 그는 여러 교회에 간증 집회를 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했다. 2002년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그는 하나님께서 4·3 사건, 한국전쟁, 베트남전 등 허다한 죽음의 위협에서 생명을 보존해 주었다며 한반도 평화 유지와 공산주의 체제 방지를 위해 신명을 바쳐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상길 중위와 채명신 소위. 두 사람은 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역사의 터널을 지나며 보인 행동은 달랐다. 문 중위는 신앙을 근거로 양민 탄압을 막기 위해 암살에 나선 반면, 채 소위는 신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진압 작전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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