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뉴스앤조이-김은석 콘텐츠팀장] 정부가 4월 3일을 국가 지정 4‧3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한 2014년 3월, 제주 지역 유일한 교계 신문에 기고문이 실린다. "4‧3을 추념일로 지정하면 남로당 무장대의 폭동을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된다"며 추념일 지정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기고문을 쓴 사람은 제주도에서 교세가 가장 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제주노회장이었다. 예장통합 교회에서 각각 신앙생활을 해 온 송창권 장로(성지교회)와 오승학 집사(성안교회)는 이 일을 계기로 작은 평신도 모임을 결성한다.

두 사람이 볼 때 4‧3 국가 추념일 지정을 두고 제주 교계 지도자가 보여 준 모습은, 아픔 속에 있는 제주도민들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해와 상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4·3 사건으로 고통받는 도민을 위로하고 함께하기 위해 평신도들이 나섰다. 사진 제공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

목회자들이 안 하면 평신도들이라도 4‧3 사건으로 고통당한 도민들을 위로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자는 취지에 십여 명이 마음을 모았다. 단체 이름을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으로 짓고 그해 4‧3 추모 예배를 시작으로 4‧3 역사 순례, 평화 음악회, 4‧3길 걷기 등 매해 4월 3일을 전후로 뜻있는 행사를 이어 가고 있다.

현재 회원 수가 30명 정도인 작은 평신도 단체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를 제외하면 제주 교계에서 4‧3과 관련해 꾸준히 활동하는 '유일한' 단체다. 올해는 제주사랑선교회(황호민 회장)와 함께 국내 4‧3 연구 권위자 중 한 명인 박명림 교수(연세대)를 초청해 강연회를 연다.

각각 대표와 간사로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을 섬기고 있는 송창권 장로(성지교회)와 오승학 집사(성안교회)를 2월 1일 제주도에서 만났다. 제주도민이자 신앙인으로 오랜 세월 제주 교회 안에 몸담아 온 두 사람에게 4‧3 사건은 어떤 의미인지, 제주 교계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항일 운동한 외할아버지, 일본으로 도피
외가 식구들,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총살

오승학 집사(성안교회)는 4·3 사건 희생자 가족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두 분은 4‧3을 어떻게 알게 됐나.

오승학 / 어머니가 7살 때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항일운동을 하셨다. 지역(서귀포시 안덕면)에서 납세 거부 운동을 이끌다 일본 경찰에게 고초를 당했고, 중국 다롄으로 피신했을 때 어머니를 낳으셨다. 해방 후 제주로 돌아와 마을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고 1947년 3‧1절 기념 대회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4‧3 사건 발발 전 외할아버지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피하셨다. 그러나 토벌대는 외할아버지가 입산해 무장대에 합류한 것으로 본 것 같다. 온 가족을 도피자 가족 수용소에 가두었다. 외증조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고모할머니, 이모 등이 고문과 취조 속에 고통받다가 총살당한다. 살아남은 가족은 연로한 외증조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살배기 이모뿐이었다. 젖먹이였던 이모는 먹을 게 없어 곧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다시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7살이었던 어머니는 그때부터 외증조할머니와 인근 밭을 일구며 힘겨운 삶을 이어 가셨다. 외증조할머니가 4‧3 사건 이후 급격이 눈이 어두워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도 가장이다시피 생계를 이어 왔다. 평생 손에 흙만 묻히며 숨죽인 채 사셨다. 관에서 하라는 일이 있으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시고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사셨다. 십여 년 전 호텔 청소 일을 하시다가 허리를 다쳤을 때는 산업재해 보상을 받자는 내 권유를 한사코 마다하실 정도였다.

이런 가족사가 있지만 어렸을 적에는 별 문제의식을 못 느꼈다. 동네에서 너도나도 그런 얘기를 하니 다 그런 줄 알았던 거다. 사람들이 4‧3의 진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말하기 시작한 1980년대에도 대학에서 선교 단체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고 성경 공부에 몰두하느라 4‧3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1990년대 후반에 <4‧3은 말한다>(전예원)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4‧3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외가 식구들이 학살당한 이야기가 책 5권에 등장한다.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어머니는 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았다. 1999년 제주로 발령을 받은 뒤 2002년부터 유족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송창권 / 4‧3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때는 대학 시절이다. 어렸을 때는 폭도들이 수많은 양민을 죽인 사건으로 알고 자랐다. 대학에 들어가 '제주도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1988년에 '4‧3 재조명'이라는 세미나를 열었다. 원래 발표하려던 후배가 못 하겠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4‧3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 부담스러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4‧3에 눈뜨고,
도민 간 갈등의 골 깨달아

4년 전,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을 만든 송창권 장로. 뉴스앤조이 박요셉

송창권 / 후배 대신 발표를 하게 돼, 준비를 하면서 4‧3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게 되었다. <순이 삼촌>(창비) 등을 읽으며 공부하고 현장 답사를 다니며 4‧3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양민들이 수난당한 역사일 수도, 남한 단독정부, 단독선거와 미군정을 반대하는 운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시 중앙성당에서 세미나가 열렸는데 생각보다 도민들이 많이 참석했다. 발표 말미에 "4‧3에 민중 항쟁적 요소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중 한쪽에서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네가 그때 살아 봤어?"라고 고함을 치더라. 그런데 그 옆에 앉은 또 다른 사람이 일어서더니 (앞에 고함을 친 사람에게) "너희들이 우리 가족을 죽였지?" 하면서 싸움이 났다.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4‧3 사건으로 제주도민 사이에 골이 이렇게 깊이 파였구나' 깨달았다.

-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송창권 / 정부가 2014년에 4월 3일을 국가 추념일로 지정했을 때, 우리 노회 노회장님이 <제주기독신문>에 기고를 했다. 4‧3 국가 추념일 지정을 반대하는 글이었는데 내가 볼 때는 참 편협한 시각으로 쓴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페이스북에서 그분과 논쟁을 했는데 예의에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 길게 진행하지 않았다. 그분도 나름의 관점을 가질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교계 지도자라면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발언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제주 교회 전체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님을 도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지만 평신도들이 조용하게 작은 몸부림을 하는 것으로 보시면 될 것 같다.

오승학 / 당시 제주 기독교 보수 진영에서 추념일 지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행정안전부에 팩스로 항의 문서를 보내기도 하고, '폭도 기념일'을 만드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제주도민들이 핍박당한 현실을 함께하지 못하고 이념적으로 재단해 버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10여 명이 뜻을 모아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30명 정도가 소속감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먼저 손 내밀어야 할 교회가
되레 손 뿌리치는 것 같아

평화공원을 찾은 교인들. 사진 제공 치유와평화를기원하는그리스도인모임

- 오 집사님은 유족회 청년회장도 역임했다. 유족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오승학 / 기존에 일부 목회자들이 4‧3을 왜곡‧폄훼하는 발언을 많이 해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해 왔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전체 기독교가 다 그런 것처럼 인식될까 봐 안타까웠다. 하지만 열심히 4‧3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위해 활동하시는 분들도 일부 있어서 부정적인 시각이 감해지기도 한다. 기독교도 보수와 진보로 갈려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송창권 / 우리가 추모 예배를 했을 때 유족들을 초청했다. 유족회장님도 오셨는데 너무 고맙다고 하더라. 우리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님에도 이런 움직임을 보여 줘서 굉장히 고맙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교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회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내미는 손을 뿌리치는 건 아닌가 싶다. 아니, 국가가 정한 희생자 추념일을 거부하려는 모습이 도민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였겠나. 그러면서 어떻게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추념식에 각 종교 대표자들이 종교 의례를 맡는 것으로 안다. 교계에서 많이 참석하는지.

오승학 / 평균 제주도민 1만 명이 추념식에 참석한다. 기독교인, 특히 목회자분들은 많이 참석하지 않는 것 같다. 제주기독교단협의회 회장을 맡은 목사님이 참석해 종교 의례에서 기도를 맡는다. 다른 종교에 비해 시간도 짧다. 그런데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독교를 통해서도 희생자 유족이 해원할 수 있음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위령제나 추념식 등에서 해원하는 행위가 제주의 토속적인 무속 신앙 등에 치우친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그런 방식도 다양화할 수 있다고 본다. 진정한 해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와 치유의 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송창권 / 4‧3평화공원에 가서 그런 식의 추념 행위를 왜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만드는 데 동의하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에 안 가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에서 전 도민과 함께하는 행사 아닌가. 함께 참여해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들, 아직 상처 속에 있는 분들을 위로하는 문화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고난주간, 제주의 아픔 4‧3 제쳐 두고
부활 얘기하면 도민들이 받아들이겠나

- 제주 교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송창권 / 노회에서 4‧3 관련 위원회라도 만들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송 장로는 지나치게 앞서간다"며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안타깝다. 4‧3은 제주도 역사의 가장 큰 아픔이다. 홀로코스트 정도의 대참사였다. 교회가 다가갈 선교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놔두고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나.

4월 3일이 고난주간과 겹칠 때가 많다. 고통을 전제하지 않은 부활이 있을까? 제주 교회는 고통에 함께하고자 하는 모습이 없는 것 같다. 가장 큰 아픔인 4‧3을 제쳐 두고 부활만 이야기하면 제주도민들이 받아들이겠는가. 아픔과 상처가 있는 곳에 먼저 다가가는 게 하나님의 뜻 아닌가. 왜 교회가 4‧3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어떻게 사랑을 말하고 치유를 말할 수 있을까.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제주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화평케 하라고 했는데 한쪽 편에서 이념 공방하고 화평케 하지 못한 점을 회개하면 좋겠다.

오승학 /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온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정성껏 돌봤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라고 하시지 않았나. 수많은 4‧3 희생자들은 강도 만난 이웃이다.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지고 고통받고 상처 입은 제주도민에게 다가가서 함께할 믿음과 아량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교회에서 목회자·지도자들이 계급의식을 버리고 평신도들과 만나 자유롭게 나누면 좋겠다. 또 연로한 4‧3 희생자와 유족들을 물질적·정신적으로 돕고 기도하며 4‧3의 아픔을 공유하고 치유하는 일에 힘쓰면 좋겠다. 그럴 때 제주인을 대상으로 선교의 영역도 넓혀질 것이다. 올해 열리는 EXPLO 2018 제주 선교 대회에도 동참하고 싶다.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 바로 가기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 후원 바로 가기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