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0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의 '70년만의 귀향, 70년의 기억' 현장에서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이어진 가족 학살로 고아가 되어, 성도 바뀐 채 한 많은 생을 살다가 작년 제주도를 찾았던 이상문 씨(77)가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부친 위패 옆에 살아 있는 자기 위패를 발견하였다는 절규에,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그날이 고난주간 성금요일이었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 53:5)." 진상이 규명되어 희생자 3만여 명의 억울함이 풀려야, 제주 4·3은 역사적으로 부활하여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역사를 열어 갈 것입니다.

모처럼 방문한 제주는 유채꽃과 벚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화사한 봄에 자행한 집단학살은 얼마나 참혹하였을까!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파가 득세하고 미군정의 실정으로 살기가 힘들어지자 제대로 된 나라를 열망하여 3만여 명이 참가한 1947년 제주 3·1 기념 대회에서 한 경찰관의 발포와 탄압이 벌어졌고, 이는 도청직원과 경찰관 등 4만여 명이 참여한 3·10 총파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미군정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강경 진압을 택했던 까닭에 제주도민 대다수가 심정적으로 지지한 4·3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00여 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우익 인사들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평화 협상은 조작된 방화 사건을 빌미로 깨지고 5·10 선거가 무산되자, 단독정부 수립 후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반인륜적 초토화 작전이 감행되었고, 무장대도 고립과 식량난에 폭도로 변하여 4·3 희생자 대부분이 이 기간에 희생당했습니다. 계급 갈등이 적고 공동체성이 강한 제주도인데도 막 구축되기 시작한 미소 냉전 체제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유족들이 당한 국가 폭력의 집단적인 사회 역사적 트라우마는 진상 규명은커녕 연좌제·모독·감시 등의 2차 피해로 더 심화되었습니다.

왜 '제주 4·3'이라고만 할까. 이 의문이 4·3평화공원에 가서 풀렸습니다. 전시실의 '백비'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사망자 중 약 80%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집단적으로 희생되었는데도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의미 규정을 하지 못하고 제주 4·3이라고만 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4·3에 진 빚이 큽니다. 가해자 중 가장 잔혹했던 서북청년회에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청년회가 관여했던 까닭입니다. 친일 청산과 토지개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월남한 서북 출신 청년들은 적개심과 반공 의식으로 무장하여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에 이용되어 지하공작과 좌익 척결에 동원되었습니다. 급료도 없이 제주도에 보내져 이들은 '악의 그림자'로 불릴 정도로 약탈과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광기의 시대에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 화해자로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모슬포교회의 조남수 목사였습니다. 모슬포교회는 1909년 이기풍 목사가 설립하였는데 진개동산에 우뚝 선 교회답게 항일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 2대 담임 윤식명 목사는 독립 군자금을 모금하다 10월 징역형을 받았고, 1920년에는 제주 최초의 남녀공학 광선의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감당하였습니다.

4·3의 광풍은 모슬포교회에도 몰아쳐 무장대에 의해 허성재 장로 등 4인이 살해되었고 조남수 목사도 가까스로 화를 면했습니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자 조남수 목사는 용기를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제주도민이 다 죽겠어요.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겁니까?" 조남수 목사가 서귀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에게 한 말입니다. "자수했다가 만약 무슨 변을 당한다면 나는 여러분 앞에서 자결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가 주민 5000~6000명 앞에서 자수를 권유하며 한 말이라고 합니다. 150회나 강연하여 약 3000명이 자수해 살아남았고, 즉결 처형을 앞둔 20명을 살려 내기도 하였습니다.

모슬포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손재운 담임목사의 안내로 들어간 교회 역사관에는 귀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첫 당회록, 윤식명 목사 이력서 등이 있었는데 1953년 6월 10일 자로 나온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출범 선언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장 총회는 2007년 모슬포교회를 제5호 유적 교회로 지정하였습니다. 모슬포교회는 나누고 섬긴 교회답게 지역사회 선교에 열심이고 마당에는 잘 지은 종합 사회 복지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진개동산에 가서 조남수 목사와 문형순 서장의 공덕비를 보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묻힌 대정읍 충혼묘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동안 대다수 제주 교회들은 4·3에 침묵했는데 올해는 달랐습니다. 3월 30일,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 주최로 '치유와 회복을 위한 4·3 70주년 연합 예배'를 드렸고, 2일에는 제주사랑선교회 주관으로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 초청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교회가 화해자로서 4·3 치유와 화해의 역사를 열려면 우선 신학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진상 규명에 힘을 싣고, 정의로운 민주 사회를 추구하고 동북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데 나설 때, 화해자로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고, 정의로운 일에 용기를 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키울 때, 4·3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1959년에 건립한 옛 모슬포교회 예배당은 소박하고 아름답습니다. 여기서는 한라산이 보이지 않지만 제주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는 까닭에 하늘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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