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았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뉴스앤조이-김은석 콘텐츠팀장] 1988년 석사 학위 논문 '제주도 4·3 민중 항쟁에 관한 연구'로 국가가 폭동이란 이름으로 덧씌운 제주 4·3 사건에 학문적으로는 최초로 "민중 항쟁"의 시각을 제시한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는 이후 4·3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학자가 된다. 4·3을 다룬 수많은 학술 발표와 토론의 자리에 서게 됐고, 논문은 다수의 주요 4·3 연구에 참고·인용되었다.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연구소 연구원 시절에는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의 요체였던 4·3진상조사기획단 해외 전문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이제 그는 일부 4·3 피해 마을 내부 그리고 4·3유족회와 경우회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화해와 상생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한쪽에서 여전히 4·3 사건에 이념적 시각을 덧칠하고 있을 때, 남남 갈등, 남북 분단, 세계 분쟁 극복의 모델로서 지닌 가능성을 제주와 4·3에서 건져 올리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학자다. "사회적 영성"이란 말로 공공성을 상실한 한국 사회와 교회에 경종을 올리는가 하면, 세월호 침몰 당시 팽목항 현장의 애끊는 소리를 전달하며 "이게 과연 나라인가" 일갈하기도 했다. 제주 4·3에 대해 그가 던지는 화두의 종착지는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아간다. "제주에서 세계로." 세계는 제주에 이념 대결과 학살, 희생과 트라우마를 주었지만, 제주는 세계에 화해와 치유와 상생과 평화의 모델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한편 그것이 "값싼 화해"여서는 안 된다고도 경계한다. 강요된 화해, 밖으로부터의 화해가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화해, 정의와 함께하는 화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녕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

박명림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는 최근 제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해와 상생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갈 길이 멀지만 계속해서 4·3 피해자들과 함께 "정의 있는 화해"를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유영

박 교수는 이 화해의 기운이 지속되기 위해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는 제주도민뿐 아니라 해방 후 고향에서 쫓겨난 월남 기독교 세력 역시 세계 이념 대결 시대의 최대 피해자들임을 인정한다. 당시 그들이 내면화한 반공주의를 마냥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념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를 참회와 평화로 함께 채우자고 호소한다. 70년 전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난 두 시대의 피해자가 이루는 화해, 4·3과 함께 30년을 걸어온 어느 지식인의 기도 제목이다. 

- 앞서 당시의 표현으로 "민중 항쟁"이 4·3의 이름으로 적절했다고 본다고 하셨다. 3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 표현이 적절할까. 4·3평화기념관에 놓인 백비가 대변하듯 4·3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들 한다. 반면 4·3의 완전 해결을 위해서는 정명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명, 즉 역사가 바른 이름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편이 아니다. 진리는 자기 실천의 겸손한 영역이지 도덕적 관념의 선택 차원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충돌 지점이 있다. 갈등에는 여러 복합적인 당사자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명확한 정명을 가질 때 그 이름이 포괄하지 못하는 쪽을 배제할 수가 있다. 정명 사관은 유교의 도덕주의로부터 나온, 선악, 호오, 흑백을 너무 명백히 가르려는 사관이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관이다. 위압과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 행위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주도하는 국가 사관이나 국정교과서 집필 역시 정명 사관의 연장이다. 그러나 나치로부터 망명한 유태인 학자 한나 아렌트가 깊이 고뇌하였듯 그런 역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포용이나 화해, 인간 공동체의 재건이 아니다.

하나만 예를 들겠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혁명에 대해 아직도 반란, 폭동, 내전이란 표현을 혼용한다. 역사적 사회 언어로는 다 같은 의미다. 폭동이나 반란은 왕의 불의한 통치에 저항한 것을 지칭하고, 내전은 왕당파와 의회파 혹은 국가권력과 민중 세력, 좌파와 우파,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두 세력의 무력 충돌을 말한다. 혁명도 기존 권력을 전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도 영국 반란, 영국 내전, 영국혁명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연 질서를 바꾼다는 의미였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뀔 때 쓴 자연과학의 용어였다. 모두가 하늘이 도는 줄 알았는데 지구가 돈다고 하니,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질서를 바꾸는 것, 즉 혁명이었다. 만들어진 방향대로 도는 것(volt)이 아니라 거꾸로 돈다(revolt)는 뜻에서 혁명이 된 거다. 이 말을 인간과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 처음 사용한 게 프랑스혁명 때다. 200년이 넘은 지금도 프랑스혁명을 '혁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3·1절도 시위, 운동, 혁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4·19 역시 학생 시위, 학생운동, 의거, 혁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4·3의 정명은 다음 세대에게 열어 두어야 한다고 본다. 4·3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현상인 세계의 이념 대결, 즉 냉전은 끝났지만, 그것이 한반도화하면서 초래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도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4·3의 원초적인 원인 요소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여러 시각이 경쟁하는 우리 세대에 단일 정명을 결정하는 것은 절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적·시대적 오만일 수도 있다. 우리 세대는 기존 이념적·극우적 접근을 극복하고 피해자를 포용하며 끌어안는 화해 정도까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혀 놓고, 4·3의 정명에 대한 논의는 다음 세대에 열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4·3의 전국화, 보편화, 세계화, 항구화를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4·3을 전국화하고 보편화하는 과정, 세계화하고 항구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후대에서 채워 나갈 영역이 있을 것이다. 많은 분이 백비에 대해 안타까워하신다. 하지만 그동안 일방적으로 반란, 폭동으로 규정한 것에 비하면 이렇게 열어 놓은 것도 적지 않은 성과다. 운동으로서의 4·3, 미래로서의 4·3, 정신으로서의 4·3은 남북 화해와 평화 공존, 통일, 그리고 세계 평화의 과정에서 새롭게 써 나가야 할 영역이기 때문에 백비는 부족함의 표현이 아니라 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4·3평화기념관에 놓인 백비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적혀 있다. 박 교수는 백비는 "부족함의 표현이 아나라 가능의 영역"이라며 4·3에 이름을 짓는 정명 논의는 후대에 열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4·3 백비는 부족함 아닌 가능의 영역
정명 논의, 다음 세대에 열어 놓아야

과거 세대와 우리 세대는 여기까지 만들어 냈지만, 오늘의 세대와 다음 세대는 새롭게 세워 갈 수 있다. 우리는 다음 세대보다 크게 부족하다. 정말 질문 많이 받았다. "폭동, 반란으로 규정되었던 4·3에 대해 처음으로 민중 항쟁이라는 관점을 제기한 당신은 4·3 백비를 채울 정명을 제안할 책임도 있지 않느냐"고 적지 않은 분들이 물으셨다. 그런데 제 실력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의 지혜, 현명함이 아직 남북 대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4·3에 대해 단일한 정명을 가지려는 대신 올바른 성격 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건의 정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건의 성격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당대 혹은 바로 다음 대에 정명을 가지려는 조급함은 유교의 정명 사관에 의한 도덕주의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건 누군 옳고, 누군 그르다는 당대 인간들의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는 영역일 뿐이다.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프랑스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때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가 정말 이루어졌는지 아직도 묻는 것이다. 미래로서의 4·3, 정신으로서의 4·3이 반드시 채워 갈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져야 한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성당과 영국 웨스트민스터사원에 가 보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천동설에 맞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산타크로체성당 한가운데에 안장되어 있다. 창조론에 맞서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묘는 웨스트민스터사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정통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이 죽음 이후 교회에 묻힌 모습을 볼 때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산타크로체성당과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다녀온 많은 크리스천이 헛걸음질한 것 아닌가 싶다. 과거 교회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다윈과 갈릴레이를 껴안는 기독교의 대화해 정신을 보고 와야 한다.

- 서북청년회(서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청의 발단과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서청의 역할, 기독교와 서청의 관계 등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고 느꼈다. 교수님은 서청과 기독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나.

정말로 중요한 물음을 주셨다. 70주년을 맞기까지 4·3에서도 그동안 금기 영역으로 남아 있던 지점이 기독교와 4·3이다. 한국 기독교가 4·3을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는가는 정녕 어려운 문제다. 지난 촛불과 탄핵 국면에서 기독교가 보여 준 모습, 남북 대결과 화해 과정에서 기독교가 보여 준 모습이 있다. 한편에서는 기대하고, 한편에서는 크게 걱정한다.

남북 분단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한국 기독교 세력이다. 당시 서북은 근대화, 서구화, 문명화, 기독교화의 선두 지대였다. 한국 기독교는 그 서북에서 모든 종교적 기반과 삶의 터전을 공산 세력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축출당한 비극의 역사를 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세계적으로도 기독교와 볼셰비즘은 적대적이긴 했지만― 한국 기독교 세력은 공산주의와 출발부터 화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박 교수는 분단 당시 서북에서 모든 종교적 기반과 삶의 터전을 공산 세력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축출당한 한국 기독교 세력도 세계 이념 전쟁의 최대 피해자라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유영

한경직, 김재준, 안병무, 강원용,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함태영, 함석헌 등 한국 기독교를 이끈 중심인물들이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이었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공산 세력에게 받은 탄압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 준다. 모든 터전을 박탈당한, 그것도 가장 복음화가 많이 진전된 서북을 상실한 그들에게 공산주의를 향한 분노와 저항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기독교 세력에게 반공 투쟁은 정의로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미군정, 중앙정부와 기독교의 연계도 그만큼 컸다. 미국은 서구 기독교의 중심 국가 중 하나였다. 아무런 터전도 없이 월남한 기독교 세력이 미군정과 연결되면서 일부는 교회의 터전을 제공받고, 일부는 물질을 제공받기도 했다. 또한 미국 기독교의 선교 활동과 연결된 지원을 많이 받으면서 급속하게 권력과 밀착되고 성장하게 됐다.

'빨갱이 섬' 선입관 가지고 제주로 간 서청,
지도자급 인사, 십자군 전쟁 수행한 듯 설명
기독교, 서청 문제 정면으로 드러내야

서청이 한경직 목사를 포함한 일부 기독교, 일부 우익 단체와 연결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북한에서의 박탈, 상실, 추방을 경험한 청년들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내려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부안이나 제주 등 이들이 파견된 곳들은 저항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들은 제주가 공산 세력의 소굴이며 빨갱이 섬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들어갔다. 1980년대에 서청 지도자급에 있던 분과 인터뷰를 했다. 제주에서의 진압을 마치 십자군 전쟁을 수행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을 듣고 이들이 얼마나 큰 오해를 가지고 제주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군경은 현지인이 많았고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4·3 초기 폭력 행사를 자제했다. 그런데 서청은 훈련되지 않은 날것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물질 약탈, 신체적 폭행 등. 그러니까 어떤 마을 사람들은 "토벌대 온다"는 말보다 "서청 온다"는 말을 더 두려워했다고 증언한다.

그들이 제주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런 폭력을 휘두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때 월남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 번만 생각을 더 해 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깊은 안타까움과 비판 의식이 저에게도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기독교와 서청. 이들의 관계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이 더 정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서청의 적지 않은 구성원이 북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이고, 기독교계와 정계의 지도자들이 넓은 의미에서 서청의 후원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기독교가 정면으로 이 문제를 인식하고 드러내며,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 응당 제주도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류 역사에서 주변의 주변에 대한 탄압은 오래도록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주변이 중심이 되려고 할 때 드러나는 인간의 폭력성은 더욱 끔찍하다. 자유를 찾아 떠난 미국 청교도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특별히 억압받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끔찍하게 학살한 것을 떠올린다. 누천년 망명을 하다 귀환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아랍과 팔레스타인인들에 행한 가공할 폭력도 같은 현상이다.

1980년대에 박 교수가 만나 인터뷰한 서청 지도자급 인사는 제주 진압을 십자군 전쟁을 수행한 듯 설명했다고 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 기독교 반공주의에 앞장섰던 분들은 생애 말에 대북 지원 사업에 열심을 냈지만, 반공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들이 심어 놓은 기독교 반공주의의 씨앗이 자라 오늘날 우리 사회 극우 세력의 선봉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한국 개신교인들이 4·3 문제에서도 눈과 귀를 닫는 것 같다.

월남한 서북 청년들이 제주에서 가한 폭력 역시 추방된 주변인들이 변방 주변인들에게 가한, 주변의 주변에 대한 폭력이었다. 따라서 한국 보수 기독교의 회개와 제주 포용은 제주와의 관계 회복을 넘어 지금 그리고 미래의 남북 화해와 통일 과정에서 그들이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면할 것인가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낮은 자들, 눈물 흘리는 자들이 머무는 "성문 밖", "영문 밖"에 머무르려 한 예수의 실천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다.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월남 기독교인들이 중심 세력이었던 한국 기독교가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조국을 박탈당한 한국인들이 이국에서 반일·독립 사상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다.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인 것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삶의 모든 근거를 박탈당하고 고향에서 추방된 분들에게 처음부터 "너는 왜 반공주의를 가졌냐"고 하며 비난하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다. 그들에게 반공주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월남한 분들 중 적지 않은 이가 친일파로 오인받은 걸 가장 억울해했다. 물론 일부는 친일파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을 댄 분들, 만주와 연계되어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독립된 후 자기 강토에서 추방당했을 때 느꼈을 분노와 반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치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 20세기 후반에 평화를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 고향을 상실한 망명자들, 방랑자들, 추방자들을 포용해 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자세다. 환대의 자세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보수가 탈북자들에게 포용적인 반면, 한국의 진보가 탈북자들에게 비판적인 것은 문제다. 늘 민족과 통일을 말하는 그들이 과연 진보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4·3이 화해의 표본으로 나아가고, 아래로부터의 용서, 화해, 상생의 기운을 지속하기 위해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마지막 남은 영역이 기독교다. 국가도 4·3에 대해 사과했다. 기독교는 사랑과 화해, 용서와 상생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종교 아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기독교 보수 세력이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그치지 말고 4·3의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전국화하고 보편화하는 데 앞장서 주면 좋겠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에 갈 때면 늘 안타까웠다. 왜 어떤 태극기 집회는 찬송가로 시작하고 찬송가로 끝나는지, 한국교회가 이래도 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게 보수를 지지하는 것이어야 하나. 국민들과 입법부와 사법부에 의해 탄핵을 당할 만큼 헌법을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한 세력을 지지하는 게 과연 바른 보수일까. 불의한 세력에 맞서는 또 다른 불의는 옳다고 보는 건가? 그런 흑백논리를 벗어나는 게 진정한 공의이며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아파하는 자와 소통해야
비극의 섬 제주, 매도·외면 말고 회개·사과하길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4·3에 대해 물을 때 예화를 두 가지 든다.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다. 어떤 신앙을 가졌는가, 어떤 율법을 믿는가, 어떤 지위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아파하는 자, 눈물 흘리는 자, 사망에 이르는 자를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더군다나 우리는 신앙인인데, 4·3 때 돌아가신 분들을 그렇게 매도하면 되느냐고 물으면 조금 달라지신다. 또 하나는 잠언 24장 11절-12절이다. 4·3을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묵상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4·3평화공원에 있는 위패봉안실에서 참배하는 제주도민들. 박 교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파하는 자와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죽음으로 끌려간 4‧3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 비극의 섬 제주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주4·3평화재단 자료집 <어둠에서 빛으로> 갈무리

4‧3 희생자들은 죽음으로 끌려간 자들이었고 유족들은 그 자녀들이다. 그 섬 자체가 비극의 섬이다. 우리가 아무리 알지 못했다고, 보지 못했다고 외면하려 할지라도 위에서 다 보고 들으시며 통찰하시지 않나.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파하는 자와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위로하는 것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 차원에서 회개와 용서, 화해와 상생에 동참하고 이를 확산시키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나도 처음에 인터뷰 요청을 받고 응낙하지 못하다가, 4·3 7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진정한 회개가 이뤄져야 한다는 <뉴스앤조이> 기사를 읽고 회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늦었지만 한국 기독교가 제주를 방문하고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나아가 주류 교회와 보수 기독교인들이 당시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와 용서,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제주도민들이 굉장히 미쁘게 받아 주지 않을까 싶다.

- 교수님은 4·3 희생자들이 보여 준 화해와 포용의 움직임에 큰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같다. 지난 2월 천주교주교회의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신 내용 중 "세계는 제주에게 갈등과 학살을 주었지만, 제주는 세계에 화해와 평화를 주자", "폭력이 힘이 아니라 용서가 힘이다. 적대가 힘이 아니라 관용이 힘이다. 오늘의 제주는 그 분명한 증거다"라고 하신 부분이 인상 깊었다. 4·3 희생자들의 이런 모습은 반공 신앙을 웅변하며 폭력과 적대의 편에 서 온 한국 보수 개신교, 침묵·외면해 온 한국 개신교 전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4·3을 연구하며 화해와 상생을 말할 때 조심스러웠다. 50주년을 맞은 1998년 4·3 50주년 학술회의 자리였다. 결론부에서 화해와 상생을 처음으로 말하려는데 쉬이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피해자가 먼저 말하지 않는 화해를 제3자가 말하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상처를 덧나게 할 수 있다. 

나치에 저항한 본회퍼가 비판한 "값싼 은총"과 마찬가지로, 현대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미로슬라브 볼프가 비판하는 "값싼 화해"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저 역시 본회퍼와 볼프의 중요한 견해를 받아들여 "값싼 용서"와 "값싼 화해"를 비판해 왔다. 관용과 화해는 값싼 것이 전혀 아니며 밖으로부터 강요될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귀하고 고결한 화해, 즉 정의가 있는 화해, 정의와 함께하는 화해다. 정의는 하나님의 공의로 세워지는 실천, 즉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정의와 함께하는 화해를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진실을 드러내고 명예를 회복하며, 사과를 촉구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 내야 한다. 필요하고, 또 가능할 때는 도덕적‧정치적‧법적 책임을 엄정하게 추궁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정의 없는 화해, 밖과 위로부터 강요된 화해,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화해는, 20세기의 주목할 만한 학자이자 언론인·정치인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말하는 "거짓 화해"라고 비판해 왔다. 즉 "값싼 화해"도 "거짓 화해"도 안 된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가 없다면 우리는 '피해' 이후에도 온 삶을 '피해(자)'가 지배하는 '2차 피해', '항구 피해'에 묶여 있게 된다. 가장 큰 불행이다. 나와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파괴한 그 악의 사슬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거짓 화해'와 '항구 피해'를 모두 넘어서야 한다. 즉 정의와 화해의 결합을 통한 치유와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제 식으로 표현하면 '개인적 치유'와 '사회적 치유'가 결합된 '통합적 치유'다. 4·3에 관한 한 내가 부족한 대로 늘 제주 분들, 피해자들과 함께 '정의 있는 화해'를 추구해 온 것도 이런 연유였다. 앞으로도 그분들과 함께 계속 이 길을 갈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 정녕 갈 길이 멀다. 

제주 하귀리 영모원 위령단 전경. 애국 절사 영현비, 호국 영령 충의비, 4·3 희생자 위령비를 한곳에 건립하였다. 제주4·3아카이브 갈무리
영모원 4·3 희생자 위령비 비문. 박 교수는 하귀리 주민들이 보여 준 아래로부터의 화해, 주체적·자발적 화해의 모습은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사례라고 평가한다. 제주4·3아카이브 갈무리

제주에서 일어나는 화해의 움직임은 바로 안으로부터의 화해이고, 밑으로부터의 화해이기 때문에 정녕 귀하고 고결하며 소중하다.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나온 화해인 것이다. 즉 "값싼 화해"가 아니다. "거짓 화해"도 아니다. 나는 제주 하귀리의 사례를 굉장히 자주 강조한다. 국제 학술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보고했다. 화해가 밑으로부터, 작은 마을에서부터 주민들 스스로 일어났다. 특별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3까지 순국, 호국, 희생을 전부 한 추모 공간에 묶어 냈다. 아래로부터의 화해, 주체적·자발적 화해의 경이로운 경지를 보여 준, 세계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다. 그래서 하귀리 이후 이어진 상가리, 장전리, 유족회-경우회 등의 화해 사례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북촌과 표선을 주목하여 탐구하고 있다.

솔직히 <뉴스앤조이>가 내건 '반공주의 넘어 평화 신앙으로'란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제 반공주의를 내려놓고 그 빈자리를 참회와 평화로 채울 때이다. 나는 마음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때 '가난하다'는 말은 '비어 있다'는 말이고, '복'이라는 말은 '피', 즉 '생명'이라는 뜻과 같다. 마음을 비워야 그 비운 곳에 피·생명을 불어넣어 주시어 되살아난다. 그게 복이다. 마음이 물질로 가득 차 있고, 반공주의, 극우주의로 차 있으면 채워 주실 수가 없다. 그걸 비워 가난해져야 진리와 영성, 말씀과 섭리가 들어온다. 그게 바로 복이다.

평화라는 말은 정확히 연대라는 말에서 나왔다. 하나님과 연대하면 그만큼 진리 안에 들어가니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지금껏 갖고 있던 이념들, 반공주의든, 국가주의든, 보수주의든, 급진주의든 내 신념과 내 가치를 비워야 그것을 비운 만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함께하는 마음이 채워진다. 그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들과 연대하면 나도 평화로워진다. 내가 내려놓은 만큼 그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고 나도 다가갈 수 있게 된다. 한국 기독교가 이번에 4·3에 관한 한 내려놓기 운동, 비우기 운동을 하면 좋겠다.

박 교수는 제주에서 이어지고 있는 용서와 화해와 상생의 기운을 지속하기 위해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마지막 영역이 기독교라고 말했다. 그는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보수 기독교가 제주와 4·3을 끌어안으면 한반도 전체에 화해의 기운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뉴스앤조이 유영

성서와 정치학을 공부할 때 리더십에 대해서 조금 깊이 탐구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리드', '리더', '리더십'라는 말에 "이끌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알았다. 전혀 그게 아니었다. '리드'라는 말은 "함께 가게 하다", '리더'는 "함께 가게 하는 자", '리더십'은 "함께 가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더욱더 많은 사람을 함께 가게 하려면 낮은 자, 눈물 흘리는 자, 아파하는 자처럼 함께 낮아져야 한다. 내려가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이렇게 살아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가장 낮아졌기 때문이다. 말구유로부터 십자가까지, 즉 맨 아래에서 맨 아래까지였기 때문에 모두와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의 리더가 된 것 아니겠나.

1948년 한반도에서 땅끝에 있었던 사람들은 제주도민들과 북한에서 쫓겨난 추방자들이었다. 아니 한반도 전체가 땅끝이었다. 고향을 잃고 갈 데 없던 서청이 세계 이념 전쟁의 폭력성을 받아들여서 또 다른 갈 데 없는 사람들, 중산간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던 제주도민들의 고향을 빼앗는 데 동참했다. 둘은 서로에게는 가해자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둘 다 시대의 피해자다. 이 둘이 화해한다면, 즉 한국 기독교 보수의 본류가 4·3과 제주를 끌어안는다면 한반도 전체에 화해의 기운이 상승하는 데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땅끝과 땅끝이 다시 만나야 한다. 4·3 70주년 새벽에 드리는 저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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