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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②] 1948년 제주, 반공 청년들의 광기
4·3 토벌대로 파견, 무소불위 권력으로 민간인 학살
  • 박요셉 기자 (josef@newsnjoy.or.kr)
  • 승인 2018.04.26 10:23

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발족해 1948년 12월 해산했다. 활동 기간이 2년 1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해방정국 당시 우익 청년 단체 수는 40여 개. 청년 단체 수십 곳 중 하나였던 서청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청은 한국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월남 세력이 조직한 서청 대다수가 공산당 탄압을 피하기 위해 내려온 기독교인이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교회들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증언·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과거 서청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신 사죄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뉴스앤조이>는 연중 기획 '4·3과 그리스도인'의 일환으로 서청과 한국 개신교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①서청이 어떤 이들로 구성됐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②4·3 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③서북 기독교 민족주의를 계승했다는 서청이 당시 한국교회와 어떤 관계였는지 ④반공주의가 낳은 서청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돌아보려 한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제주읍 삼양 지역 출신 도민 중에는 '정용철'을 모르는 이가 없다. 제주경찰서 삼양지서에서 주임으로 지낸 정용철은 경찰이 되기 전 서북청년회(서청)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 말, 휘하에 있던 서청 단원 50여 명을 이끌고 제주에 내려와 경위로 특채됐다. 그는 "하루에 한 명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뇔 정도로 잔인무도한 인물이었다. 삼양지서에서 근무했던 김제진(제주경찰 10기)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정용철 주임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다 봤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여자들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혀 놓았습니다. 난 벌벌 떠는 그들이 불쌍해 코트를 벗어 덮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 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40년 가까이 4·3 사건 진상을 취재해 온 제주 지역 기자들이 쓴 <4·3은 말한다>(전예원)에도 정용철이 저지른 악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익 단체 대한청년단에서 분대장으로 지낸 고봉수는 정기 보고를 하러 갔다가, 정용철이 1949년 2월 한 임산부 몸에 불에 달군 총구를 찔러 넣고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인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정용철과 함께 제주에 내려온 서청 단원 김시훈 역시 "(정 주임이) 성격이 좀 이상해서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당장 총을 끄집어내 쏘려고 했다. 당시 경찰관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파리 새끼 죽이는 것처럼 간단했다"고 말했다. 제주 4·3 사건 참상을 알린 영화 '지슬: 끝나지 않는 세월2'에는 마을 주민을 학살하는 약물 중독자 '김 상사'가 등장한다. 이는 정용철을 극화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에는 '정용철'이 한 명이 아니었다. 무장대를 진압하겠다며 제주에 파견 온 서청은 도내 곳곳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 경무부장, 미군정의 비호 아래 군경이 되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공산당을 피해 월남한 피난민들이 조직한 반공 단체 서청이 무엇 때문에 바다 건너 제주까지 내려와 이 같은 참극을 벌인 걸까.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 3·1절 사건
우익 인사, 신임 제주도지사로 발령 
서북청년회 제주도단부 탄생
1947년 말, 제주는 '서청판'

3·10 민·관 총파업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한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서청이 제주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건 1947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제주는 '3·1절 발포' 사건 이후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열린 3·1절 기념 대회에서는 기마경관이 타고 있던 말이 어린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민들은 경찰에 항의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이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며 강경 진압했다. 이 일로 국민학생,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을 포함해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열흘 뒤인 3월 10일, 제주에는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관공서뿐 아니라, 공장·회사·학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이 파업은 3·1 발포 사건과 경찰의 대응에 항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에 맞서 경찰과 서청 등을 제주도에 대거 내려보냈다. 제주 사회는 이때부터 미군정과 도민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는 3·1절 발포 사건이 "4·3 사건으로 가는 도화선이 됐다"고 진단했다.

한 달 후 1947년 4월 10일, 유해진 제2대 신임 제주도지사가 제주항에 발을 내렸다. 초대 박경훈 도지사는 3·1 발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상태였다. 유해진 도지사는 우익 단체 간부 출신으로 반공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호원으로 청년 7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모두 서청 단원들이었다. 서청이 최초로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11월, 서청 제주도단부(장동춘 단장)가 결성됐다. 4·3 발발 직전까지 제주도에서 활동한 서청 규모는 500~700명으로 추산된다(4·3위원회 공식 자료). 1948년 4월 3일 도민들의 무장봉기 직후, 서청은 조병옥 경무부장 요청을 받고 단원 500명을 급파한다. 이후에도 서청은 1948년 11월과 12월 사이 단원 최소 1000명 이상을 경찰 혹은 경비대 자격으로 제주도에 파견했다.

"이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다. 이들이 전율할 학살극을 벌여도 이를 제재할 기관은 없다시피 했다. 이와 관련 미 고문관이었던 피쉬그룬드는 '미국에서 경찰관은 그 지역 출신이 하는데, 왜 북한에서 탈출한 서북청년회가 제주도에서 경찰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도 파병, 서청 활동의 하이라이트"
젖먹이 아기, 죄 없는 민간인 등 학살
제주도 행정 2인자도 고문치사 
견제·감시 조직 없는 서청

4·3 사건 당시 제주도민 2만 5000명~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서청 김경일 감찰위원장은 1987년 1월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서청의 제주도 파병은 바로 서청 활동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탈출한 젊은이들이 남한의 최남단 제주도를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았으니 말이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이 "제주도가 공산 반도에 의해 불타고 있다"고 쓴 지시문을 전달받고 단원 500명과 함께 제주에 내려갔다고 했다.

이들은 제주에서 무장대뿐 아니라 민간인을 상대로 살인·폭행·고문·겁간·약탈 등을 저질렀다. 서청 출신 경찰 이윤도는 마을에서 가족 중 한 사람이 사라지거나 없어진,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와 고문했다. 대원들에게 그들을 칼로 찌르라고 강요하더니 스스로 한 명씩 등을 찔렀다. 젖먹이 아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장대와 상관이 없는 사람도 희생됐다. 4·3 사건 당시 공무원이었던 고경흡 씨는, 양관표라는 인물이 무장대가 아니었는데도 서청 단원들에게 고문을 받다 숨졌다고 말했다.

"양관표는 산에 안 올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본 등으로 도피해 버리고. 그런데 양관표가 서북 청년으로 구성된 특별 중대에 잡혀갔다. 나도 같은 시기에 잡혀갔었다. 피의자들이 막 두드려 맞으니까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도 현장을 봤는데 눈물겨워서 말을 못하겠다. 그 장면을 보면. 그 어디 동족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서북 청년들이 그냥 막 몽둥이로 치니까 뼈가 부서져 버린다. (양관표의) 뼈가 다 부서져 버렸다. 생나무로 그냥 막 두드려 패니까. (양관표는 이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서청의 위세는 날로 커졌고 만행은 갈수록 심해졌다. 제주에는 서청을 견제할 조직이 없었다. 1948년 11월, 제주도 행정 2인자였던 김두현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이 이를 반증한다. 보급 문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서청 제주도단부 김재능 단장은 자기 사무실에서 김 국장을 매질해 실신하게 한 뒤 밖에다 내버렸다. 김 국장은 끝내 숨을 거뒀다. 당국은 "김두현이 잘 알려진 공산주의자였다. 우리들은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다"는 서청 단원들 말을 인정해, 살해 가담자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했다.

이승만, 서청 단원 직접 모병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 가득
"서청 역시 역사의 희생자"

서북청년회는 지리멸렬했던 이승만과 우익 세력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이미지

서청이 제주에서 벌인 일은 '만행', '학살'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죄악은 기록되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지옥도를 만든 책임이 서청에만 있는 것일까. 서청의 만행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청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뒤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과 신승모 내무부장관은 1948년, 서청 단원들을 한국군에 6500명, 국립 경찰에 1700명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서청 단원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경비대 9개와 각 경찰청에 배정됐다.

서청 단원 250명과 함께 1948년 12월 19일 제주에 파견받아 경찰이 된 박형요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청 총회에 직접 참석해 모병을 종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4·3은 말한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느냐"고 발언했다.

군은 서청 단원들로 특별 중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제주도를 담당하고 있던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서청 단원 88명을 특별 중대로 꾸려 9연대에 편제했다. 당시 특별 중대원이었던 노윤봉은 "송요찬 연대장이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켜 '이들에 대해 터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군 지휘 계통의 명령과 간섭에서 자유로운 막강한 권한을 서청 단원들에게 쥐여 준 것이다.

서청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증오감을 가진 반공 단체였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제주 4·3 사건 전후로 제주도를 '붉은 섬'이라고 표현하며 대다수 도민을 빨갱이로 규정했다. 서청을 파견한 후 이들에게 무기를 쥐어 주고 진압을 명령했을 때부터, 참극은 예견돼 있었다.

황상익은 <제주 4·3 연구>(역사비평사)에 기고한 '의학사적 측면에서 본 4·3'에서, 서청이 이승만에게 이용당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서청에) 악행과 만행을 구체적으로 교사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다만 ‘저기 빨갱이들이 있다’는 주술을 속삭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칭칭 태엽이 감긴 자동인형처럼 그것이 풀리면서 예정된 방향으로 나갈 터이니까"라고 썼다. 4·3위원회 역시 보고서에서 "서청 단원들도 어쩌면 역사의 희생자일지 모른다. 문제는 서청을 사주한 자들이다"고 썼다.

서청을 사주한 이승만과 조병옥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서청 단원들 역시 대다수는 공산당 탄압을 피해 내려온 서북 기독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 대형 교회들이 서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몇몇 교인이 서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기록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청의 대외적·대내적 지원을 한 곳이 한국 개신교라는 주장도 나온다. 다음 기사에서는 서청과 한국교회가 당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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