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총살장이었던 해수욕장

표선해수욕장. 백사장이 넓고 아름다운 표선해수욕장은 70년 전 수백 명이 집단 학살된 총살장이었습니다. 사진 제공 남오성

[뉴스앤조이-4·3특별취재팀] 백사장이 넒고 아름다운 표선해수욕장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주도 관광 명소 중 하나입니다. 올레길 3코스를 끼고 있으며 인근에 제주민속촌과 해비치호텔&리조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해변은 70년 전 제주 4·3 사건 당시 총살장이었습니다. 올해 76세인 김두생 권사님(제주고백교회)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김두생 권사님의 고향은 표선면 토산리 웃(위)토산마을입니다. 1948년 12월 12일 느닷없이 웃토산마을에 소개령[적의 공습·화재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곳에 모여 있는 주민들을 분산시키는 명령 - <박완서 소설어 사전>(백산출판사)]이 내려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아래)토산마을로 내려갑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두생 권사님은 당시 스물여섯이던 아버지가 끌려간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알토산마을로 내려온 지) 3일째 되는 날 (토벌대) 사무실 마당으로 다 나오라고 하는 거야.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는지 죽창을 쑤시고 다니면서 다 검사를 했어요. 그날 애 낳은 엄마도 애기 안고 나왔어. 여자들은 보름달 보고 있고, 남자들은 세 줄로 나눠 서라는 거예요. 열여덟 아래 한 줄, 열여덟에서 마흔 사이 한 줄, 마흔 이상 한 줄 이렇게 세 줄로 세우더니 가운뎃줄을 착착 줄로 다 엮는 거야. 왜 그러는가 했더니 앞사람부터 표선 백사장으로 끌고 가는 거지. 우리 할아버지랑 엄마는 울음바다였지. 크게 울지도 못했어요. 다 쏴 버릴까 봐 무서워서…."

이때 끌려간 토산리 18~40세 남성들은 표선국민학교에 감금됐다가, 12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한모살이라고 불리던 표선 백사장에서 집단 총살당합니다.

"한집에 세 명도 죽고, 네 명도 죽고, 우리 집처럼 한 명도 죽고, 집집마다 죽은 사람이 다 있었어요. 나중에 시체를 가져가라고 해도 가지러 갈 사람이 없는 거야. 동네 젊은 사람을 다 죽였으니 누가 시체를 들러 가겠어? 우리 할아버지가 그때 팔십이었는데, 팔십 난 할아버지가 시체 들고 왔어요. 얼마나 울면서 들고 왔는지…."

그날 이후 웃토산마을은 동짓달 열이렛날과 열여드렛날에 온 동네가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픈 날인데 마을 분위기는 명절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온 동네가 제사상을 차리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학살된 주민들, 초토焦土 된 섬

이런 집단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1949년 2월까지 이른바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 때문입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 단체들을 습격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군경은 무장대 소탕 작전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쉽사리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은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이라는 강경 진압을 전개합니다.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후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불타고 곳곳에서 처참한 학살극이 벌어집니다.

제주4·3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제주도민이 당시 제주도 인구 약 1/10인 2만 5000~3만 명에 달한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중 군경 토벌대에 죽임당한 사람이 약 80%라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1)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4개월가량 전개된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곳곳이 불타고 처참한 학살극이 벌어진다. 제주4·3평화공원 4관에 전시된 부조 사진. 뉴스앤조이 박요셉
제주 4·3 사건 희생자 분포 지도. 이 사건으로 제주도 전역에서 제주도 인구 약 1/10인 2만 5000~3만 명이 희생됐다. 그중 군경 토벌대에 죽임당한 사람들이 약 80%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권력자들은 제주도 전체가 공산화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 수장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에는 약 1,000명의 폭도들이 있으며 지지자는 6만여 명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는 거의 모든 제주도민이 폭도 가운데 자신들의 가족, 친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언급합니다.2)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대통령 발언이나 미군정 자료를 보면 '중간산마을 초토화 작전'은 미군과 이승만 정권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국가권력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서북청년회와 한국교회

이 비극적인 역사에 한국교회가 상당히 관련돼 있습니다. 많은 4·3 사건 희생자들이 당시 육지에서 온 토벌대를 '서북청년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월남한 청년들 중심으로 결성된 극우 조직입니다. 원래 공식 명칭은 서북청년회인데 당시는 남한 사회에 우후죽순으로 각종 청년단이 결성되던 시기라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회자됩니다. 서북청년회와 개신교의 연결점은 이미 많이 알려졌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영락교회와의 연결 고리를 한경직 목사가 직접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3)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창립 이후부터 해체까지 3년간 남쪽 사회주의자들과 가열하게 충돌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이 부족한 곳에 서북청년회를 보냈고, 그들은 공권력이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을 도맡았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는 서북청년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 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4)

서북의 역사 그리고 반공주의 신앙

많은 4·3 사건 희생자들이 당시 육지에서 온 토벌대를 '서북청년회'로 기억하고 있다. 서북청년회는 한국교회와 깊은 연결 고리가 있다. 제주4·3평화공원 3관 전시물 사진. 뉴스앤조이 박요셉

'서북청년회' 하면, 단번에 반공 이데올로기에 파묻힌 극우 폭력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서북 지역은 원래 반공과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를 아우르는 서북 지역은 한반도 근대화의 전초기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신교를 적극 받아들인 지역이며,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서북 지역 리더는 단연 안창호와 이승훈이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육기관입니다.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한반도를 이끈 많은 지도자가 서북 출신입니다. 조만식, 윤치호, 손정도, 류영모, 함석헌, 장기려, 장준하, 이찬갑 등 다 나열하기도 어렵습니다.

기독교 민족주의 선봉에 섰던 지역 이름이 어떻게 반공을 대변하는 이름이 됐을까요. 최근 6월 민주 항쟁을 소재로 한 '1987'이라는 영화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유독 한 장면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분)이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분)을 고문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묘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머이 옆에 선 아새끼 보이디. 요거 이름이 동이야. 보릿고개 때 다 죽어 가는 거 우리 어머이가 거둬 줬지. 야래 이 골 돌리는 것이 신묘해서 말이야. 아바이가 식구 삼고 장가도 보내 줬어. 내래 동이를 형님으로 모셨더랬지. 기캈는데 말이야. 김일성이가 이북에 들어오니끼니 야래 이 인민민주주의 하갔다고 완장 차고 설쳐 대드만. 이 아새끼가 우리 집에 인민 부대 끌고 와서리 뭘 했는지 알간?

인민의 적! 악질 지주! 반동분자를 지옥으로 보내자! 동이가 총알도 아깝다믄서, 우리 아바이 가슴에 말이야, 죽창을 찔러 댔어. 내래 대청마루 밑에 숨어서리 다 봤디. 이보라우, 내래 고때라도 기어 나갔으면 우리 어머이 살렸갔네? 누이 목숨은 살렸을 게야. 나 대신에 죽었으니끼니. 지옥이 뭔지 알간? 내 식구들이 죽어 나가는 판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거. 소래기 한 번 못지르는 거. 고거이 바로 지옥이야."

이 장면이 뇌리에 박힌 건 아마도 소설 <손님>(황석영)이 생각났기 때문일 겁니다. <손님>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왜 반공주의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됐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독교 민족주의의 선봉에 섰던 지역 이름이 어떻게 반공을 대변하는 이름이 됐을까. 영화 '1987'에 나오는 박처원 치안감의 한 대사는 소설 <손님>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1987' 스틸컷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은 꽤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이면서도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자로 대립하다가,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결국 소련의 후원을 등에 입은 공산주의 세력이 북쪽의 권력을 갖게 되자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월남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중 상당히 일찍 월남한 사례입니다.

이들은 반공주의를 이론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체험했기에 평생 마음에 각인됐고 신앙으로까지 연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떨칠 수 없는 질문은 '어떻게 이들은 사람을 그토록 참혹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언할 순 없지만, 공산주의는 이들에게 '사탄'이었고 그래서 무자비하게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한 게 아니었을까요.

시간의 단절을 넘어

저희가 취재하며 만난 희생자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제주 4·3 사건 당시 아버지가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김두생 권사님. 뉴스앤조이 박요셉

올해 제주 4·3 사건은 70주기를 맞습니다. 7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결코 긴 시간도 아닙니다. 저희가 취재하며 만난 희생자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분들에게 1948년 4월 3일은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닙니다. 떼어 낼 수 없는 삶의 상처입니다.

시편 90편 4절은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천 년 전 일어난 일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여기시는데, 70년 전 일어난 사건은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커다란 상흔으로 남아 있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실까요.

한국교회는 그동안 어두웠던 역사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한국교회는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를 공개적으로 논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더 강합니다.

과거에 대한 성찰 없이 미래를 논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 하는 것"이라는 시대의 화두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답해야 합니다. 70년 전 사건을 직접 경험한 희생자 유족 1세대가 살아 계실 때 진정한 회개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프로젝트 '4·3과 그리스도인'을 시작합니다

<뉴스앤조이>가 프로젝트 '4·3과 그리스도인'을 시작합니다. 사진 제공 양상호

<뉴스앤조이>는 제주 4·3 사건 70주기를 맞는 이 시점에,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단지 과오를 들추어 특정 부류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하더라도 그동안 외면해 온 역사와 직면하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자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제주 4·3 사건을 깊고 넓게 취재해 나가며 기사와 영상 콘텐츠를 축적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제주 4·3 사건을 알고자 하는 분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기존 연구물들을 소개하는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하겠습니다. 뜻있는 연구가들과 협력해 자료집(혹은 단행본)도 제작하려고 합니다. 제주 4·3 사건 현장을 돌아보며 영성을 고양하는 평화 순례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진행할수록 어려운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70년 전 일어난 이 사건은 역사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큰 고통과 갈등이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 교계에서는 여전히 이야기조차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반세기 넘도록 우리를 얽매 온 반공주의 신앙을 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의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이 후원과 관심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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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78.1%,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2.6%, 가해자 구분 불명 9%라고 적시했다. 가해자 구분 불명을 제외하고,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와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비율을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2) 최태육 <남북 분단과 6·25 전쟁 시기(1945년~1953년) 민간인 집단 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202쪽에서 재인용
3) 김병희, <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 54~56쪽
4)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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