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을 맞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올 한 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아보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4·3 사건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가 제주 4·3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잘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과 깊이 연루돼 있는데도 그동안 4·3의 진실을 규명하거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해 온 역사를 직면하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 신앙을 어떻게 재정비할지 함께 성찰하고자 '4·3과 그리스도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 4·3특별취재팀

"이번 순례가 제 삶의 변화를 가져 올 변곡점이 될 것 같습니다. 전쟁, 상처, 회복적 정의, 고난, 동아시아 평화와 상생의 공동체… 크고 굵직한 말들이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함께 마음속에서 뒤척입니다. 뭔가 명료한 것은 아직 없지만, 이미 새로운 부르심을 따라 새로운 순례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주 4‧3 사건 70주기를 맞이하여 <뉴스앤조이>와 한국샬렘영성훈련원(공동대표 박경조·조경열)이 주최한 제주 평화 순례에 참여한 한 목회자의 소감입니다. 그가 제주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뉴스앤조이>와 한국샬렘영성훈련원(공동대표 박경조·조경열)이 주최한 제주 평화 순례가 3월 19일에서 22일까지 열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경소영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순례자 25명이 3월 19일, 제주 서귀포시에 위치한 세인트하우스에서 만났습니다. 순례자들은 3박 4일간 한국샬렘영성훈련원 운영위원장 김홍일 신부 인도를 따라 70년 전 억울하게 이 땅을 떠난 영혼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30년간 4‧3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며 수천 명 증언을 채록한 김종민 상임공동대표(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강연을 통해, 4‧3평화공원과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동광리 큰넓궤에서 진행한 희생자 유가족과의 만남을 통해 아픈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김홍일 신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 네 가지가 있다. 먼저 가장 중심이 되는 성서, 두 번째로 기도와 성찰, 세 번째로 인간의 역사,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제주 평화 순례는 이 네 가지 통로가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기획됐습니다.

순례는 초기 기독교부터 내려온 오래된 전통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요즘은 순례와 여행에 별 차이가 없는 듯 느껴질 때도 있지만, 원래 순례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순례자가 길을 떠나기 전 기도로 그의 안녕을 기원했다지요.

악천후 속에서도 순례자들은 걷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70년 전 이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숲 사이로 걸어야 했던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의 자취를 따라 침묵하며 걸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영화 '지슬'의 현장, 큰넓궤 동굴

제주 평화 순례의 3박 4일도 일반적인 여행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죽음까지는 아니었지만 고생을 각오하고 진행했습니다. 제주 전역에 풍랑주의보가 발효되고 추운 날씨에 비마저 내리는 상황에서 순례자들은 걷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70년 전 이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숲 사이로 걸어야 했던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의 자취를 따라 침묵하며 걸었습니다.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동굴 방문이었습니다. 영화 '지슬'의 실제 배경이자 촬영지였던 동굴 큰넓궤는 입구가 좁지만 그 안에 두 마을 사람들이 군경 토벌대를 피해 수십 일간 숨어 지냈을 정도로 내부가 넓습니다. 제주에는 이런 동굴이 많다고 합니다. 1948년 11월 군경 토벌대가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을 시작하자 상당수 도민이 동굴로 피신했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순례의 하이라이트자 영화 '지슬'의 실제 배경이자 촬영지였던 동굴 큰넓궤 입구. 뉴스앤조이 강도현
큰넓궤는 입구가 좁지만 그 안에 두 마을 사람들이 군경 토벌대를 피해 수십 일간 숨어 지냈을 정도로 내부가 넓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동광리 마을 회관에서 순례자들을 맞이한 홍춘호 할머니는 당시 11세였는데, 토벌대를 피해 큰넓궤 안에서 가족 및 마을 주민들과 40일이 넘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발각되자, 주민들은 쌓아 놓은 짚에 불을 붙여 연기로 토벌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토벌대가 철수한 후 주민들은 산으로 피했지만 대부분 다시 발각돼 운명을 달리합니다. 다행히 홍춘호 할머니는 토벌대의 총칼을 피해 생존했고, 70년이 지난 지금은 제주4‧3길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여든이 넘은 홍춘호 할머니는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가운데서도 제주 사투리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비참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얼굴을 찡그리시지도 않고 담담하게 겪은 일을 전해 주셨습니다. 내용은 슬픔과 원통함으로 가득했지만 홍춘호 할머니 목소리에서는 오히려 평온함이 느껴졌습니다.

홍춘호 할머니는 당시 11세였는데, 토벌대를 피해 큰넓궤 안에서 가족 및 마을 주민들과 40일이 넘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 담담하게 겪은 일을 전해 주셨습니다. 뉴스앤조이 경소영

"홍춘호 선생님이 4‧3 사건 이후 트라우마와 싸워 온 제주 할머니의 모습이 아닌, 넉넉히 역사를 관조하고 담담히 구술하는 모습은, 제주도민이 기존 선입견을 깨고 새로운 치유적 내러티브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제주도 현지 호스트로 순례에 참여한 세인트하우스 강민창 목사가 홍춘호 할머니 증언을 듣고 남긴 소감입니다. 강민창 목사는 제주 4‧3 사건으로 할아버지를 잃은 유가족입니다. 가장 치열한 이념 대립의 장이었던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변모하게 하기 위한 운동을 모색하는 한 목회자에게 홍춘호 할머니의 삶과 증언은 제주도가 평화를 향해 발돋움하는 가능성으로 비친 것입니다.

제주 교회와 4‧3

제주 교회가 제주 4‧3 사건에 어떻게 연관됐는지도 돌아봤습니다. 재산무장대와 토벌대 모두에게 피해를 입은 모슬포교회와, 무장대에 살해됐으며 제주도 1호 순교자로 많이 알려진 이도종 목사가 시무했던 대정교회를 방문해 당시 제주 교회 역할과 현재 제주 교회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정교회 앞에는 교회가 세운 안내판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가 세운 기념비가 있습니다. 교회 안내판에는 이도종 목사가 "재산무장대에 붙잡혀 순교"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기념비에는 "무장 단체(폭도)에게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제주 교회 안에 여전히 제주 4‧3 사건을 이념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모슬포교회 담임이었던 조남수 목사는 재산무장대에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입산자들을 자수하도록 권면하고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백방으로 뛰었다고 합니다. 뉴스앤조이 경소영

당시 모슬포교회 담임이었던 조남수 목사도 재산무장대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조 목사는 군경 토벌대와 재산무장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복 학살을 멈추고자 당시 모슬포 지역 군경 지휘부와 협상을 벌입니다. 조 목사가 직접 산을 돌아다니며 입산자들에게 자수를 권할 테니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의 안위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민 수천 명을 자수하도록 권면하고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경 지휘부가 교체되면서 조남수 목사를 통해 자수한 주민 중 군경 토벌대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생겨납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 목사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돼야 할 부분입니다.

제주 4‧3 사건은 발발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역사적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국가권력에 의해 잊히도록 강요받으며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 이루어졌는데도 어떤 이들은 화해와 상생보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평화보다는 대결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 1/10이 국가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제주도민의 삶을 얽매고 있는 현실 앞에서 순례자들은 마태복음 5장 9절의 산상수훈을 떠올렸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순례자들이 4‧3 현장을 돌아보며 공통적으로 남긴 소감은 이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 1/10이 국가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제주도민의 삶을 얽매고 있는 현실 앞에서 순례자들은 산상수훈을 떠올렸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피스 메이커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4‧3의 진실 앞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동안 교회가 4‧3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70년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부여잡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숙제일 것입니다.

제주 4‧3 사건 70주기를 맞이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주를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념적 입장을 취하거나 주장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피스 메이커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피스 메이커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4‧3의 진실 앞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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