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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인터뷰] 이정배 교수 독서 여정①
  • 강동석 기자 (kads2009@newsnjoy.or.kr)
  • 승인 2017.07.2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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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거리의 신학자', 이정배 교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 교수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지난해 초 은퇴했다. 정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은퇴한 것은 학교 밖을 교회 삼아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세월호 이후 집회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각종 행사와 집회에서 기도하고 설교했다. 2015년에는 감신대 정상화를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정배 교수는 누구보다 '토착화 신학의 산실' 감신대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신학자다. 윤성범 박사, 변선환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토착화 신학의 맥을 잇기 위해 바젤로 유학을 갔고, '개신교와 유교'를 공부했다. 같은 신학자인 아내 이은선 교수도 함께였다. 이미 30년 전부터 개신교 신학과 생태학, 과학, 이웃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글을 써 왔으며, 늘 한국적 신학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신교 신학자로서 대안을 만들고 길을 내는 일로 수렴된다. 다양한 주제로 수십 권의 책을 펴냈다.

이어지던 빗줄기가 잠시 잠잠해진 7월 11일,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쉰 목소리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또렷이 살아 있었다. 오늘날 이정배 교수를 만든 사유의 궤적을 두 차례 인터뷰로 나눠 싣는다.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고 유학을 갔다 온 뒤 '한국적 생명신학'을 논하기까지의 여정을 듣는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글쓰기와 설교, 종교개혁 500주년과 세월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눌 것이다(2부 인터뷰 바로 가기). 2시간여 대화를 정리했다.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이정배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다독(多讀)하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빠르게 1번 읽는다. 내용의 대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읽더라도 1번 읽으면, 머릿속에 내용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러면 2번째 읽을 때 어떤 책인지 알고 읽게 되니까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되도록 한 번에 읽으려 한다. 1,000쪽 정도 되는 책도 3~4일이면 읽는다. 열흘이나 보름 넘게 읽으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더라.

대부분 책은 빠르게 한 번 읽고 말지만, 10권 중 3권 정도는 깊게 숙고하고픈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읽으면서 노트에 정리한다.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정리하는 것이다. 논문이나 글을 써야 하니까 이런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즘에는 졸업논문을 안 쓰고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으나, 우리 때는 무조건 논문을 써야 했다. 400자 원고지 50매를 채워야 했는데,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학사 논문을 쓰면서부터 내용을 정리하며 독서하게 됐다.

- 어렸을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나. 독서 습관을 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늦게 알았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은 대학교 1학년 때다. 의사이자 소설가인 조지프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 1896~1981)이 쓴 소설 <천국의 열쇠>(바오로딸)를 읽고부터였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신부가 등장한다. 주변에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부와, 그와 대조적으로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실하게 소명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치숌이라는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처음으로 독서의 즐거움을 준 책이다. 신학도로서의 소명을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시 200원이면 문고판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천국의 열쇠>를 읽은 이후로 당장 읽지 못해도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웬만하면 다 사 모으려고 했다. 책을 발견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은 하나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책과의 만남을 귀하게 생각했다. 현재는 감신대에 종교철학과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대신 종교철학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을 비롯해 유명 철학자들 책을 친구들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 기독교 학교인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읽은 책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나.

고등학생 때 읽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생애에 대한 책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당시에는 잘 모르고 읽었다. 학교에 액자로 걸려 있는 위인 중 한 명으로 슈바이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림의 성자', 의사인 줄만 알았다. 그때는 안창호와 슈바이처의 삶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한 소명이 있었던 것인가.

특별한 소명이 있어서 신학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식구들이 충북 보은으로 이주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했다. 아버지는 유교인이었고,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토속신앙인이었다. 기독교 배경이 없는 집안에서 기독교 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 시절 6년간 아주 열심히 활동했다. 종교부장을 비롯해서 학교 임원, 학생회장까지 맡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영락교회 중등부에서 3년간 생활한 것도 큰 추억거리다.

고등학교 입학 후 평동교회를 다니면서 평생의 스승 장기천 목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나중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낸 분이다. 아주 올곧은 분이셨고, 이분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과 평소 행실을 보면서,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 저런 삶이 목사의 삶이라면 나도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신대에 진학했다.

감신대에 들어와서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감신대를 다니고 있을 때, 감리회 감독 선거가 있었다. 목사들이 모여서 160번 넘게 투표를 했다. 투표를 할 때마다 다 같이 기도했다. 기도하고 투표하고, 기도하고 투표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렇듯 목사들이 기도했는데 한 사람 마음도 움직여지지 않아 표가 그대로였다. 단 1표도 요동하지 않았다. 감독은 결국 그 자리에서 뽑지 못했고, 감리회는 양분됐다. 그 모습을 보고 심한 회의를 느꼈다. 기도가 거짓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군대나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친구와 군대 가기 전에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그 친구는 군대를 갔는데, 나는 안 갔다.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가 부임해 왔다. 그분과의 만남이 신학교에 계속 남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총학생회장도 맡고, 변선환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다.

- 시기별로 전환점이 됐던 책을 소개해 달라.

먼저 대학교 때 읽었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철학적 신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을 들 수 있다. 야스퍼스는 이 책에서 '차축 시대' 개념을 이야기한다. 보통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절대적인 한 점으로 인식된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광명이 찾아온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까지 이 땅을 총체적 어둠이라 여겨 왔다.

칼 야스퍼스는 이런 기독교 계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예수가 오기 전, 다른 종교들이 싹텄던 기원전 8세기부터 2세기까지의 '차축 시대'를 이야기한다. 갑작스럽게 홀연히 한 빛이 비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계사적으로 제(諸) 문화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종교성이 발현되는 응축적인 시기가 있었다. 기독교 역시도 '차축 시대' 종교의 발전적 양태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당시 예수를 믿어 구원받지 않으면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간다는 신앙 이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기독교에 입문하지 않은 가족들이 지옥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야스퍼스는 철학에도 신앙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신념 때문에도 죽을 수 있는 신앙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을 받았다가, 그 자리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과학자인 갈릴레이뿐 아니라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신부도 재판을 받았다. 수학자면서 신부였던 브루노는 갈릴레이와 달리 지동설에 대한 주체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하나의 객관적 지식으로 봤다. 지동설이 이미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사실관계는 바뀌지 않으니 살아남기 위해 지동설을 부정한 것이다. 브루노는 철학(주체)적 신념을 지키려고 지동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도 순교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야스퍼스는 주체적 자기 확신도 신앙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이것 역시도 기독교 계시 신앙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학사 논문의 주제였다. 대학원 시절에는 야스퍼스 철학을 신학화한 프리츠 부리(Fritz Buri, 1907~1995)를 공부했다. 당시 변선환 교수는 바젤대학교 프리츠 부리 교수 밑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온 상황이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의 신학은 칼 야스퍼스와 슈바이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부리 교수는 슈바이처에 대한 존경 때문에 신학 공부에 뛰어들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 이해인 '철저 종말론'를 논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철학자 야스퍼스를 교회의 교사, 교부 반열에 세울 정도였다.

다시 말해 칼 야스퍼스는 기독교 계시 신앙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근거해 '철학적 신앙'을 이야기했고, 부리 교수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슈바이처의 신학을 연결 지었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으나 종말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곧바로 오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인식이 아닌 '의지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의 의지와 내 의지가 결합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존재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슈바이처에게서는 이것이 생명 외경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슈바이처 본인이 아프리카로 향한 것은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리 교수는 동양 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슈바이처가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저마다 생명 외경을 말한다고 믿은 탓이다. 하지만 동양 종교들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계시 신앙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의 철저성 여부에서 비롯했다.

한쪽 서가에 자리한 때 묻은 책들. 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과 프리츠 부리 교수의 저서가 섞여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감신대에서 석사를 마친 우리 부부에게 변선환 교수가 윤성범 박사의 토착화 신학(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맥을 이으라며 유학을 권해 바젤로 유학을 떠났다. 토착화 신학을 할 수 있는 신학 방법론을 부리 교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바젤은 유럽에서도 특수한 곳이다. 모두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를 정신 나갔다고 믿었을 때, 니체에게 강단을 내줬고, 칼뱅(Jean Calvin, 1509~1564) 당시 제네바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을 지켜 준 도시다. 그런 의미에서 휴머니즘의 도시라 일컬어진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협조하지 않고 도망친 칼 야스퍼스를 대학교수로 세웠다. 티베트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유럽 도시로도 유명하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바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에 대세였다. 그가 물러난 이후 바젤에 세 가지 흐름이 생겼다.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동양 종교와의 대화, 전통 교의학이었다. 내가 유학 갈 당시 프리츠 부리 교수는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1929~2013)와 더불어 동양 종교와 대화에 관심이 있는 70대 학자였다. 앞서 변 교수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방법론을 알고 있어서 우리 부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려움 없이 6년 안에 박사를 마칠 수 있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는 칼 바르트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때, 바젤대학교에 와서 고유 영역을 개척했던 사람이다. 칼 바르트는 프리츠 부리 교수가 바젤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바젤은 프리츠 부리를 초빙했다. 우리 부부는 유학 생활 대부분을 신학자인, 칼 바르트 둘째 아들 집에서 지냈다. 신학적 이해가 다른 우리 부부를 일원으로 받아 준 것이다.

나는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유학과 신개신교 간의 공동의 구조와 문제점 탐색'이라는 박사 논문을 썼다. 유학자 3명(주희, 퇴계, 율곡)과 신학자 3명(슐라이어마허, 헤르만, 트뢸치) 총 6명을 다뤘다. 유교와 기독교가 다른 종교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를 말하는 과정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구조를 탐색한 논문이었다. 논문 평가도 까다로웠다. 유학자 1명과 한글과 한문을 아는 외국 학자 1명이 추가로 참여해 평가했다.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박사 논문이 아니라 그때부터 무슨 책을 읽고 어떻게 뻗어 가느냐다. 그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이 시절, 내가 배운 제일 중요한 점은 기독교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적 에토스를 배웠다. 이 배움이 내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6년, 한국에 들어온 뒤 제일 먼저 나한테 영향을 줬던 책은 물리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Carl Freidrich von Weiszacker, 1912~2007)가 쓴 <시간이 촉박하다>(대한기독교서회)이다. 1990년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서울 세계 대회를 앞두고, JPIC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는 세계의 분배 불균형과 핵무기 과다 보유, 지구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 JPIC 문제들을 책임지지 않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멀었다고 지적했다. JPIC 문제가 세계와 자연 생태계에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 종말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오늘날 세계가 굉장한 환경 위기에 처해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JPIC에서 Justice(정의)는 1세계와 3세계 간의 문제다. Peace(평화)는 핵무기의 문제다. 1세계와 1세계의 문제인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Integrity of Creation(창조질서의 보존)을 이야기하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전 세계 공통 문제인 탓이다. 이때 토론 과정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생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생태학을 하다 보니, 자연과 여성의 운명이 거의 동근원적으로 인식돼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은 늘 여성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고대에는 어머니, 중세에는 마녀, 근대에는 창녀 이미지로. 여성 인식도 그렇게 변했고, 자연 이해도 그런 메타포로 바뀌었다. 근대에 와서는, 남성이 돈으로 사서 마음 놓고 짓밟고 유린할 수 있는 존재(창녀)로 이해된 것이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같은 사람이 창녀 메타포로 자연을 이해했다.

그러다 보니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생태여성학)도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과 종교의 주제가 신학계에 널리 확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학사나 과학과 종교에 대한 책을 몇 권 번역하면서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여성학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JPIC를 근간으로 이쪽 분야 독서량이 늘어나면서 관심이 많아졌고 논문도 많이 써 냈다.

내가 번역한 것 중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책 두 권이 있다. 먼저 데이비드 린드버그(David Lindberg, 1935~2015)가 쓴 <신과 자연: 기독교와 과학 그 만남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이다. 신과 자연은 기독교 계시의 두 지평이었는데, 기독교는 자연을 잃어버리고 신만의 종교가 됐다. 따라서 기독교는 다시 자연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과학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세종연구원) 저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의 <생명권 정치학>(대화출판사)이다. 이 책은 로즈마리 루터(Rosemary Ruether, 1936~)를 비롯한 기독교 여성 신학자에게 신학 콘텐츠를 많이 제공했다. 이 두 권을 번역할 때 제자 박일준 박사 도움이 컸다.

생태학 문제는 결국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현대 과학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물리학자들이 자기 영역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종교적이 되어 가는 현실을 봤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은 종교와 다른 종교의 만남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흔히 양자 간에 공명론(consonance)적 방식이 통용된다.

아주 잘못된 만남의 결과물로 창조과학이 있고 그것이 발전한 형태가 지적설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과학도 종교도 아니다. 지적설계론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됐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무수한 장애인과 동성애자가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인가. 너무 가혹하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축복일지 모르겠으나, '정상'을 벗어나면 그처럼 가혹한 일도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기독교(창조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동성애 문제도 신앙이나 종교나 기독교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과학의 문제다. 자연 생태계에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생명체가 8~10%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자연 생태계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다는 것이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 1940~)의 말이다. 이들을 부정하고, 잘못된 시각으로 동성애자들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어둠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내몰고 있는 역할을 기독교인이 자처하고 있다.

천동설·지동설 문제가 성경 구절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동성애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계속 성서 구절 문제로만 본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종교를 해방할 수 있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해방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존재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는 시대가 됐다. 이것도 사실 유전자 조작 문제와 관련 있다. 유전자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에 대해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은 과학의 개벽을 정신의 개벽이 못 따라가는 상황이다. 과학의 개벽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신학자들이 논의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외계인도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가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우주 전체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든 비유가 있다. 지리산 크기가 전 우주의 크기라고 한다면, 태양계는 지리산 자락에 떨어진 인간의 눈썹 한 가닥 정도의 크기라는 말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지구와 인간 중심적인 사유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은하수가 수십억 존재하는 대우주를 발견했기에 신학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자꾸만 편협한 자세를 취한다면 신학은 점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스스로 위태롭고 무너질 것 같으니까 바깥에 적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슬람, 동성애, 종북, 좌빨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자기 영역을 좁게 만들고 타자를 악마시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도 기독교인 수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세월호 관련 서적들(위)과 이정배 교수의 저서와 역서 일부(아래). 뉴스앤조이 최승현

토착화 신학을 공부해 왔지만, JPIC 영향으로 서양의 생태학, 여성학,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공부하다 보니 우리 것에 대한 관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뿌리 깊이 깨달았다. 서양의 자연, 서양의 생각만 공부하지 않고, 동양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고민이 다시 생겼다. 생태학적 지평에서 토착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토착화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예컨대, 윤성범 박사가 조상의 효, 하늘의 효를 말했다면 나는 생태학 관점에서 땅에 대한 효(地孝)를 생각하게 됐다. 풍수지리설에 대한 생태신학 연구도 이때쯤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양 것에 대한 공부(생태학, 페미니즘,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고, 이를 토착화 신학의 내용으로 동화했다면 이후에는 민중신학의 정치적 토착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가 시대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민중신학이 관심을 보이고 있던 동학에 대해 여러 편 논문을 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후 유교 전통을 진일보시켜 대중화·서민화한 동학에 대한 관심이 점전 커졌다. 그렇게 동학,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다석 유영모와 바보새 함석헌에 대한 글도 그 연장선상에서 여러 편 생산했다.

그런데 당시의 2세대 민중신학은 안병무 교수와 서남동 목사의 영감이 넘치는 1세대 민중신학과 달랐다. 마르크스적인 민중신학이 주된 흐름이었던 탓이다. '과학적 민중신학'이라는 이름하에 1세대에 비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했다. 토착화 신학 전통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수용하고, 서구 생태학을 아시아적 토양에서 다시 논하는 방식으로 '한국적 생명신학'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냈다. '한국적 생명신학'은 토착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민중신학과 생태신학과 문화신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사유의 틀을 가지고 서양 생태신학 개념을 담았고, 민중신학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로써 변선환 교수의 종교해방신학이 말하는 해방의 차원을 우주 생태적 지평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결과물이 1996년 <한국적 생명신학>(감신)으로 출판됐다. 민중신학과의 갈등과 투쟁, 서양 신학을 넘어 보겠다는 토착화 의식의 결과물이다.

거듭 말하지만, 2000년에 접어들면서 유영모, 함석헌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교수 초년 시절에도 다석 유영모를 배워 본 적 없었다. 마침 다석의 제자 김흥호 목사가 이화여대를 은퇴하고 감신대 명예교수로 오면서, 그분과 독대하며 다석 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해서 출간한 다석 유영모에 관한 책이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사람들), <빈탕한데 맞혀놀이>(동연)다.

나는 다석 유영모의 예수 이해를 케리그마 이전 예수, 곧 역사적 예수가 불교의 삼재론(三才論) 틀에서 토착화한 것으로 풀었다. 서구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동양적 사유로 기독교를 이해했던 다석 같은 사상가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 알게 됐다. 신학을 하는 데 있어 다석 유영모를 알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패러다임 시프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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