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인터뷰 초입,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가 난색을 표했다. 이력만 봐도 '다독가'라고 짐작할 만한 그에게 독서 편력을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우리 인생에서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그럼에도 그의 독서 편력이 궁금했다.

양희송 대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복음주의자의 전형이라 평가된다. 현대사회 어떤 민감한 이슈를 가져와도 '복음주의자' 입장에서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 나갈 것 같다. 그런 점은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와 닮았다. 실제로 대학 시절부터 존 스토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양 대표는 '나쁜 책은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어떤 책이든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 읽기는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책 속의 논리에 설득되는지 여부는 차후 문제다. 무엇이든지 건드리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본다. 그가 대표기획자로 있는 청어람ARMC는 페미니즘과 이슬람, 동성애를 비롯, 한국교회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이슈를 폭넓게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부흥했던 과거 복음주의 연합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다. 온누리교회, 서울대기독인연합, 경배와찬양, 뜨인돌, 학원복음화협의회, <전하세예수>, <복음과상황> 등 복음주의권 다양한 단체를 거쳤다. 현재는 청어람ARMC에서 복음주의 지식 생태계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청어람ARMC에 들어온 이후, 정치·사회·문화·예술·철학·신학 등 다양한 강의를 기획해 진행했다. 기획한 강의만 수백 편이다.

<다시 프로테스탄트>(복있는사람),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포이에마), <이매진 주빌리>(메디치미디어) 등의 저서를 통해서도 한국교회 현주소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2015년부터는 청어람 '이 책 한 번 잡솨 봐' 코너를 통해 정기적으로 기독교 신간을 소개하고 있다. 5월 16일 청어람ARMC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독서 여정을 들었다. <서유기>(계림문고)부터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대한기독교서회)까지 다양한 책 이름이 나왔다. 1시간 30분 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양희송 대표의 독서 여정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현선

- 독서 습관이 궁금하다.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독서 스타일 자체는 잡식성이다. 이 주제 저 주제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운다.(웃음) 한 분야에 관심이 있어도 주변 것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많이 읽어 왔다. 넓고 얕게 읽은 편이다. 신학 이슈를 건드려도, 기독교 서적만 읽지 않고 사회학이나 주변 분야 책을 많이 읽는다.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나와 맞는 저자가 생긴다. 가능하면 그 저자 책을 다 섭렵하려 한다. 다양하게 읽으면 계통도 잡힌다. 지나고 보니, 비교적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각 영역의 중요한 책을 읽어 온 것 같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책을 선택하고 연결하는 습성이 길러졌다. 하나만 골라 읽지 않고 관심사 분야의 책을 좌우로 펼쳐서 섞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 제너럴리스트다.

원전(原典)은 영어 서적만 읽을 수 있으니까, 학자들과 비교할 정도는 못 된다.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은 국내 번역되기 전에 먼저 접한다. 꼼꼼하게 못 읽어도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는지 보고, 출판사와 연결해 주기도 한다. 일반인보다 조금 빠르게 관심 있는 분야에 반응해 왔던 것 같다.

요즘은 책 보는 일이 쉽지 않다. (청어람이) 신간 소개도 하고 있고, 건드릴 책이 많아져 깊게 못 본다. 읽을 때는 표지와 목차, 머리말과 후기를 읽고, 관심 있는 본문 중 몇 부분만 확인해 보는 식으로 읽는다. (최근에는) 그렇게 거쳐 가는 책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좋아서 꼼꼼하게 독서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 쓰고 있는 원고가 있는데, 원고 쓰기 위해 또 책을 읽어야 하니까 여유 있게 독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나.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계림문고라고 있었다. 당시 꽤 여러 집에서 계림문고 서적을 샀다. 우리 집에 세계 명작 시리즈 100권짜리 세트를 들여놓은 것이 내 인생에서 책과의 중요한 만남이었다. 계림문고 100권을 다 읽었다. 어떤 책은 30~40번 읽기도 했다.

무슨 책을 좋아했는지 가만히 돌아보니 <서유기>를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 다음에 <수호지>, <그리스 로마 신화>, <걸리버 여행기>, <15소년 표류기>, <로빈슨 크루소> 등 표류하고 모험하는 류의 책을 좋아했다. 보통 조난을 다루는 책에는, 모험이라는 요소도 있지만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밀도 있게 나온다. 그런 부분을 즐겨 봤다.

비교적 일찍부터 책 읽는 맛을 들인 셈이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는데, 교육학적 관점에서 바라봐 주셨다. 아버지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키면 혼자 재미나서 막 떠들었다. 그때 내가 읽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표현했다고 하더라. 지금도 아버지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웃음) 책 읽는 것을 즐겼고, 가정에서 독서를 격려하는 분위기라서 독서하는 데 자극을 받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기독교 신앙을 접할 때도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설교 듣는 것 외에 책을 통해 파고들어 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부터 신앙 서적을 챙겨 읽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니까, 어떤 분야든지 관심이 생기면 책으로 먼저 입문을 하는 일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청어람ARMC 사무실 안에 있는 서가. 뉴스앤조이 현선

- 독서 편력이 궁금하다. 시기별로 읽어 온 책을 소개해 달라.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읽었던 <꼬방동네 사람들>(현암사)이 기억에 남는다. 이동철이라는 필명으로 책이 나왔다. 꼬방동네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다. 청계천 같은 곳이다. 창녀촌이나 깡패 이야기가 나온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당시 기억을 돌아보면, 부모님이 걱정했던 것 같다. 청소년이 읽기에 좀 그렇다 싶은 내용이 있었으니 읽지 못하게 말려야 하나 싶었을 텐데, 내가 항변했다. 이것이 세상 모습이고 이 책 읽는다고 내가 나쁜 청소년이 되는 게 아니라고, 읽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독서 자체를 금지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홍신의 <인간 시장>(해냄)도 읽었고, 시기가 조금 지나서 고등학교 2~3학년 때 3권짜리로 나온 조성기의 <야훼의 밤>(홍성사)을 읽었다. (<야훼의 밤>은 대학교 선교 단체 UBF 분열 과정을 지켜본 청년 신앙인의 고뇌가 담겨 있는 자전소설 -기자 주)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민음사)도 비슷한 무렵 읽었다. 읽을 때는 흥미진진했지만 읽고 나서 의외로 너무 쉽게 잊혀졌다는 느낌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찰스 쉘돈의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예찬사)를 열심히 읽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우리도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질문에 답하면서 살자' 하면서 의욕적으로 모였다. 대학 들어가서도 만났다. 2~3년 유지가 됐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미국에서 오래된 책이다. 책 제목처럼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면서 살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준다. 미국의 사회복음(Social Gospel) 초창기 정서를 잘 드러낸다. 미국 청소년들 보면 WWJD(What Would Jesus Do)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영향을 줬다. 나도 고3 한창 열심히 신앙생활하려던 상황에 읽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갈 때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열린책들)을 읽었다. 상당히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포인트를 봤다. 예수의 생애를 교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간적인 해석을 가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그를 유혹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 사탄의 공격 같은 (거대한 것을) 상정한다. 하지만 이 책은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그리스도를 마지막까지 유혹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보통 예수를 영웅적이고 신적인 존재로만 그리지 않나.

어쩌면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소위 대속의 구원자가 되기 이전에 경험했을 가장 큰 유혹은 영웅이나 구원자가 아닌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아니었을까. 영웅심이나 이런 것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일상을 살아가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가. 그것이 그만큼 매력적이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큰 유혹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잘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 시집 <서울의 예수>(민음사)도 좋았다. 정호승 시를 좋아해서 꾸준히 시집을 사 모았던 시절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1980년대, 1990년대에 꽤 오랫동안 꾸준히 모았다. 요즘에는 모으지 않는다. <서울의 예수>가 상당히 독특하게 읽혔다. 그 당시 이 시집의 문장에서 아주 서늘하게 칼로 베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시어를 아름답게 쓰니까. 지금은 (시어가) 너무 따뜻해졌다.

시인이 예수를 현대로 불러와 시 속에 묘사하는 방식도 울림이 컸다. 전형적이지 않은 예수였다. 예수를 생각하면, 신앙의 대상으로 박제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정호승 시는 그런 예수를 서울이라는 공간에 불러온다. 한강변을 서성이고 비를 맞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 공간에 예수 이미지를 불러다 놓으니까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생각하는 이미지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실감 나게 재현해 줬다. 낯선 정서를 일깨워 준 점이 나에게 크게 작용했다.

(책이라는) 텍스트에서 벗어나면 더 이야기할 수 있다. 뒤늦게 봤지만, 노래극 '금관의 예수'도 있다. 대학교 1~2학년 때는 '공장의 불빛', '아빠 얼굴 예쁘네요', '지하철 1호선' 등 김민기 씨 작품을 연극으로, 노래극으로 접했다. 보려고 찾아다녔다. <전하세예수> 편집장으로 있을 때, 밤새 몰아서 예수 영화를 봤던 적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은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프란코 제피렐리의 '나자렛 예수'(1977)와 데니 아르캉의 '몬트리올 예수'(1989)도 봤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가스펠'도 흥미로웠다. 고대를 배경으로 예수를 재현하든지, 예수를 현대로 끌어내든지, 여러 방식으로 예수를 옮겨 놓는 작업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를 동시대에 불러내는 작업이 예술적으로 이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호승 시집 <서울의 예수> 표제작 '서울의 예수' 부분. 뉴스앤조이 박요셉

대학교 들어가서는 신앙 서적을 본격적으로 읽었다. 나는 온누리교회 대학부에 있었다. 내가 87학번인데, 온누리교회가 1986년에 시작됐다. 개척 초창기, 가건물에서 예배하던 시절부터 온누리교회를 다녔다. 한 10년 다녔는데, 대학부 있으면서 다양한 신서(新書)를 많이 읽었다. 전자공학과인데, 대학 들어가서는 기독교 서적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다.(웃음)

계열로 따지면 복음주의. 존 스토트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게 생각한다.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를 서로 비교하며 읽는 흐름이 있었다. (둘 다) 한참 읽다 보니, 내가 존 스토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는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차이가 뭔지 잘 몰랐다. 다만 존 스토트 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지나고 보니 실제로 두 사람이 동역자였고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확 갈라졌더라. 읽다 보니 그런 차이도 고스란히 느끼게 되더라.

<산상수훈 강해>를 인상 깊게 읽었다. 영어 원서로 읽었다. 산상수훈에 관심이 있어서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 책을 둘 다 놓고 봤다. 대조하면서 읽었다. 존 스토트 책은 문고판이고 얇다. 로이드 존스 책은 상당히 두껍다. 똑같은 본문인데, 존 스토트는 날렵하고 슬림하게 처리했고, 로이드 존스는 두툼하고 장황할 정도로 (상세하게) 풀어 간다. 두 사람 스타일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존 스토트가 쓴 책을 보면, 대부분 포인트가 유사하다. 성경 강해도 보면 깔끔하게 잘한다. 언젠가 배낭여행으로 영국 런던에 갔다가 존 스토트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서투른 영어 실력으로도 영어 문장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다. 귀에 상당히 아름답게 들렸고, 평이한 본문이었는데도 설교 마지막에 대반전을 끌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존 스토트가 설교의 대가라는 사실을 직접 느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영국에 신학 공부하러 갔을 때, 존 스토트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복음과상황>에 그 내용을 기고했는데,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직접 대화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존 스토트는 나에게 복음주의 신앙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인물로 기억된다. 미국이 빌리 그레이엄이라면 영국은 존 스토트라고 하는데, 나는 일찍부터 존 스토트의 생각과 행보에 관심이 있었고 많이 설득됐던 것 같다. 꾸준히 그 흐름을 좇아서 (여기까지) 걸어왔지 않았나 생각한다.

존 스토트는 전형적인 복음주의자였지만, 복음주의자로서 현대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필요하면 가서 배웠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데 열려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그보다 훨씬 경직된 스탠스다.

존 스토트 신앙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나 싶다. 로잔 운동이든 복음주의 운동이든 그 방향의 과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평생 그것을 잘 수용해 왔던 사람이 존 스토트다. 어떤 점에서 굉장히 감동적이다. 매번 진지하게 이것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높게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존 스토트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떤 주제에서는 입장이 올드하다. 조금 더 전진해야 한다고 보는 주제도 많다. 성서 해석 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견해가 많다. 그래도 그를 충분히 존중한다.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저자다.

그가 초기에 썼던 책과 후기에 썼던 책을 비교해 보면 스펙트럼이 다르다. 후반부로 가면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진다. 초기에는 복음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복음주의를 방어하는 모습 덕분에 많이 주목받았다. 만년에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폭넓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전통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상징적인 인물의 멋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자'라고 해서 다른 종류 책을 읽지 않거나 입장이 다른 신학에 관심을 끄면 안 된다. 복음주의자라는 것이 일반 사회 영역이나 학문 영역에서 일어나는 논의를 들여다보지 않을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 충분히 폭넓게 섭렵하고 참여하고 개입하되, 할 수만 있다면 복음주의 고유의 사유 방식이나 행동 양식을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보수가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이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서적도 필요하면 다 읽었다. 해방신학 텍스트를 본격적으로 들고 파지는 못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남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 말고, 당사자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쪽 문제의식을 이쪽에서도 풀어서 이야기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읽는 것 자체는 그렇게 폭넓고 많이, 게걸스럽게 해 왔다. 다만 읽어 가면서 내가 무엇에 더 설득되느냐는 다른 문제다.

대학생 초기,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나를 따르라>·<성도의 공동 생활>(복있는사람) 등도 읽었다. 최근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깔끔하게 잘 만들어서 새로 냈다.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백그라운드와 히스토리는 알고 읽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을 고려하면, 본회퍼는 상당히 넓게 읽히는 저자였기 때문에 다소 친숙했다.

당시에는 본회퍼 책에 있는 결의에 찬 문장이 좋았고, 크게 다가왔다. 지금은 오히려 본회퍼 책의 문제의식이나 결을 조금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곱씹는 부분이 많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문장도 많이 있고, 재발견하는 내용도 많다. 본회퍼는 일반적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넓은 광맥이다. 파고들어가 보면 경건·실천 측면에서 주는 통찰이 크다. 교회론 부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깊게 연구해 볼 주제가 많다. 간단하게 보고 치울 저자는 아니다.

양 대표는 3권의 책을 따로 가져왔다. 특별히 <온전한 그리스도인>(IVP)을 이야기하면서, 존 스토트가 쓴 서적 중에서 신학 서적이나 설교 강해집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같이 현대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는 책이 더 좋게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 대학생 때 경배와찬양에서 활동했다. 이후 기독 노래 운동 '뜨인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안다. 이때 이야기를 들려 달라. 두 단체 정체성도 다르고, 당시 '뜨인돌'로 넘어가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고민하며 읽었던 책도 있을 것 같은데.

대학부 때 카리스마틱 운동의 흐름에 속했던 경배와찬양에 열심히 참여했다. 나는 그쪽 스타일과 달라서 이질적인 면이 있었는데, 내가 혼자 신앙생활했다면 접하지 못했을 영역을 접할 수 있었다. (경배와찬양에)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가능하면 장점만 취하려 노력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이냐, 성령이냐 문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갈 거냐,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갈 거냐 하는 구도가 있었는데, 나는 늘 성경을 좀 더 중요하다 여겼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부에서 불편하게 본 사람은 '야당'이라고 느꼈을 것이고, 좋게 본 사람은 '중요한 보완을 해 준다'고 여겼을 것이다.

'뜨인돌'은 1991년부터 시작했다. 당시 경배와찬양 집회를 서울대학교에서 했는데, 찬양 인도를 하기 위해 연합 찬양팀을 만들었다. 그것이 뜨인돌의 모태였다. 문제의식은 경배와찬양과 달랐다. '우리 노래로 우리 문제의식을 담아 내는 곡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주·통일·사회·역사 등의 주제를 찬양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거의 다 창작곡이었고 테마에 맞춰 1년에 1번씩 정기 공연을 했다. 기존 대중 찬양 집회와 많이 달랐다.

외부 사람은 경배와찬양과 뜨인돌을 극와 극이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내부에 속했던 이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뜨인돌 구성원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찬양 인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체성 혼란 같은 어려움은 없었다. 경배와찬양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완전히 없어져야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제 기능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

당시 많이 읽었던 책이 자끄 엘륄의 <뒤틀려진 기독교>(대장간)다. 이 책이 1990년에 나왔다. 그 무렵 읽었고 다른 책도 두루 읽었다. 상당히 진보적인 책도 많이 읽었다. 뜨인돌에서 공연하거나 가사를 쓰려면 한국 현대사를 비롯해 다양한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서 폭이 넓었다. 인문 사회 쪽으로는 일반교양에 해당하는 책을 주로 읽었고, 조금 재미있게 봤던 것은 김창남 선생이 쓴 책이다. 노래 운동사를 정리한 책을 재밌게 읽었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읽었다.

모인 사람들이 거의 다 복음주의 배경에 있었지만 신학 쪽에서도 진보적인 책,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관련해서도 공부해야 되겠다 싶으면 읽었다. 정기 공연 앞두고 6개월 전부터 주제를 정해 거기에 필요한 책들을 멤버들과 스터디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공연을 구성했다. 스터디 분량이 상당했다. 좋아하는 것만 읽지 않았고 필요하면 챙겨서 읽었다.

- 대학교 졸업하고 경배와찬양 잡지 <전하세예수> 편집장으로 있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전하세예수> 편집장으로 3~4년 활동했다. 1995년 어간이었다. 경배와찬양에서 잡지를 내려 했는데, 적절한 인력을 구하지 못했다. 내가 글을 쓰고 잡지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보니까 요청을 받아 편집장을 맡게 됐다. 준비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이렇게 해서는 곤란하겠다 싶어서 조언을 좀 했던 것이 "네가 좀 해 봐라"라는 식으로 돼서.(웃음)

경배와찬양이 재정을 댔고, 경배와찬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로 보는 잡지니까 그 사람들 시야를 넓혀 줄 수 있는, 도움이 될 내용을 잘 담아서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상당히 투자를 많이 했다. 올 컬러에, 선교라든지 해외 취재를 할 만한 주제도 꽤 있어서, 필요하면 해외까지 취재를 나갔다. 덕분에 꽤 여러 군데 다니면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복음주의 운동의 폭넓은 스펙트럼이나 중요한 주제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유럽을 쭉 다니면서 라브리공동체나 떼제공동체를 방문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영국의 스프링하비스트(Spring Harvest) 등 신앙 운동의 중요한 거점을 돌았다. 수련회도 취재했다. 캐나다 빈야드 운동 모습도 담았고 다문화·다민족 교회도 취재했다.

카리스마틱 운동을 비롯해 복음주의 운동의 새로운 트렌드와 실험을 폭넓고 꾸준히 소개했다. 책 소개도 꽤 했고. 의외로 이 잡지가 복음주의 운동의 글로벌한 시야를 제공하는 기능을 조금이나마 했다. 당시 꽤 재밌게 글 쓰고 책 읽고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 일이 끝나고 나서는 <복음과상황>과 연결이 돼서 편집위원으로 있었다.

이 활동이 끝나고 1999년도에 유학을 갔다. 내 관심사는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당시 선교 단체나 (복음주의권에서) 여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신학교를 가거나 간사가 됐다. 다른 진로는 마땅치 않았다. 내가 볼 때는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 연합이나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 자체가 좀 더 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를 주된 관심사로 놓고 일할 사람이 없었다. 이 분야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는데, 돌아보니 나만큼 관심 있거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신학적인 공부를 거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목회할 생각은 없었고, 내가 하려는 것에 대한 자기 논리가 확립이 돼야 남들과 운동을 해도 하는 것이니까. 다만 국내 신학교에서 그것이 충족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냐 영국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미국에는 워낙 (유학을) 많이 갔으니까, 그리고 내가 꾸준히 관심을 두던 저자는 대부분 영국인이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부터 존 스토트, 알리스터 맥그라스를 접하고 있었고, 제임스 패커, 마이클 그린을 비롯해 관심을 갖고 있던 온갖 종류의 중요한 저자가 거의 영국 사람들이다 보니 영국 분위기를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갔다.

영국 유학 시절에 가장 크게 발견했던 인물은 톰 라이트였다. 첫해 수업 시간에 에세이 주제로 톰 라이트가 나와서 읽게 됐는데,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이 사람은 소개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 당시 <복음과상황>에 매달 '브리스톨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고 있어서, 그곳에 톰 라이트를 소개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 영역에 주목할 만한 복음주의권 학자로 톰 라이트라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에 톰 라이트를 소개한 거의 첫 번째 글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톰 라이트 저술을 꾸준히 챙겨 읽었다. 내가 로마서를 주제로 M.A.(Master of Arts) 신학 논문을 썼는데, 당시 톰 라이트의 박사 학위 논문이 책으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침 지도 교수가 톰 라이트 논문을 가지고 있어서 카피를 해서 논문 쓸 때 많이 참고했다. 당시에는 톰 라이트에 주목한 사람이 거의 없던 상황이라 나 혼자 열심히 읽고 강의하고 소개하는 글도 쓰고 그랬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셈이다.

톰 라이트 말고 개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도움받았던 책은 많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꾸준히 참고했는데, 맥그라스는 독창적인 학자라기보다 교과서적으로 정리를 잘하고 흐름을 잘 짚어 내는 사람이더라. 맥그라스도 좋아했지만, 신학자로서 깊게 파고드는 면모를 보이는 제임스 던 같은 사람의 책도 읽었다.

나중에 런던바이블칼리지(London Bible College)에 있을 때 읽었던 막스 터너의 책도 있다. 성령론의 대가인데, 최근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도 나오고 하면서 국내에 소개됐다. 워낙 학술적인 글만 쓰는 사람이다. 막스 터너의 작업은 굉장히 치밀하다. 학술적인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수준의 치밀성과 무게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한국에 온 뒤,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일하다가 <복음과상황>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와 이후에는 어떤 책을 읽었나.

<복음과상황>에 있을 당시 읽었던 책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바쁘게 글도 쓰고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책으로는 기억이 안 난다. 그 시기에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논의가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국 유학하다가 방학이라 한국에 들어왔을 때였다. 연초에 대학원생들 모임이 있었는데,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발제했다. 나도 발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촉발됐는데, 그해에 한 6개월을 <복음과상황> 지면에서 지상(紙上) 논쟁을 이어 갔다. 지상 논쟁이 잘 진행됐다고 볼 수는 없는데, <복음과상황> 사이드와 기독교학문연구소 사이드로 같이 토론하는 자리가 생겨서 나름대로 의미 있게 (논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이 있다. 브라이언 왈쉬와 리처드 미들턴이 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살림)이다. 원래 이들의 첫 번째 책 영문판은 1984년에 나왔고, 한국에는 1987년에 <그리스도인의 비전>(IVP)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그런데 10년쯤 지나 1995년에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 Biblical Faith in a Postmodern Age>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두 번째 책이 나온 것이다. '진리는 과거에 비해서 더 낯설다'는 제목인데, 과거 세계관 논의가 개혁주의신학이나 모던한 스타일로 진행됐다면 새로 나온 책은 포스트모던한 논의를 많이 수용했다.

이 책을 영국에 있을 때 원서로 접했고, 이 책은 한국에 소개될 만하다고 봤다. 세계관 논의를 오래 진행했는데, 이론적으로 진전이 없고 정체된 상황이라, 포스트모던 사상·이론을 상당히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이 책이 소개됐으면 좋겠다고 본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포스트모던이 기독교 신앙에 나쁘다는 식으로만 가르치고 있어서, 국내에는 2007년에 개정판이 번역됐다.

청어람에 전임으로 온 이후에는 어떤 책을 읽어 왔다고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독자에서 저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조금 재밌게 만났던 책은 르네 지라르의 저술이다. 청어람에서 르네 지라르 관련 강좌를 기획했던 적이 있다. 강독 세미나처럼 진행했고, 국내 지라르 전공자를 강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 덕에 지라르 저술을 쭉 읽어 봤는데, 상당히 흥미롭더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가 인류학이나 문화 분석의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라르는 문학 분석이나 인류학에서 시작해 인간 사회의 원형적인 구조, 상징체계를 다루고 점차 신학적인 성향이 강한 글을 쓰게 된다. 지라르의 후반부 저술도 의미가 있지만, 초반부 저술의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저술에서 인사이트가 많더라.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을 보면, 원초적인 폭력이 어떻게 희생양 제의로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인류학적인 내용인데, 문화 분석에 있어서 연결 고리가 많고 신학적인 인사이트도 많다. 지라르는 문화 분석이나 신학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을 책이다.

청어람 활동과 관련해서는 파장을 일으켰던 책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황우석 사태를 파헤쳤던 한학수 PD의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사회평론)가 있다. 보수·진보 지형을 넘어, 청어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발견했던 순간이었다. 당사자들을 초청해 북토크를 진행했고, 책을 매개로 (청어람은) 기독교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독특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 청어람 이후 독자 입장에서 저자 입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단독 저서로 <다시 프로테스탄트>,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이매진 주빌리>가 있다. 책 쓰면서 참고한 저술이 있을 텐데.

단행본 수준으로 내용을 만들려면 평소에 그만큼 축적돼 온 것이 있거나, 그것에 집중적으로 매달릴 기회가 생겨야 한다. 내가 썼던 <다시 프로테스탄트>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선행 공부나 준비가 있었던 경우다. <이매진 주빌리>는 출판사에서 먼저 의뢰를 받아서 쓴 책이다. 전혀 낯선 주제는 아니었지만, 혼자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주제다. 주어진 시간에 어느 정도까지 써 볼 수 있겠다 싶어 공부해서 책을 냈던 케이스다.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선행 연구 외에 데이터로 쓸 만한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존에 연구했던 이들의 자료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갖고 있었던 생각을 하나로 엮어 내는 과정이었다. '가나안 성도' 논의에서는 현상 분석 외 교회론 테마가 많았다.

교회론 주제 안에서도 루터나 존 밀턴, 한국에서는 무교회주의 김교신, 그 다음에는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일련의 흐름들. '디보치오 모데르나'라는 중세 신앙 운동을 비롯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내용을 같이 묶어 냈다. 김교신 선생과 관련해서는 백소영 교수 책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가 많이 도움이 됐다. 다 해당 분야에 대한 나름의 공부가 바탕이 된 것이다. 한두 권 꼽기는 어렵다.

- 일반 기독교인이 읽을 만한 책 몇 권만 추천해 달라.

허허허, 글쎄 뭐가 있을까. 점점 책 추천하기가 힘들어진다. 사람마다 많이 다를 것 같다. 표준적으로 알리스터 맥그라스 저술을 추천할 수 있겠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맥그라스가 어떻게 썼는지 살펴보면 크게 빠지지 않는다. 표준적인 이해를 먼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해당 분야를 섭렵해야 하는 것이니까.

요즘에는 톰 라이트 저술이 국내에 거의 다 번역돼 있으니까 톰 라이트 책을 읽어도 되겠다. 톰 라이트는 비교적 자신이 쓴 분야에 대한 후속 읽을거리를 열어 주는 스타일이다. 톰 라이트 책도 도움이 되겠다. 이후로는 독서가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겠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톰 라이트, 유진 피터슨 정도면 무난하게 관심 있는 분야의 독서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 인터뷰에 나온 도서 목록

양희송 대표가 쓴 책

1. <다시 프로테스탄트> / 양희송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2.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펴냄
3. <이매진 주빌리> / 양희송 지음 / 메디치미디어 펴냄
4. <묻고 답하다> / 양희송·강영안 지음 / 홍성사 펴냄
5. <무례한 복음> / 양희송 외 지음 / 산책자 펴냄
6.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 양희송 외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7.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 / 양희송 외 지음 / 홍성사 펴냄
8. <한국 교회 제자훈련 미래 전망 보고서> / 양희송 외 지음 / IVP 펴냄

양희송 대표가 언급한 책

1. <꼬방동네 사람들> / 이동철 지음 / 현암사 펴냄
2. <인간 시장> / 김홍신 지음 / 해냄 펴냄
3. <야훼의 밤> / 조성기 지음 / 홍성사 펴냄
4. <사람의 아들> / 이문열 지음 / 민음사 펴냄
5.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찰스 쉘돈 지음 / 조항래 옮김 / 예찬사 펴냄
6. <최후의 유혹>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펴냄
7. <서울의 예수> / 정호승 지음 / 민음사 펴냄
8. <나를 따르라> /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9. <성도의 공동 생활> /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10. <온전한 그리스도인> / 존 R. 스토트 지음 / 한화룡 옮김 / IVP 펴냄
11. <뒤틀려진 기독교> / 자끄 엘륄 지음 / 이상민·박동열 옮김 / 대장간 펴냄
12.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 브라이언 왈쉬·리처드 미들턴 지음 / 김기현·신광은 옮김 / 살림 펴냄
13. <폭력과 성스러움> / 르네 지라르 지음 / 박무호·김진식 옮김 / 민음사 펴냄
14. <삼성을 생각한다> /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펴냄
15.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펴냄
16.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 백소영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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