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격동의 시대였다. '전태일'로 대변되는 1970년대, '5·18'로 대변되는 1980년대, 엄혹했던 한국의 현실에서 민중신학이 싹텄다. 민중신학 1세대 안병무 교수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오클로스(Ochlos, 무리)'에 주목했다. 민중신학은 자기 언어가 없는 이들을 조명했다. 약자를 옹호하는 신학이었다. 기득권과 결탁한 한국교회가 개인주의 신앙에 매몰돼 산업화와 함께 성장 일로를 달릴 때, 민중신학자들은 불의에 저항하며 한국 역사 속에서 '오클로스'였던 민중 편에 섰다.

'세월호 시대'로 명명되는 오늘날 현실에도 민중신학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다수 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현실 앞에서 침묵했다. 아직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민중신학의 길에 들어서서 30년 활동해 온 사람이 있다.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이다. 그는 왕성한 글쓰기로 유명하다. 1년에 120여 편의 원고를 쓴 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대형 교회와 기득권 체제를 비판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에 주목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는 본래 민중신학과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 제자선교회(네비게이토에서 분립한 선교 단체)에 몸담았다. 강고한 복음주의 체계 속에서 살았다. 당시 그의 일상은 전도와 성경 읽기로 점철됐다. 그러한 열정은 독선과 아집을 키웠고, 그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선교 단체에서 가르치지 않은 다른 일들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신학의 길이었다. 더욱이 '전투적 복음주의자'였던 그가 정박한 곳은 '민중신학'이었다. 복음주의자가 어떻게 민중신학자가 될 수 있었는지, 민중신학자로 살아오면서 그에게 전환점을 가져다준 책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합정역 근처 빨간책방에서 4월 18일 김진호 연구실장을 만났다. 그는 태극기 집회를 '박근혜 메시아니즘'의 틀에서 읽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김진호 연구실장을 빨간책방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현선

- 독서가들은 저마다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있더라. 어떻게 해서 책 읽는 습관을 갖게 됐나.

사실 나는 어렸을 때 책 읽는 조건이 좋았다. 아버지가 글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일로 성공하지 못했어도 책이 많았다. 정작 나는 아버지를 안 좋아해서 책을 안 봤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아주 튼튼했다. 그 시절 나는 몸을 쓰는 놀이에 몰두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거칠었다. 지금은 산책로로 조성됐는데, 신촌 로터리 서강대 건너편 쪽 철길을 따라가면 내가 살던 집이 있다. 그 동네에서 패싸움을 많이 했다. 아주 거친 아이들이었다. 그 시절, 우리 동네가 패싸움에서 많이 이겼다. 나는 몸집이 컸다. 지금 키가 국민학교 다닐 때 키다. 몸집이 크니까 싸움도 항상 잘했다. 아이들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깡하고 몸집이니까.(웃음) 학교끼리 운동 시합을 하면 대표로 나갔다.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 때 병이 났다. 골수염을 앓았다. 골수에 염증이 생긴 것인데, 자칫하면 다리를 절단하게 될 수 있는 제법 심각한 질병이다. 다행히 조금 일찍 발견해 뼈이식 수술을 했고 이후 학교 체육이나 교련 시간에 열외였다. 골수염을 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때마침 우리 집은 이사 행렬이 시작됐다. 가난해서 집이 없으니까 이사를 많이 했는데, 자꾸 이사를 가니까 친구가 없어졌다.

고등학생 때는 간염에 걸려 6개월 학교를 안 나갔다. 그때는 간염이 흔치 않았다. 하루에 링거 2,000cc를 맞았다. 다 맞으려면 20시간 정도 걸린다. 20시간을 누워 있는 것이다. 한창 팔팔 뛰던 청소년 시기, 하루에 4시간만 움직일 수 있었다. 4시간 외에는 다 누워 지내니까 주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릴케 시집도 읽고, 이상이 쓴 소설도 읽고. 집에 책이 많아서 잡히는 대로 읽었다.

-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진학 후에도 자연스럽게 독서 습관을 이어 갔나.

대학생 때는 종교에 몰두했던 시기다.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갈려져 나온 강경 네비게이토 그룹에 속했다. 6년간 열심이었다. 독서가 죽었던 시절이다. 네비게이토에는 자기 증식 원리가 있다. 전도해서 6개월간 제자를 만든다. 한 사람이 2명을 맡는다. 그러면 그 2명은 6개월 후 4명이 된다. 이론상으로 그렇지만, 실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 한창 열정을 낼 때 내가 양육을 돕는 이가 70명에 달했다.

이러한 전도는 철저히 맨투맨 방식이다. 점조직 같은 거다. 집에 갈 때와 수업 들어갈 때를 제외하면 종일 함께 지낸다. 하루를 제자 훈련으로 채운다. 일요일에는 같이 예배와 성경 공부를 했다. 축제 때는 같이 기도원을 간다. 선교회는 공동생활을 권장하는데, 그럴 경우는 삶 전체가 공유된다. 이런 관계는 대학 졸업 후에도 이어지고는 했다. 초대교회처럼 공동생활을 목표로 하기에 종종 작은 기업을 만들어 동업자로 일하기까지 한다. 나는 졸업 후 선교회와 연을 끊었으니, 일터 공유까지는 하지 못했다.

이러한 조직 형태에서 모임 내 갈등이 생기면 치명적이었다. 리더가 되는 과정에서 독선과 아집이 강화되고는 한다. 혈기가 왕성하지만 지혜가 부족한 청년 리더들,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청년들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선교 단체에서 활동하던 6년간 3번이나 큰 분열을 겪었고, 그중 하나는 내 책임도 있었다.

싸움이 벌어질 때, 내가 수동적 입장이든 적극적 입장이든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의 빈 곳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채우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신학 공부였다. 겉으로는 신학 교수들을 회심시키러 간다는 명분이 있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궁금했다. 나의 간절함을 보상받고 싶었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인터뷰 내내 미소로 질문에 답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나는 사실 역사를 좋아해서 취향상 문과를 갔어야 했는데, 내가 고등학생일 때 국가가 공대를 육성했다. 교사에게 여러 번 회유와 협박을 받으면서(웃음) 이과를 선택했는데, 그나마 수학을 잘했다. 그래서 대학교는 수학과로 진학했다. 좋아서 가지 않았지만, 수학으로 밥벌이를 했다. 당시 나는 학원 선생으로 제법 수입이 괜찮았다. 당시에는 돈 버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대학 다닐 때 점심 먹을 돈도 없고 차비도 없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신학대학원 시절은 편안했다.

그때가 한국 청년이 가장 진보적이던 1986년이었다. 내가 다닌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그 시기 아주 절정이었다. 동급생끼리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는데, 신학 공부 모임은 없었고 사회과학 공부 모임만 있었다. 그러다 유일한 신학 공부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게 민중신학 모임이었다. 그때까지 '민중신학'이라는 말만 들어 봤지 뭔지 몰랐다.

1년 마치고 겨울방학 때 공부 모임은 민중신학자별 공부 계획을 세웠다. 내가 맡은 사람은 안병무였다. 그 겨울에 안병무 선생 글을 있는 대로 다 찾아봤다. 그때 내가 본 글이 수백 편이었다. 그해 겨울에 나는 민중신학 연구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논쟁을 좋아한다. 학교에서 민중신학을 비판하는 강의를 하던 교수님이 두 명 있었는데, 그분들과 수업 내내 싸웠다. 당시에는 민중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비판을 하니까 반론하고 싶었다. 민중신학 논리가 아닌 유럽 신학의 논리에서 민중신학을 비판하기에, 나도 유럽 신학의 논리로 반론을 펴려고 공부를 했다. 그게 공부가 많이 됐다.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여러 방법이 있다. '나만의 독서법'은 같은 책을 3번씩 읽는 것이다. 첫 번째는 그냥 전체를 읽는다. 다만 읽기 전에 준비 작업을 한다. 목차를 손으로 옮겨 적는 것이다. 목차가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내가 읽는 부분이 어디인지 계속 확인하면서 읽는다. 책 내용 대부분이 이해되지 않아도 목차와 대조하면서 읽는다.

두 번째는 정독을 한다. 정독하면, 아무리 이해가 안 가도 한 번 읽은 것이라서 말은 익숙하다. 이렇게 읽으면 전체 흐름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저자를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다.

안병무 선생에게 공부를 배울 때, 그분의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책 읽지 마시오"였다. 책의 논리 안에 내가 들어가지 않고 책의 논리를 내 논리 안으로 끌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생은 내가 게임의 룰을 만들어 가서 얘기하면, 내 룰 안으로 들어와 대화했다. 당신 틀 속으로 데려가 어떤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해 가서 이야기하면 당신이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방식이었다.

책 읽지 말라는 말을 들은 학생은 다 도서관에 갔다. 막막하니까, 망망대해에서 붙잡을 것을 찾듯이 이것저것 쳐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누가 읽으라는 책'을 읽지 않고, 내가 찾아 읽게 되더라. 묻고 싶은 주제에 매달려 책을 읽었다. 책 읽는 시선이 주체적일 수 있었다. 저자가 뭘 말하는지보다 내가 이 책으로 어떻게 생각할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읽으니 저자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 '인생의 책'을 소개해 달라.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서남동 목사가 쓴 책이다. 이 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시 서남동 목사, 안병무 선생 글이 프린트되어 돌아다녔다. 복사한 것을 또 복사하고 또 복사했다. 요즘 복사기는 건식이지만 옛날 복사기는 습식이라 3번 정도 복사하면 종이가 새카매졌다. 고고학자가 땅속 유물을 발견하면 유물에 묻은 때를 조심스럽게 털어 낸다. 그런 고고학자같은 자세로 보일 듯 말 듯한 글을 읽었다. 당시 민중신학 프린트물이 꼭지별로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민중신학 텍스트를 접한 사람만 수만 명이었다.

당시에 진보적인 책은 출간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들을 묶어 본드로 자가 제본해 책을 만들었고, 내용을 덧붙여 다른 복사물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복사물로 떠돌았던 것이 바로 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탐구'였다. 나중에 서남동 목사 것만 모아서 묶어 책으로 나왔다. 그게 바로 이 책이다.

공식 출판물이 된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책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출판물 이전에 떠돌던 담론 형태로서의 텍스트야말로 당시 독서 대중이 추구했던 진정한 민중신학의 탐구였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청년들이 느낀 어떤 혼란과 문제의식을 해명해 보고자 했던,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사투의 결과물이다. 출판물 <민중신학의 탐구>는 담론 현상으로 회자됐던 '민중신학의 탐구'의 한 결실인 것이다. 이 담론 현상으로서 민중신학의 탐구가 바로 나의 민중신학 출발점이 됐다.

그때는 꼭지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그중 하나를 얘기하라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서남동 목사의 글을 들겠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초점을 두지만 서남동 목사는 강도 만난 사람에 주목한다. 사마리아인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고 강도 만난 사람은 고통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선행을 베푼 사람이 구원자가 아니라 고통당한 사람을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민중신학적 사유다. 생각 지평을 열어 놓는다.

김 연구실장이 가져온, 전환점이 된 책들. 뉴스앤조이 현선

두 번째 책이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다. 안병무 선생 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안병무 선생 사고의 결정판이다. 대담집이다. 1986년 겨울쯤인가부터 이 책 작업이 시작된다. 난 당시 신학도에 지나지 않아 (책 출판 정황을)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았다. 안병무 선생이 1970년대에는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1980년 가을 두 번째 구속이 된다. 그때 건강이 악화됐다. 1986년쯤에는 다들 안병무 선생의 죽음을 생각했다. 건강이 안 좋아 글을 쓸 수 없었다. 손이 떨리니까. 읽는 것도 어려웠다. 심장 문제였다.

안병무 선생이 글을 쓸 수 없으니까 제자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로 비서 일을 했다. 안병무 선생이 구술하면 받아 적었다. 받아 적은 것을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이 문장을 만들어 글로 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안병무 선생님이 말을 하게 해야 한다"라며 대담을 기획했다. 제자들끼리 미리 모여 워크숍을 하면서 대담에 대한 '아웃라인'을 잡는다. 그 후 만나서 일대다의 대화가 시작됐다.

안병무 선생 신학 베이스에는 실존주의가 있다. 한국 지성사에서 실존주의는 굉장히 과학적 언술이다. 서양 지성사에서 실존주의는 반과학주의라 할 수 있는데, 한국 지성사에는 과학적 언술로 수용된다. 그런데 안병무 사유에서 실존주의는 내면 문제와 직면한다. 실존주의 본원적 문제의식에 다가선 것이다.

그가 실존주의에 입문할 무렵이 1950년대 초였다. 월남한 그는 반공청년단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공청년단이 추구했던 그런 반공주의도 싫었다. 그렇다고 선생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당시 경합하던 거대한 두 지배 담론에 속하지 않은 제3자였던 셈이다. 그의 밖에서 벌어진 지배 담론에 휩쓸릴 수 없었던 '내적' 고민들, 내적 동요가 그를 실존주의로 끌고 갔던 것 같다.

실존주의자로서 안병무 선생 여정에서는 문화적 세팅, 사회적 세팅에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안병무 신학은 소통 지향적이다. 사회, 문화, 대중, 그리고 그 자신이 각기 말을 걸고 듣는 것이 그의 전 생애를 꿰뚫는 신학의 중심축이었다. 한데 건강 때문에 말을 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담이 시작되자 새로운 상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질문에 대답하도록 해 보니까,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과 다른 형태로 소통이 일어났다. 그전까지는 대화 상대가 안병무 머릿속에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제 자신에게 직접 묻는 것이다. 질문이 대답을 만들더라는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병든 노년의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지금까지 격동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도 없이 했을 사유 실험을 통해 구현해 온 실천적 신학보다도 더 파격적인 신학 실험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논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논점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기성 신학에 대한 그의 급진적 신학을 더 극한적으로 밀어붙여 질주하듯 사유의 끝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나는 안병무 민중신학 시기를 구분할 때 '긴 1987'이라는 말을 쓴다.

책으로 출판된 것은 좀 더 나중이지만, 1987년에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후 안병무 민중신학은 이 책에서 시작한 민중신학적 분열, 극한적 실험의 문제 틀에서 스스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런 논점은 다시 역으로 돌아가 그 이전의 민중신학 논점들을 재해석하는 시선적 준거가 되어 안병무 민중신학 전체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한 '긴 1987'이라는 말의 의미다.

안병무 선생이 <역사와 해석>(한국신학연구소)이라는 책을 1970년대 초에 썼다. 신학 서적 중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일 것이다. 고전 중에 고전이다. 당시 진보 청년들은 거기서부터 생각을 시작했다. 일종의 성서 입문서다. 그 책 머리글에 보면 "성서는 고전이다"라고 규정했다. '고전'이라고 성서를 정의하면 '경전'으로서 성서관은 해체된다. 성서가 동서양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텍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책이지 독점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주장만 해도 파격적이다.

그런데 <민중신학 이야기>를 보면, 성서는 고전이 아니고 '민중의 책'이다. 고전이라는 말 속에는 그 말을 한 이의 권위가 담겨 있다. 그는 당대의 언어 그리고 후대의 언어까지 지배하는 사람이다.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지배적 언어, 모든 사람이 진리라 생각하는 가치의 정점에 고전이 있다. 고전은 일종의 소통의 중심이다. 그런데 삶이 고통스러워도 자기 고통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중이다. 안병무는 이들을 실어증에 걸린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언어가 없으니 타인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타인의 언어는 고전에 들어 있는 언어다. 민중은 책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책으로부터 소외되고 책의 노예가 되는데, 그런 이들이 자기 언어로, 자기 삶이 녹아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복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안병무는 그것을 '민중의 이야기'라고 했고 그 양식은 유언비어, 즉 루머라고 했다. 김용복 목사님은 이를 '민중의 사회 전기'라고 규정했다.

이런 민중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 채록된 결과물이 마가복음이다. 나아가 성서 전체에는 민중의 사회 전기로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담겨 있다. 그 시각에서 성서를 읽으면, 성서는 새롭게 말하기 시작한다. 안병무는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를 민중의 책으로 규정한 것이다.

'민중의 책'은 민중이 만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민중으로서 주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말했듯이 마가복음이 그렇다. 안병무 선생 가설에 의하면, 예수라는 이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장면을 보고 분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오클로스'라 지칭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클로스'가 나오는 마가복음 문맥을 보면, 세리, 병자, 거렁배이, 매춘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주체도, 어떤 마을의 주체도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속해 있지만 속해 있지 못한 자, 그러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 특징이 있다. 언어 붕괴를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표현할 자기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더듬고 어눌하게 말한다. 그것이 심한 이는 아예 말을 못한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처럼. 이들을 지칭하는 마가복음 용법이 '오클로스'다. 성서에는 '무리'라고 번역됐다.

이들은 예수가 죽은 상황에서, 예수를 죽인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따로 갈릴리로 갔다. 이들 오클로스들은 자기 삶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경험을 해석할 능력이 결여된 자들인데, 예수의 죽음 앞에 더욱 심각한 상황에 놓였다. 그들은 트라우마에 빠져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되었다. 그런 그이들이 좌절에 빠져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머릿속, 몸속에 간직돼 있던 예수에 대한 기억의 흔적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하다 보니 '나도 이런 기억이 있었어'라고 하면서 이야기들이 나왔고, 이 이야기들이 회자되다가 하나로 모아졌다. 이렇게 예수 내러티브가 만들어졌다. 이 내러티브 형식은 이야기체다. 체제가 금지한 언어, 그럼에도 대중 사이에서 마른 풀에 불붙듯 퍼져 나가는 이야기, 즉 유언비어(루머) 형식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 내러티브다. 이렇게 루머를 채록한 예수전이 바로 마가복음인 것이다. 안병무는 그렇게 본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예수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 제기다.

마가복음은 민중, 오클로스들이 이야기하면서 만든 것이다. 예수와 오클로스가 서로 소통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예수가 없으면 예수 이야기도 없었지만 오클로스가 없으면 예수도 없었다. 민중이 책 저자이기도 하고, 저자인 민중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스스로 구원받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을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고전으로서 성서를 해체하는 문제 제기다.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안병무 선생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성서론에 균열을 내고 있다.

그 다음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나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글들을 1980년대 후반부터 읽기 시작해 1990년대 초 왕성하게 읽었다. 벤야민은 독일 부르주아 집안 자제였다. 유대인이었고 불온한 시대를 만나 어렵게 살았지만 이 사람 자체가 시대와 화해하기 어려운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의식이 너무 앞섰고, 그러다 보니 그 시대에 환영받지 못했다.

나도 글을 써서 먹고사는데, 내 원고료는 항상 노동량에 비해서 적다. 항상 쪼들린다. 벤야민도 마찬가지로 쪼들리는 돈으로 사는데, 다른 노동을 안 하니까 아버지가 지원을 끊는다. 그리고 유대인 집안이라 나중에는 지원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부족한 돈으로 생활해야 하니 가계부를 쓰게 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수입이 적은데 기본적으로 쓸 곳이 많으니까 정말 적은 액수까지도 가계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벤야민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더라.

벤야민이 원고를 보냈는데, 원고를 읽은 쪽에서 글을 고쳐 달라며 지적질을 하는 것이다. 지적질을 받으니 자존심이 상한다. 벤야민은 못 고치겠다고 거절하는데 살길이 막막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당신 지적이 참 옳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원고를 고쳐 다시 보낸다. 그런 비굴함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글을 써 갔는데 계속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다 국가사회주의가 독일을 지배하면서 독일에 있을 수 없으니까 프랑스로 오게 된다. 당시 가장 첨단의 자본주의적 장소였던 프랑스 파리를 거닐면서, 파리 아케이드에서 자본주의의 극한성을 읽는다. 아무도 읽지 못하던 것을 그가 먼저 읽었다. 현대화된 자본주의, 소비자본주의로 옮겨 가던 1960년대 이후에나 사유할 법한 문제 제기를 1930년대 파리에서 했다.

그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집필 기획을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사회연구소로 보냈는데, 지원을 안 해 줬다. 그는 계속 혼자 사유하면서 노트에 기록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독일이 프랑스와 싸워 이기게 되자, 파리의 게토에 구금되고, 그곳에서 미국 망명을 계획한다. 그는 낡은 가방 하나를 들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어렵게 당도한 스페인의 국경 마을 포르브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때 그는 가방을 다른 망명자에게 맡기고 목숨을 끊는다.

그렇게 20세기 초에 살았던, 그러나 그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의 사유를 미리 담지한 시대의 예언자는 사라졌다. 어쩌면 그가 죽기 전날 맡겨 둔 가방 속에는 파리 아케이드 작업에 관한 연구 메모들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의 대표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작업은 그렇게 그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훗날 어떤 연구자가 그가 여기저기 메모한 것, 기고한 것, 기획안을 제출한 것 등을 토대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를 완성했다.

벤야민이 죽고 30년이 지나 서양에서 '벤야민 르네상스'가 일어난다. 소비사회를 겪으면서 일어난 성찰이, 소비사회에 대해 더 먼저 사유했고 문제 제기했던 벤야민까지 올라간 것이다. 나는 30대 초 무렵 혼란의 시기에 벤야민을 읽었다. 우리는 1980년대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1980년대 민중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중신학이었다. 그 당시 문제의식은 '어떻게 민중신학으로 변혁을 이루어 낼 것인가'였다. 대안적 체계에 대한 구상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절 우리가 도달했던 것이 '절망'이었다.

이제 우리는 진보가 실패했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왜 실패했는가. 한편으로 그 시기의 좌절감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동시에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3세대 민중신학으로 나온다. 대답을 준비하는 데 벤야민이 도움을 줬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보는 보수와는 대립하는 가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보수와 진보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진화에 대한 사유에 갇혀 있었다. 그런 진화주의적 사고의 감옥을 넘어서는 일이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역사의 단절을 사유하는 것이다. 안병무 선생은 그것을 '단(斷)'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언어의 질서, 그 지배적 언어에서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듣고 구원에 대한 상상을 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3세대 민중신학의 문제 인식이었다. 문제 인식에 도달하는 데 벤야민을 참조하는 것이 유효했다.

1990년대는 미셸 푸코가 우리 사회에서 한참 읽히던 시절이다. 제임스 밀러가 쓴 <미셸 푸코의 수난>(인간사랑)만큼 푸코 해석을 잘 소개한 책이 없다. 미셸 푸코 평전 가운데 진수 중의 진수다. 푸코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 보면 아주 좋은 책이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미셸 푸코가 자기 사유를 펴기 위해 행동까지 극한화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문제를 접하면 그 문제를 최후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는 끝까지 사유한다. 나는 이 책이 순례자로서 푸코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민중신학 글쟁이로서 푸코처럼 써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내 글쓰기 태도, 민중신학적인 저자로서 삶의 태도에 좌우명이 되었던 책이다.

- 글쓰기가 왕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글은 술술 나오는 편인가. 글쓰기 태도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해 준다면.

나한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 '글쟁이'다. 그런데 글쟁이의 삶은 아주 고통스럽다. 1990년대 프랑스 <르몽드>지 커버스토리에 한 일러스트가 실린 적이 있다. '저자의 부활'이라는 주제였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왕성해지면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테마가 나왔는데, 당시 잡지에서 '저자의 죽음'을 넘어서 이제는 '저자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러스트에는 한 작가가 그려져 있었다. 펜에 실이 연결돼 있고, 그 실이 작가의 머리와 연결돼 있었다. 두뇌가 실타래인 셈이다.

'저자의 죽음'이 아니라 저자가 다시 글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일러스트였을 텐데, 나는 그것을 다르게 봤다. 사람이 글을 쓰면서 자기 안에 있는 뇌세포들을 계속 죽이는 것이다. 생명을 조금씩 죽여 가면서 글을 쓰는 것이다. 내 글 쓰는 스타일이 딱 그렇다. 자학적이다. 나를 괴롭혀야 써진다. 극한까지 몰아붙여 내 사고를 발본적으로 뒤엎어야 한다. 극한으로 간다.

나는 글을 꼭 연애편지처럼 쓴다. 연애편지 쓸 때 '썼다 지우고' 하지 않나.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에 간직했던 사유 덩어리들이 하나씩 지워진다. 그렇게 끝없이 자기를 해체하다 보면 내가 준비했던 내러티브로부터 내가 비워지는 순간이 온다. 내가 무너진다. 그렇게 예상 못 한 쪽으로 글이 간다. 그 순간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 같다. 내가 글을 쓰는 주체가 아니라 글이 나를 쓴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가 힘들다. 충분히 괴로워야 글이 나오니까.

수백 고개를 넘어야 한다. 글쓰기는 나에게 순례의 과정이다. 순례는 진리를 찾아가는 것인데, 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진리에 이르고자 사력을 다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겨우겨우 어느 곳에 정박했는데 도착한 곳에 진리가 없다. 그러면 다시 낙망한 마음으로 짐을 싸들고 길을 떠난다. 그렇게 글을 쓴다.

1997년에 IMF가 찾아왔다. 나는 그 무렵 기독교를 떠나려고 했다. 있을 데가 없었다. 아예 신학을 그만두려 했는데, 1990년대 말에 계간 잡지 <당대비평>에서 편집위원과 주간을 맡게 되는 기회가 왔다. 2000년대 초까지 그 잡지를 하면서 한국 사회 담론의 중심에 가 봤다. 글쟁이와 기획자들의 사투를 본 거다. 거기서 많이 배웠다. 그때 내 사무실에 붙인 것이 마르셀 뒤샹의 크로키다. '뙤약볕 속에 달리는 견습생(Avoir l'apprenti dans le soleil)'이라는 그림이다. 그때 내가 견습생인 것을 알았다. 글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글은 소통하기 위한 것이고, 내놓는 순간 내 것이 아니라는 태도로 바뀌었다. 나도 남의 글을 농락하듯이, 독자들도 내 글을 마음대로 농락하라고 글을 쓰는 것이다.(웃음) 농락 소재가 될 수 없는 책은 죽은 책이다. 소통할 수 없는 글을 종이에 써서 생명체를 훼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기보다 읽을 수 있는 주제와 형식, 문제 제기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나에게 숙제다. 그전에는 고투의 산물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계몽적인 군주처럼. 옛날에는 내 별명이 '김각주'였다. 각주를 너무 넣는다고. 이제는 웬만하면 안 넣는다. 넣어도 설명주 중심으로 넣는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크로키. '뙤약볕 속에 달리는 견습생(Avoir l’apprenti dans le soleil, 1914년作)'.

- 푸코 이후 읽은 책 중에는 어떤 책이 인상 깊었나.

<사회적 고통>(그린비)이다. IMF 체제를 지나면서 민중신학자로서 내가 다가간 주제는 '고통'이다. 흔히 민중신학자들은 '고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 속에는 고통이 성화되어 있다. 그런데 IMF를 겪으면서 나의 고통과 나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에 놓인 이들의 고통을 절절히 살펴보게 되었다. 고통에 품격은 없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고난'이라는 버터가 칠해진 빵같은 말이 아닌 '고통'이라는 날것의 느낌을 살리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때 이 책이 '고통'을 읽는 데 도움을 줬다.

당시 나는 <당대비평>이라는 인문 사회 비평지 편집위원과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일종의 지식기획자로서 일을 했는데, 고통의 현장을 찾아가는 연재를 계속했다.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담론화할 것인가 고민했다. 당시 내가 했던 작업 중 하나는 노숙인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성서가 아닌 거리에서 '오클로스'를 마주 대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작업이었다.

그 사람은 IMF 직후 몰락을 거듭하다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하던 사람이었다.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횡설수설하는 것이다. 했던 얘기 또 하거나 질문과 다른 답을 하더라. 그 사람이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나는 텍스트를 생산해 내야겠다는 과제를 안고 갔는데, 텍스트를 생산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하다가 그 사람이 살았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깜짝 놀라게 됐다.

보니까 이 노숙인은 자기 아내와 자기 아들을 집에서 가혹하게 두들겨 패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정 폭력 가해자였다. 동네 사람도 다 알고 있었고, 동네 사람이 다 그 사람을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민중을 증언하려 왔는데 내가 증언하는 민중이 가정 폭력 가해자였던 것이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막막하더라. 그런 고민 속에서 2000년대 초 나의 민중신학이 '고통을 읽는' 쪽으로 가게 된 거다. 그렇게 고통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 가던 시기에 이 책은 중요한 전거가 됐다. 2008년에 내 사고가 민중신학자로서 절정에 있었다고 자평한다. 그 무렵 이 책을 포함해 고통에 관한 여러 연구를 접했다.

<전장의 기억>(이산)도 비슷한 시기에 읽었다. 도미야마 이치로라고 하는 오키나와학 권위자가 쓴 책이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복속돼 있다. 오키나와라고 하면 누구나 다 일본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키나와인은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나 일본인이 아니다. 세컨더리에 있는 셈이다. 성서로 치면 에돔 족속 같은 입장이다. 우리 사회로 말하면 '비정규직'이다. 직원이면서 직원이 아닌 존재다.

이들은 선망하면서 배제되는 입장에 놓인다. 그런 문제를 다룬 책이 <전장의 기억>이다. 일종의 포섭과 배제 문제를 다룬다. 오늘 우리 시대 민중의 고통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현장에서 고통이라는 사유를 하면서, 그것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거가 됐다.

-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특별한 계획은 없다. 지금 쓰고 있는 것 하나가 태극기 집회에 대한 글이다.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무렵 한국 사회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나도 그 논의에 참여했는데, '박정희 메시아니즘'에 관한 것이었다. 박근혜 집권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콘크리트 지지'다. 박근혜에 대한 견고한 지지 현상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권위주의의 부활처럼 일어났다.

몇몇 학자는 신권위주의가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했다. 구권위주의는 군주제 같은 권위주의를 말하는 것이고, 신권위주의는 박정희 체제 같은 근대적 발전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을 다룰 때 종종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신권위주의는 명료한 권력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 권력의 명료한 중심으로서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회 각 분야 테크노크라트의 충성 경쟁 아래서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집중 투여해 경제성장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을 때 신권위주의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여기에 반론을 폈다. 박근혜 정부는 신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라는 말이 적합하다는 지적이었다. 박근혜가 집권할 때 법률 권력과 군부, 재계, 학계, 언론계가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다. 이것은 마치 신권위주의 체제의 부활처럼 보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 법률 권력의 핵심은 로펌이다. 로펌은 사기업이다. 사기업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반할 수 있는 조직이다. 그러니까 명료한 중심이 있다는 착시를 일으킬 뿐 명료한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탈중심적 중심성이라는 용어를 썼다. 탈중심적 중심성을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 체제,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라고 주장했다. 신권위주의 체제는 견고하지만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는 견고하지 않다. 결국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졌다. 박정희 메시아니즘은 1997년에 담론으로 등장한다. 그때부터 죽은 박정희를 하나의 담론으로 한국 정치에 녹여냈다. 이인제나 김대중은 박정희와의 연관성을 만들어 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제2의 박정희를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회창도 부활한 박정희 중 한 사람이었지만 다 실패했다. 그러다 정박한 곳이 박근혜다.

'예수 부활'이 정착해 하나의 세력이 만들어진 곳이 예루살렘교회다. 예루살렘교회는 혈통주의적이었다. 그만큼 혈통주의가 강하다. 박정희도 혈통적 후계자에게로 권력이 재구축된 것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중요한 축이 메시아니즘적 대중이다. 지금 이게 뿔뿔이 깨졌지만 일부 남아 있다. 태극기 집회로 그 현상이 나타난다. 이 태극기 집회를 '박근혜 메시아니즘' 틀에서 읽는 것이 내 숙제 중 하나다. 그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을 해 왔는데, 좀 더 긴 글로 쓰는 것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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