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20대 때 할 일이 없어서 시립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는 사람이 있다면 믿겠는가. 심지어 마르크스 <공산당선언>(책세상)은 756번 읽었다고 한다. 수십 번 읽어도 횟수를 따지기가 쉽지 않을 텐데, 756번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횟수에 놀랐다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잠깐, 이 사람 진짜 공산당 아냐?'

주인공은 바로 <뉴스앤조이>에 소설 '나쁜 하나님'을 연재하고 있는 소설가 주원규 목사(동서말씀교회)다. 그는 곡절 있는 인생을 살았다. 일진의 '빵셔틀'이었고, '운이 좋게' 지방대 공대에 붙었으며, 긴 방황의 터널을 지나 소설가로 등단했고 같은 해 목사가 됐다. 이미 그의 지난 삶은 두 차례 인터뷰 기사로 소개한 바 있고, 그의 자서전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텍스트)에는 그 깊은 이야기가 상술돼 있다.

20권이 넘는 책을 썼고 소설, 에세이, 칼럼, 평론 등 다양한 분야 글쓰기를 통해 왕성한 필력을 뽐내고 있는 주원규 목사. 2월 15일, 경기도 일산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1주일 뒤 영화 '사일런스' 대담 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물론 차후 영화를 만들 생각까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팟캐스트 '문학의신'과 무비 콘서트 '문화횡단'을 진행하고 있고, <뉴스앤조이>와 <한겨레>에서 연재를 맡고 있으며 <마이트웰브> 등에도 꾸준히 글을 올린다.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팟캐스트에서 매주 꾸준히 책을 소개하고 있는 그에게서 '책과 인생'을 듣는다. 주 목사는 팟캐스트 '문학의신' 1, 2화 방송 때, 자신의 '인생의 책' 8권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익히 들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시립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 읽었다"는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익숙한 책부터 듣도 보도 못한 책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그는 9년째 성서 원서 강독을 하고 있을 만큼 '성서 마니아'인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주원규 목사를 경기도 일산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현선

성서가 어떤 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원규 목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띄운 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나한테 성서는 신앙의 책이다. 나의 생활이나 삶, 사상, 모든 면에서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답했다. 한국교회에 '해체'라는 처방을 내리는, 어떤 면에서는 단호박 같은 그가 성서를 '인생의 책'으로 꼽는 것이 의뭉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진지했다. 성서 읽기, 원서 강독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줬다.

인터뷰를 하면서 수십 권의 책 이름이 나왔지만 그가 문학의신에서 다룬 책들은 될 수 있으면 제외했다. 대신 독서 태도와 성서 이야기를 주로 풀었다. 1시간여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했다.

- 독서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안다.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있나.

중고등학생 때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책은 몇 권 있었지만 당시를 독서의 시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미진하다. 얻어걸리듯 지방에 있는 대학교 공학대학을 들어갔는데, 공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 싫었는데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그냥 틀어박혀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봤다. 돈 안 들이고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방법이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이더라.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어릴 때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있었다. 그것이 습관으로 남았는지 하나를 진중하게 하는 게 안 되더라. 그래서 여러 일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게 습관이 됐다. 주로 야구를 보면서 책을 같이 읽는다. 야구를 보면, 투수를 교체하거나 1회 초나 1회 말이 끝날 때 잠깐의 틈이 생긴다. 그때 책을 빨리 읽고 다시 야구를 본다.

야구는 거의 광적으로 찾아보는 편이다. 국내 리그를 비롯해 멕시코 리그까지 본다.(웃음) 그리고 책을 빨리 읽는 편이기도 하다. 빨리, 많이 읽는다. 자랑은 아닌데, 20대 때 할 일이 없어서 당시 시립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속독하는 습관을 익힌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의 독서법이 있을 텐데, 나는 책 전체를 다 읽지는 않는 편이다. 좋은 습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전체보다는 나한테 맥이 맞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읽는다. 차례나 제목을 봤을 때 강렬하겠다 싶은 부분을 읽는다. 꽂히는 책,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읽게 된다. 보고 또 본다. 뒤로 봤다가 앞을 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으로 읽는다.

- 주로 어떤 책을 읽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 다만 자연스럽게 안 읽게 되는 책은 있다. 자기 계발서는 정말 필요 없는 책이 아닌가 싶다. 상업적 내용을 떠나서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 자체에 생리적 거부감이 있다. 기승전-자신으로 간다. 요즘에는 세련되게 내용을 푼다. 그래도 동어반복이 많고 의미가 소비되는 느낌이다. 국회의원이 낸 책도 못 읽겠더라. 대부분 자기 계발서와 자서전이다. 자기 홍보를 위해 쓴 책을 빼고는 구별 없이 본다.

거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뉴스앤조이 현선

-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영향을 준 책들을 시기별로 소개해 달라.

내가 10대 때 정서적 파국을 겪었다. 외부적으로도 힘들었다. 10대는 물리적으로도 힘들 나이지만, 10대를 보는 한국의 사회구조적인 인식도 별로 좋지 못하다. 그래서 나만의 탈출구를 찾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한 독서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10대 때 인상 깊었던 책으로 이상의 시집 <오감도>가 있다. 시간을 때울 수 있는, 하이틴 로맨스로 알려져 있는 여러 문고판 책들이었다. 예전에 만화방에는 세로로 읽는 무협지가 있었다. 그런 무협지를 즐겨 읽었다. 시간을 보내는 책들인데, 나는 소위 '킬링 타임용' 책에 대해 긍정적이다.

잡문이나 만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저런 것을 왜 읽느냐"고 말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은 안 읽고 왜 저런 것을 읽느냐"고 말하는데, 나는 일단 어느 정도 활자에 중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사유 활동을 통해 인간을 가장 존엄한 지점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언어이고 문자라 생각한다. 잡문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자기 세계관, 하나의 시스템이 생기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10대 때 읽은 책이 나의 세계와 사상을 끌어 주는 밑바탕이 됐다.

20대 때 나는 IMF의 광기를 그대로 맛봤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익스트림하고 극단적인 책이 나를 사로잡았고 많이 와 닿았다. 그중 <공산당선언>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몇 번 읽었는지 세어 봤는데, 756번 읽었더라.(웃음) 그냥 낭독할 수 있을 정도다. 공산당이나 공산주의 이념에 찬동하기 때문에 읽었다기보다 이 사회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공산당선언>은 글을 쓰는 데도 영향을 줬다. 나는 문장을 쓸 때 가장 첫 문장에 힘을 주는 특성이 있다.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첫 문장에서 아예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고 들어가려는 <공산당선언>의 태도가 좋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본격적인 독서는 30대부터였다. 20대 때 속독해서 읽은 책들 중 기억에 남는 책들을 다시 찾아서 읽었다. 그중 나에게는 성서와 자크 데리다의 <해체>(문예출판사)라는 책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이외에도 좋은 책이 많다.

내가 좋게 읽은 책을 말하자면, 소설로는 아무래도 형체를 흩어 내는 듯한 작품이 좋다. 소위 표현하기를 반리얼리즘이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을 많이 찾아 읽었다. 저항적이고 도발적인 소설도 많이 읽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가 갖고 있는 치열함의 일관성이 좋더라. 그의 작품에 있는 주제 의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본 전후 세대의 아노미 상태를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제 의식에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천착할 수 있다는 것. 그 일관성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커트 보니것, 남미의 보르헤스 같은 작가의 책을 중시해서 읽었다. 커트 보니것 작품에는 잡탕의 통일성이 있다. 몇 억 광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완전히 판타지 같기도 하고 장르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데, 이것이 사회가 갖고 있는 근본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자극하고 드러내면서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 점에서 잡탕의 통일성이 느껴졌다. 커트 보니것 작품 중에는 <제5도살장>(문학동네)이 가장 압도적인 것 같다. 여기에는 21세기 현대사회 문제가 거의 다 담겨 있다. 전쟁, 기아, 이념, 종족 등이 농축돼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중간중간에 계속 환기하고 눙치고 넘어가는 익살스러운 태도가 드러나는데, 멋있더라.

보르헤스의 책에는 고고학적 탐색이 느껴진다. 고고학적 탐색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동시에 미니멀리즘에 대한 입장이 확고한 것 같다. 말을 최소화하고 분량 자체도 길지 않다. 그런 압축미가 주는 밀도가 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픽션들>(민음사). 단편이라 하기에도 미미한 작품들이 있는데, 그 작은 분량의 단편에 우주적 담론이 담겨 있다.

주 목사는 인터뷰 도중 소년 같은 웃음을 보였다. 뉴스앤조이 현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들이 느낄 수 있는 파릇파릇한 정서의 결들이 좋았다. 그래서 하루키 책을 많이 탐독했다. 한국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장정일 작가의 <아담이 눈뜰 때>(김영사), 하일지 작가의 <경마장 가는 길>(민음사) 등 주옥같은 작품을 읽었다.

철학 쪽으로는 아까 말한 자크 데리다의 <해체>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책이 강하게 와 닿았다. 나는 철학적인 책에서 평론이나 칼럼의 주제를 얻는다. 언어의 감각이나 정서적 고양을 철학책에서 많이 얻었다.

자크 데리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다. 그가 쓴 <해체>는 지금도 80%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번역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중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발적으로 해체하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다. 기성 현상이 갖고 있는 그들만의 도그마를 해체하는 것을 중시한다. 도그마를 해체해 가는 언어의 유희 과정, 그 정서가 나에게 강렬하게 와 닿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철학자 책을 많이 찾았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동문선)을 특별히 좋아한다. 크리스테바는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적 분과를 철학적 사조에 묻어 내기 위해 시의 언어 분석을 차용한다. 남녀 차이를 넘어 젠더의 직능적 차이가 아니라 젠더가 갖고 있는 고유한 다름을 지속할 수 있는 테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시라고 주장한다.

다른 책으로는 파스칼 키냐르가 쓴 <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가 있다. 키냐르의 <섹스와 공포>에는 그리스 문명의 찬란함 뒤에 숨어져 있는 인간의 추(醜), 인간의 추한 본성과 악의 심연에 대해 태무심하게 표현하는 문장의 황홀함이 있다. 사실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할 때 작동하는 기제 중 하나가 공포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엄하고 두려운 것이다. 율법의 작동에서 멀어질 때 그것을 처벌하고, 율법을 지키는지 감시하는 하나님 이미지가 고착화돼 있다.

키냐르 글은, 처음에 왜 이렇게 문란하고 잡스러운가 불경스럽게 느낄 수 있다. 그 언어의 결과 충돌 속에서 하나님이나 신에 대한 공포 이미지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 하는 데에 의문을 던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환기 작용이 있고 황홀하다 느꼈다. 문장이 유려한 편이고 미학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키냐르에 대한 절반의 해석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수사는 다른 작가가 더 잘하는 편인 것 같다. 아까 말했듯 인간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작동 기제를 무력화하는 데 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학의 역할이기도 하다.

하나만 더 말하면, 피에르 부르디외의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동문선).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첨예화한 계급의식을 정확히 환기해 줄 수 있는 책이다. 신자유 시대에 맞는 계층 분화의 현실을 담고 있다. 계급을 나누는 문제만이 아니라, 계급과 계급 사이의 불화를 예견한 측면이 있다. 국내만 해도 비정규직끼리의 경쟁이 있고, 20대들끼리의 무모한 경쟁을 조장하는 기성세대가 있다. 이런 내용이 예견돼 있다. 성서의 예언서, 묵시문학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책으로 느껴진다.

주원규 목사는 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좋아하는 시집으로,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문학과지성사),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를 꼽았다. 이에 대해서는 팟캐스트 '문학의신' 21, 22화를 참고하라. 뉴스앤조이 현선

- 30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읽어 온 책 중에는 인상 깊은 게 뭐가 있나.

성서다. 지금 이 나이에 성서가 중심이 돼서 부끄러운데.(웃음) 성경 원서에 어필되고 있다. 물론 원서가 도그마가 될 수는 없다. 킹제임스 버전을 둘러싼 논란처럼, 특정 성경 판본을 완벽하다거나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지점은 당연히 이해한다. 성서가 여러 편집의 역사를 거쳐 왔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한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에는 노자, 셰익스피어가 쓴 글도 원서 강독을 한다. 유독 성서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교회가 차용한 렉시오 디비나 전통에서도 원서 강독을 기피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원서를 많이 읽는다. 외경이라고 알려져 있는 책도 문학적 가치를 복원하는 태도로 읽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외람되지만 도마복음은 기독론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나는 도마복음을 정경 범주에 넣지 않는다. 정경에 대한 진리의 통일성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도마복음이 주는 인사이트가 있다. 당시 문화, 사회, 역사에서 말하는 예수에 대한 증언과 가르침 등이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히브리 문명이 동서양 문명은 아니다. 나는 서구 문명이 오히려 성서의 진의를 많이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도마복음에 나와 있는 아포리즘 같은 짧은 경구는 동양적인 정서와 비슷한, 고대 문명이 갖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를 복원하는 데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바울 텍스트를 신뢰하는데, 바울을 도그마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본다. 바울이 그 뜻으로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특정한 교리에 맞겠다 싶으면 악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로마서 13장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이나 동성애 문제가 그런 예가 되겠다. 입체적이고 상황적 이해 없이 바울의 글을 남용한다. 그런 것을 거둬 내고 예수의 맨얼굴, 민낯을 보게 하는 데 도마복음의 경구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도마복음의 짧은 경구를 예수의 말씀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의 정신과 교감한 그때의 공동체와 제자들이 남긴 글 안에 있는 제스처가 바울의 글을 환기하고 탈색하는 데 도움을 줘서 오용하지 않도록 기여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특히 바울의 말 중 생활 규범적인 문제. 약간 짜친 비유이긴 하지만 "술 취하지 말라"는 구절이 말하는 바가 정말 술을 마시지 말라는 얘기인지, "남색하지 말라"는 구절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지. 진의를 파악하는 데 도마복음이나 소위 말하는 Q복음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사실 바울이 사용한 레토릭의 복잡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는 성서를 읽는 태도 중 '쉽게 읽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의문이 든다. 흔히들 성서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시장에서 일하는 할머니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나도 동감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읽기의 차원에서 적용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하향 평준화다. ('쉽게 읽기'가) 사유의 무능이나 야만적인 맞춤법을 통한 단순화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말이 누구나 성경 말씀을 자기식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되면 안 된다. 이런 태도가 성경 읽기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원서 강독의 이유도 한 걸음 물러나 이 말씀이 과연 우리가 통념처럼 사용하는 내용 중 하나인지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로마서 13장 읽기를 예로 들면 '위에 있는 권세'가 어떤 권세를 지칭하는지, 그 당시 시대 상황은 어땠는지, 거리를 두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렵게 읽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서 강독을 전도사 시절, 2007년부터 해 왔다. 원서 강독을 하면서 2가지 놀라운 경험을 했다. 먼저 원서 강독을 하면 할수록 허무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인생의 무상함이나 덧없음 차원에서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더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긍정적인 힘으로서의 허무다. 원서를 계속 읽고 성서의 여러 국면과 마주할수록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바울도 생활 규범을 많이 남겼지만 그 목적이 흔히 말하는 어떤 삶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귀착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것이 허무의 영성이라 생각한다.

또 하나, 이 세상이나 성서 시대 세상을 복잡다단하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사회, 경제, 윤리적 컨텍스트를 볼 때, 어느 한 부분에 무게중심을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대마다 무게중심이 다르다. 그런 상호 편차가 성서 텍스트 안에 녹아 있다. 그럼에도 이를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지류, 바탕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흐른다. 내가 정경을 신뢰한다고 얘기한 것이 이런 통일성 때문이다. 흔히 신학자들이 말하는 통전적 통일성, 유기적 통일성이 이런 부분이 아닐까.

원서 읽기는 맥락적(contextual)·탈식민적(postcolonial) 시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위 단어 하나를 관주 성경 맞추듯이 여기 쓰였고 저기 쓰였고를 따지는 것이 '통일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장들을 읽으면 그 문장들 자체가 나타내는 상호 연계성이 있다. 원서를 읽을 때는 하나의 텍스트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다른 성경, 느헤미야에서는 이렇게, 미가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찾지 않고 그 텍스트 안에서 상황적 맥락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텍스트를 읽고 다른 성서 텍스트와의 상호 대화를 통해 통일성을 구현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당시 정황에서 텍스트의 엄밀성을 먼저 봐야 한다. 그 엄밀성에서 호소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렇게 상호 맥락과 사회적 맥락을 볼 때 성경이 탈권력적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께서 가난의 정신, 저항의 정신을 보여 주기 때문에 탈식민적일 수밖에 없다.

좀 과문하기는 하지만 로마서 13장의 경우도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오히려 반어법적인 게 아닐까 싶다. 위에 있는 권세의 무너짐에 대한 예견, 예언이 있다고 본다. 나쁜 의미라기보다는 조롱이 담겼다고 생각한다. 패스티시(pastiche)나 패러디(parody)의 움직임이 있다고 본다. 바울이나 로마서가 견지하고 있는 태도를 봤을 때는 '한번 복종해 봐라'식의 반문이 드러나는 것 같다.

나는 로마서를 읽는 당사자들이 이런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는 쪽이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이 또 하나의 질문을 남긴 게 아닐까. 예수도 그런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선인이 화두를 던지듯이 제자들에게 어떤 질문이나 맥락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울의 말이 일방향적 메시지 전달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렇게 단순한 메시지를 일방향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이나 그리스도인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하는 데 도움을 준 게 아닐까.

성경 말씀이 도화선 같다는 느낌도 든다.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했을 때, '바울 선생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지'라는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교회 조직 체계가 그렇지 않았을 거라 본다. 나는 그래도 초대교회의 조직 체계가 가장 인간 각자가 사유하기에 적합한 원형이 아니었을까 미루어 생각한다. 미국 교회나 한국교회처럼 교조적이고 주입적인 메시지 전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 목사는 성서 중에서 로마서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논리적인 면모가 좋다고 했다. 헬라어를 구사할 때, 당시 철학이나 무신론적 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치열하게 노력하고 치밀하게 단어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현선

나는 원어로 설교하는 목사들 행태에 문제가 많다고 본다. 한마디로 '권력 행사'다. 1970~1990년대 한국교회는 만인사제설을 견지하지 못했다. 목회자 위주로 갔다. 은사 위주 카리스마 목회자가 대두했다. 21세기에도 그 카리스마를 지속하려고 말씀을 그 방편으로 도구로 삼는 것 같다. 목회자가 '평신도인 당신들은 못 보지만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다'는 식의 권위를 내세우는 도구로 주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희극적으로 보인다. 이제는 어플만 받아도 다 찾아볼 수 있는데, 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금과옥조마냥 다룬다. 관주 성경이 보여 주는 해석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속사적 해석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해석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현령비현령으로 어느 구절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져다 붙이는 태도에는 함정이 있다. 구속사적 성서 해석을 주장하거나 선포하는 분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는다. 존경하지만, 그것이 목사를 권력자로 만들고 신자들도 그런 메커니즘에 길들여질 수 있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 학문적인 느낌으로 접근하지 말고 생활에 있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실용서 같은 느낌도 아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편리주의적 생각도 내려놓고 읽었으면 싶다. 이원화해서 읽는 것은 서구주의의 함정이라 생각한다. 일상적인 것이나 학문적인 것을 나눠서 접근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문학적 태도로 성서를 읽고 나눴으면 좋겠다.

또 성서를 원서로 읽을 생각이 있다면, 원어 주석 같은 것보다 문학책을 많이 읽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설가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주석이나 현대 신학의 공헌을 폄하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먼저 읽기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조금 난해할 수 있지만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 시 등의 문학류, 그 다음에 철학적인 책을 읽으면 좋겠다. 철학책은 다 읽기보다 읽고 싶은 것만 발췌해 읽는 것이 좋다고 본다. 철학은 그 특성을 향유하거나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추천하고 나도 이렇게 읽어 왔다. 드라마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막장 드라마라도 괜찮다. 아침 드라마 120회 안에 정말 놀라움이 있다.(웃음)

고전은 굳이 많이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전의 기법은 성경 속에 많이 녹아 있기에 겹친다고 생각한다. 사고를 배양하려면 현대물을 많이 읽는 게 좋다. 다만 독서할 때는 탈권력적 태도가 필요하다. 저자에 대한 동경, 경외를 버리는 게 좋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라다'라는 전제가 있어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자기 계발서나 위인전을 안 좋게 생각한다. 마치 어떤 생각이나 노하우를 전수받으려는 태도, 그들을 존경하는 태도가 탈권력적인 생각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탈권력적 사유 방식이 우리 안에 형성됐을 때 예수의 맨얼굴과 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을 처음 읽거나 혹은 새롭게 읽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큐티식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크다. 큐티에 긍정적 미덕도 많지만 함정이 있다. 적용의 함정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적용해 주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그런 큐티식 적용의 관점보다 자연스럽고 의문이 남으면 의문이 남는 대로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성경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면 거기에 물음표를 계속해서 쳐라.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 되는 부분도 그렇게 하라. 내가 느낄 때는 성경을 1독 한다고 하면 거의 90%는 물음표로 도배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다. 억지로 답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보면 답이 없는 것도 많다. 그것을 유보한 채로 읽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물음표 달기를 계속하면서 읽으면 효과가 클 것 같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어" 하면서 메모도 하고, 특히 다윗의 범죄를 보면서는 "이런 쓰레기"라고 적기도 하고.(웃음) 이런 방식이 좋지 않을까. 목사들은 답을 주려 하니까, 궁금한 게 있더라도 목사는 되도록 안 찾아가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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