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신학은 보수, 신앙은 자유'가 자신의 모토라고 했다. 러시아에서 9년간 문학을 공부했으며, '1880~1890년대 톨스토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이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논문을 썼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도 있었다. 최근 <고뇌가 없다는 것>(포이에마)이라는 설교집을 내놓았다.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 이야기다.

천 목사를 인터뷰한 이유는 단순했다.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러 모스크바까지 가서 학사·석사를 마쳤는데도 돌아와서 목사가 됐다.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교단을 탈퇴했다. 그의 설교나 칼럼은 거칠고 전향적이다. 예언자의 목소리를 닮았다. 그가 풀어놓은 독서 이력을 보니 이해가 됐다.

천 목사가 꺼내 놓은 책들 중 기독교 서적은 <프란시스 쉐퍼 전집>(생명의말씀사)이 유일했다. 강용준의 <유월에서 팔월 사이>(중앙일보)부터 고골의 <외투>(문학동네), <죽은 혼>(을유문화사), 톨스토이의 <부활>(민음사), 크리슈나무르티의 <완전한 자유>(청아출판사), 옌리에산·주지엔구오의 <이탁오 평전>(돌베게), 이탁오의 <분서>(한길사), <역주 원중랑집>(소명출판)까지, 책 이야기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9년간의 러시아 유학 생활까지 천정근 목사와 함께한 책 이야기를 먼저 기사로 싣는다. <유월에서 팔월 사이>부터 <완전한 자유>까지다. 천 목사가 한국으로 돌아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 생활을 할 때 영감을 준 <이탁오 평전>, <분서>, <역주 원중랑집> 이야기는 2편에서 다룬다. 인터뷰는 1월 11일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천정근 목사가 사는 초록집에서 진행했다.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와 만나 책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현선

-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나. 평소 독서 습관은 어떻게 되나.

나는 시골 과수원에서 자랐다. 여름철 과수원은 할 일이 없다. 시골에서 어디 갈 데도 없고, 문화생활이라 할 것도 없었다. 책 읽는 데 취미가 붙었다. 독서 습관을 말하자면, 나는 잡식이고 편식이다. 딱 집어서 얘기하기 어렵지만 장르나 성향을 가리지 않고 잘 쓴 글을 좋아한다. 탁월하거나 기발하고 창조적인 책은 영감을 준다. 영감을 주는 책 위주로 읽는다. 좋은 선생은 수업 시간 내내 학생들을 흥분시키지 않는다. 한두 번이지만 영감을 준다. 읽을 때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책이 좋다.

-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영감을 주었던 책이 있다면 시기별로 소개해 달라.

10대 때 영감을 줬던 책이 무엇이 있었냐고 묻자, 천 목사는 책장 한쪽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뉴스앤조이 현선

나에게 최초로 영감을 준 책은 <유월에서 팔월 사이>라는 소설이다. 강용준 작가가 썼다. 이북 사람인데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는 국군 장교가 됐다.

남한 사회에서 인민군 장교의 전력을 가진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남한 국군 장교로 입대해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정말 처참했다. 자기 인생이 어쩔 수 없이 볼모로 잡힌 것이다.

이 소설은 자기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경험을 쓴 거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읽었다. '이런 게 소설이고 문학이구나' 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놀랐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 있는 현실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데 놀랐다. 좋은 글은 고상하거나 꾸며 내는 것에 있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꿨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었다.

<외투>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이향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80쪽 / 1만 원

청년 시절에는 고골이라는 작가를 제일 좋아했다. 러시아로 유학을 간 것도 고골 때문이다. <외투>, <죽은 혼>이라는 작품을 좋아했다. 대학 다니다가 군대를 갔다 와서, 학교를 그만두고 소설 쓰겠다며 2년 정도 노가다 판에서 목수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함바 집에서 혼자 생활했다. 겨울에 추우니까 전기장판에 웅크린 상태로 자고, 일하러 나가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돈이 딱 떨어진 상황에서 전기장판이 고장 나 버렸다.

함바 집 아주머니에게 3만 원을 꿔서 추리닝 주머니에 넣고 전기장판을 둘둘 말아 어깨에 멘 뒤 시내로 고치러 갔다. 전파사에 고쳐 달라 하고 돈을 주려 했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그때 하루 일당이 4만 원이었다. 3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오는 길에 돈을 흘렸다 생각해 한겨울에 바람이 막 불고 그러는데 돈을 찾으러 올라갔다. 없어서 다시 내려갔다. 그 거리가 40분 정도 된다. 그날 밤에 여섯 번 왔다 갔다 했다. 없었다. 너무 절망스러워 인생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는데, 갑자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려갔는데, 길가에 죽어 있는 코스모스에 만 원짜리 지폐가 하나씩 걸려 있더라.

그렇게 돈을 찾았더니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르는 그런 웃음이었다. 미친놈처럼 30분 정도 웃었다. 시내로 가서 전기장판을 고치지 않고 서점으로 갔다. 그 전에 <외투>를 읽었는데, 그날 그 작품이 생각나 <외투>를 사서 돌아왔다. 그것을 덜덜 떨면서 읽었다. 그 후 고골을 공부하러 모스크바에 갔다.

고골의 글을 읽으면 처음에는 웃기다. 조금 더 있으면 진지해진다. 조금 더 있으면 슬퍼지고, 조금 더 있으면 비참해지고, 마지막에는 무섭다. 어떤 마력이 있다. 고골의 삶과 죽음은 예언자적이다. 그의 무덤에는 예레미야서 한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죽은 혼>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 584쪽 / 1만 5,000원

고골 작품 중 <죽은 혼>, <검찰관>, <외투>가 최고의 작품이다. 러시아문학을 이야기할 때 푸시킨·레르몬토프·고골·톨스토이·고리키에게 '벨리키(Великий)'라는 수식을 붙인다. 위대하다는 의미다.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는 벨리키가 아니라, 유명하다는 뜻에서 '이즈베스트니(известный)'라 부른다. 푸시킨에서 고리키까지, 벨리키라 수식하는 다섯 명은 러시아제국 표트르 대제 때부터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기까지 사상적 계보를 이루는 작가들이다. 이 다섯 명이 있어야 러시아문학이 설명된다.

푸시킨은 러시아에 문학이라는 장을 열어 줬지만 그는 무신론자이며 불경건한 사람이다. 고골은 철저한 러시아정교회의 기독교인이다. 푸시킨이 열어 준 문학을 러시아적 구원 문제로 방향 전환을 해 준 사람, 19세기 러시아문학을 형성한 사람이 바로 고골이다.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고골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에 앞서 처음으로 러시아적 구원을 문학 주제로 삼았다. 우리말로는 <죽은 혼>이라고 번역됐다. '혼(души)'은 농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이 있다는 차원에서만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사기꾼이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죽었는데 아직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농노를 사들인다. 농노를 얼마나 소유했는지가 당시 러시아 귀족이 가진 부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죽은 혼>은 사기꾼이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농노를 거느린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사기 치는 얘기다. 죽은 혼, 죽은 농노를 사러 다니면서 만나는 러시아 시골 지주와 귀족 이야기가 나오는데, 웃기면서도 절망적이다. 국가의 공복으로서 '잘 닦인 모션', '위엄 있는 태도'를 뒤집으니까, 사실은 정말 처참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귀족들의 내면, 인격의 실제 상황을 폭로한 작품이다. 이 작품 때문에 귀족들에게 엄청 비난을 받는다. 재밌는 사실은 고골이 정부를 비판하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문학에만 심취해 자기 연구물 써 내는 것에 재미 들린 사람이다. 쓰다 보니 뜻하지 않게 반정부적인 대명사가 돼 있었다. 스스로 놀라워했고, 17년 동안 외국에서 도망 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고골 작품에는 긍정적 주인공이 없다. 희망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니까,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러시아의 긍정적 주인공을 제시해 보겠다며 <죽은 혼> 2부를 쓴다. 그런데 다 쓰고 원고를 불태운 뒤 밥을 끊고 광란에 빠진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못 쓴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긍정적 인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예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러시아제국이 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렇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다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말은 예언적이면서 러시아적인 말이다.

<부활 1> / 레프 톨스토이 지음 / 박형규 옮김 / 민음사 펴냄 / 404쪽 / 9,000원

19세기 말 러시아 작가들의 큰 주제는 기독교와 종말론이었다. 당시의 러시아제국이 종말에 처해 있으며,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아마겟돈 전쟁 같은 미증유의 재앙이 일어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정교회적 구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정교회가 썩었기에 교회로는 안 되고 기독교인 개개인이 변화·갱생·부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쓴 마지막 작품이 <부활>이다. 우리말로 <부활>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갱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새로운 삶, 도덕적 삶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관점은 다르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정교회에 입각한, 러시아인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러시아제국이 침략 전쟁을 하는 것도 용인했다. 톨스토이는 철저하게 이를 비판한다. 병역과 군대를 거부한다.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일절 거부한다.

나는 모태신앙인데, 청년 시절 교회를 떠났다가 러시아 유학 생활 도중 교회로 돌아갔다. 회심하고 교회로 돌아가니까 문제가 되는 게 고골이라는 작가가 불건강하다는 사실이다. 회심한 뒤 고골을 공부하는 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가장 건강한 작가를 찾다 보니 톨스토이를 공부하게 됐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톨스토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인 불가지론자로 방황하다가 교회로 돌아간다.

당시 러시아정교회는 세상과 연결 고리가 끊어진 채 독단의 교의 체계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꾸 그 방면으로 연구하다 보니 톨스토이는 교회를 등지게 된다. 기독교인인데 교회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딜레마였다. 나도 모스크바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신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교회는 공부도 안 하고 신비주의적이고 무책임했다. 그런 면에서 갈등하다가 모스크바에 있는 교회들을 순례했다. 그 과정에서 톨스토이가 어떤 방향성을 가르쳐 줬다.

<프란시스 쉐퍼 전집> / 프란시스 쉐퍼 지음 / 12만 5,100원. 생명의말씀사 홈페이지 갈무리

내가 유학 생활을 하다가 회심했을 때 한동안 방언 같은 은사에 열중했다. 나중에는 시들해졌지만. 그때가 27세였다. 전도도 하고 성경도 가르치니까, 교회에서 설교를 시켰다. 뭘 알아야 설교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방학 때 한국에 들러 이 책을 발견했다. 읽고 나서 놀랐다. 그때는 기독교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 당시에는 쉐퍼의 전집이 기독교인으로서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줬다.

그전에는 "믿습니다"라고 하면 끝이었는데, 이 책은 기독교가 공부해야 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줬다. 문화·철학·사회 등 끝없이 공부해야 하고, 성과 속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본주의적 태도에서 이야기했다. 내가 쉐퍼와 같은 입장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는 쉐퍼와 같이 근본주의자로서 일방적인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모든 만물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찾기 원한다.

한국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한국교회에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왔다. 북장로교와 한국의 유교 전통이 맞기도 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종교가 되기 쉬웠다. 여기에 무속도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한국교회 내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데 다분히 신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위선자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쉐퍼는 이것을 단박에 깨뜨릴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위선에서 벗어나 세상 문화, 세상 사람과 어깨를 마주해야 하면서도 근본주의적 태도, 영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완전한 자유> /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 김영호 옮김 / 청아출판사 펴냄 / 619쪽 / 1만 2,000원

유학 생활 중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준 사상가가 크리슈나무르티다. 모스크바에 유학 와서 다니던 교회가 점점 유치하게 행동하는 것이 보였고, 한국교회적인 여러 문제가 있어서 방황할 때였다. 복음도 알고 기독교가 뭔지도 알겠는데 마음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라고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스크바 공보처에 한국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에 한국의 문예지를 신청해 한 달에 한 번씩은 방문했었다. 영적으로 고갈돼 있던 어느 날, 그곳에서 <완전한 자유>를 봤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빌려 와서 밤새워 읽고 명상도 해 봤다. 이 사람이 말한 명상은 아니었고,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자기를 관조했는데 다음 날 기적 같은 경험을 했다.

그때가 첫애를 낳았을 때였는데, 아내가 한국 학교 교사라 유모인 러시아 할머니가 아기를 길렀다. 천으로 된 기저귀를 쓰면 좋다기에 천 기저귀를 썼다. 세탁기에 돌리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직접 손빨래를 했다. 빨랫비누로 기저귀를 빨아서 서재에다 줄을 걸어 너는 게 일과였다.

명상한 다음 날 기저귀를 빨아 널고 있는데, 이 동작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멋졌고 황홀했다. 이 행위, 이 방 안, 이 방을 둘러싼 모스크바 거리, 모스크바를 둘러싼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 등 '전체성'이 한꺼번에 나에게 들어왔다. 나를 벗어난 자유를 경험했다. 순간 '하나님은 계시고, 나를 이렇게 사랑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 자체가 놀라운 신비였다.

기저귀를 너는 순간 깨달았던 것은, 말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무엇을 찾고, 어떤 일이 일어나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존재 자체로 충만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앙에는 신비의 부분이 있다. 톨스토이나 다른 사상가가 채워 주지 못한 부분을 채워 준 것이다. 그렇게 크리슈나무르티는 나에게 영감을 줬고,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천 목사의 집 거실에 있는 책장. 뉴스앤조이 현선

크리슈나무르티 책 중 <완전한 자유>를 가장 좋아한다. 그가 쓴 글, 연설문 중 최고를 엄선해 놓은 책이다. 목회를 하다가 어렵거나 본질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 책을 읽는다. 그러면 행복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 사람은 인도에서 출생했는데, 신지학회라는 종교다원주의적이고 종교 통합적인 이들이 있는 곳에 있었다. 그들은 크리슈나무르티가 어렸을 때 그를 미래의 예언자로 지명한다. 하나의 교단을 만들어서 그를 교주로 세웠다. 어렸을 적부터 교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켰는데, 10대 때 발군의 기량을 보여 준다. 그런데 크리슈나무르티는 성인이 되어 이 교단을 해체한다. 해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편지를 쓰기 위해 타자기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제단에 올려놓고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여러분의 으뜸가는 관심사가 될 때 바로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 누구도 열쇠를 쥔 권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열쇠는 여러분 자신의 자아이며 발전과 자기 정화 과정 속에서, 그리고 자아의 파괴 불가능한 본질 속에서만 영원의 왕국이 존재합니다."

내가 여기에 러시아어로 "신의 왕국은 너의 마음속에 있다"고 적어 놓았다. 톨스토이 책 제목이자 예수의 말씀이기도 하다. 자아의 파괴 불가능한 본질, 분열된 자아가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본질 속에 영원의 왕국이 존재한다.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소멸시켰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수탈 구조에 가로막히고 만다.

예수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 조직을 원하지 않으셨다.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을 교회라 표현했다. 거대 조직으로서 교회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리슈나무르티를 '가장 예수를 닮은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관심하면서 냉철한 언어를 많이 쓴다. 예수도 친절한 선생은 아니었다. 말씀을 던져 놓고 산으로 가 버렸다. '너희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지만 너희들에게서 증거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셨다.(계속)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