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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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짙게 석양이 깔린 율주 골프장은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골프장은 사실 골프장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연 그대로의 산등성이를 마구잡이로 깎아 만든 골프장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광활한 대지 대부분을 방치해 놓은 상태였다.

고동식의 차를 타고 단숨에 이동한 민규가 내린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차 시동 소리마저 꺼지고 차에서 내린 민규에게 보이는 거라곤 오랫동안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채 방치된 골프장 시설과 황폐하지만 푸르름만큼은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푸른 나무들이었다.

고동식은 침묵만으로 민규를 인도했다. 민규는 그의 무거운 침묵, 그 뒤를 잠자코 따랐다. 그렇게 몇 분이나 걸었을까. 한낮의 태양 열기가 사라진 필드 주변은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고동식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간 종착지는 연못 앞이었다. 연못가의 중심에 한 남자가 골프채를 손에 잡은 채 서 있었다. 평안한 일상복 차림의 남자는 김인철이었다.

민규를 김인철이 있는 곳까지 인도한 고동식은 자신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란 식으로 제법 빠른 속도로 민규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적막. 적막의 순간은 민규에게 끔찍함을 선사했다. 바람 소리도, 산새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유의 환경을 인위적으로 잠식해 버린 인공의 공터에서 자연은 아무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만신창이처럼 깎여 나간 산등성이가 김인철과 민규가 마주보고 선 골프장 연못을 고립된 분지처럼 에워쌌다. 산이 깎여 나가 저절로 형성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여서 그런지 깊은 그늘과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골프채와 클럽이 바닥에 함부로 떨어져 있는 김인철의 상태를 얼핏 살핀 민규는 그가 골프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조성되다 만 필드의 풍경 또한 골프에 무관심한 김인철의 상태와 비슷했다. 필드는 골프를 즐기기 어려운, 짓다가 무너져 내린 폐허의 정서로 가득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민규는 김인철의 무표정 앞에 멈춰 섰다. 서글플 정도로 참혹한 적막과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민규는 김인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신 김인철은 민규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의 위치는 정확히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김인철의 시선은 연못 속 움직임이 없는 물길을 살피고 있었다. 고여 있는 연못의 물은 민규의 눈에 시커멓기만 했다. 검게 그을린 험악한 그을림의 흔적만으로 실감되는 연못 속 물은 그 어떤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못은 그저 막막하게 가라앉는 깊은 어둠의 심연을 닮아 있었다. 민규의 눈에 비친 연못은 분명 그랬다.

그리고 잠시 후, 오랜 침묵을 깨고 김인철이 입을 뗐다.

- 석 달 정도 된 건가요?

- 어떤 … 말씀이십니까?

- 당신이 교회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기간 말이요.

'당신'이란 말이 민규에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미 민규의 마음속 눈에 비친 김인철은 한 사람의 교인이나 교회의 장로, 제법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명사가 아니라 검고 시커먼 심연의 연못을 닮은 어둠의 왕이었다. 어둠의 왕 앞에 선 민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겹눈을 뜨고 연못의 고인 물만 바라보던 김인철의 시선이 어느새 민규에게로 옮겨와 있었다.

민규는 김인철이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가와 입에 웃음을 기운을 품고 있었다. 민규의 눈에 비친 김인철의 그 모습은 승자의 희열로 달아오른 악동의 표정과 비슷해 보였다. 어둠의 왕. 김인철이 민규에게 다가왔다. 김인철이 더 한층 성큼 다가오자 연못 주위의 적막은 한층 더 살벌한 적막의 기운으로 들끓었다. 김인철이 말했다.

- 그래 …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 그렇습니다.

- 지껄이는 건 자유인데, 내가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낄 만한 주제에서 벗어난다면 그땐 … 알지?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내 눈엔 뵈는 게 없어.

- …

- 대통령, 목사, 스님, 추기경,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이라 해도 그 작자가 내 흥미를 조금이라도 끌지 못하면 난 그대로 쓰레기로 취급하겠어. 그러니 잘 생각하고 말해. 다 지껄인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김인철이 경고하듯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민규는 김인철의 경고에 휩싸인 자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선 민규는 김인철이 듣고 싶어하는 직접적인 답 대신 그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을 던졌다.

- 한 20년 정도 목회를 해 보니 이제야 교회는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감이 잡히더라구요.

- 무슨 소리야?

- 교회는 장로님과 같은 악마가 있어야, 적당한 악이 있어 줘야 먹고산다는 걸요.

- 너 … 지금 설교하려는 거냐.

민규의 그런 김인철의 경고에 대한 답을 가방 속에 내용물을 보여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김인철은 눈짐작만으로 내용물의 성격을 파악했다. 사진, 동영상, 증거자료들, 신애원 아이들의 진술이 담긴 사건 조서, 김인철의 악마적 쾌락이 집약된 기록물들이었다. 민규가 그것을 꺼내 김인철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용물을 잡아 든 김인철에게 민규가 말했다. 짧지만 경이로울 정도로 강한 밀도를 지닌 말이었다.

- 한영호와 유재환이 내게 맡긴 정의 실현을 위한 모든 것입니다. 복사본 따위 없다는 건 장로님이 훨씬 더 잘 알겁니다.

- 이걸 왜? 뭘 어쩌자는 거야.

- 조금이라도 흥미가 될 것 같아서요.

- …

- 또 한 가지, 인정하는 겁니다. 철저히.

- 뭘 인정해?

- 당신이 이곳의 왕이란 사실을요.

왕이란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들은 김인철의 표정에선 더 이상 경계의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김인철은 망설이지 않고 민규에게 건네받은 내용물을 연못 속으로 집어던졌다. 유재환과 한영호의 마지막 열망이 담긴 증거자료들이 한순간에 검은 물속으로 처박혀 버린 것이다.

물속으로 잠기는 진실을 바라보던 민규의 어깨에 김인철의 손이 다가갔다. 긴장이 풀린 걸까. 민규가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런 민규에게 김인철이 짧게 한마디했다. 완벽한 승자의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 정민규 목사님.

- ………

- 오늘 저녁, 함께 일식집으로 갑시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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