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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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민규가 기도원이라 이름 지은 유재환의 컨테이너 밖을 나왔다. 그곳을 나왔을 때,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무성한 푸른 이파리가 하늘을 휘덮여 버린 기도원의 오후 2시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2시간 전에 들어섰을 때의 하늘과 비교하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상대적인 밝음이다. 그 밝음의 위로를 준다고 해야 할까.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을 때, 민규가 느꼈던 실감은 그랬다.

비가 그친 푸른 이파리 틈새로 다시 한 번 따사로운 빛살이 파고들었다. 일순간 민규의 눈에 죽은 수풀로 얼룩진 바위 틈새로 무지개가 선연히 파고들었다. 그 무지개를 보며 민규는 잠시나마 숨을 돌렸다. 방금 전 컨테이너 안에서 이뤄진 유재환과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며 복기할 수 있는 여지를 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내 두렵고 섬뜩하기만 했던 유재환을 향한 자신의 굳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순간이었다.

*

두 시간 전은 분명 그랬다. 민규는 유재환이 마냥 두려웠다. 푹 꺼진 광대뼈에 퀭하게 내려앉은 두 눈, 하지만 그 힘겨워 보이는 형해만 남은 몰골 속에서도 순수의 이름으로 불타오르는 매서운 안광이 민규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그 불타오르는 안광은 순수 그 자체였다. 이 땅에 한 줌이라도 남아 있는 죄의 잔흔들에도 치를 떠는 순수의 얼굴. 그 얼굴과 목도하는 순간 민규의 정신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그랬기 때문이다. 14년 전의 그날, 고난주간을 견뎌 내던 한 남자, 유재환의 극렬한 오열과 절규, 몸부림, 순수의 이름만으로 타오르던 기도에 미친 6층 기도 모임 회원들. 민규의 정신적 멘토였던 김형윤 전도사의 분신, 타오르던 불길 속에 한 몸이 되어 뒤섞여 버린 그의 불타버린 몸이 정신의 화인이 되어 민규의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 유 목사님. 제게 뭘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전혀 그런 그릇이 못됩니다.

- 그릇이 못 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 전 목사님처럼 하나님 뜻을 세우기 위해 40일 넘게 금식할 수 있는 용기도 없고… 그리고…

- 그리고…그 다음 하고 싶은 말을 제가 대신 답해 볼까요?

- ……?

- 자신의 몸을 불태워 뜻을 이룰 용기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 … 아닙니까?

유재환은 돌려 말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말을 마친 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굳은 건 민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재환이 침묵하자 민규가 대신 말을 꺼냈다.

- 예전부터 묻고 싶었습니다. 사실 14년 전의 그 일은 … 제겐 너무 커다란 짐이에요. 목사님을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앗아 가 버리는 일입니다. 그 사건은 그렇습니다.

- 어떤 답을 원하는 거죠?

- 예?

- 이미 목사님의 마음엔 내가 그들의 죽음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 불편하시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목사님.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 … ?

- 그들이, 지금의 제가, 그리고 이곳이 … 그리고 신애원의 아이들이 악마의 먹잇감이 된 게 누구 때문이지 말입니다.

신애원의 아이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민규의 머릿속에선 재앙과도 같은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숨을 쉴 수 없는 비명 소리였다. 그 누구에게도 숨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유재환이 말을 이었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한 거룩한 시도는 인간이 가진 악마성의 한계를 초극하기 위한 그 역시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순수의 불꽃이다. 그렇게 적으셨죠.

- 제 논문을 … 목사님도 외우고 계시군요. 한영호 장로님처럼요.

- 목사님은 계시의 신비를 믿으십니까?

- … 계시의 신비요?

- 제가 가진 생각과 뜻 안에 투영된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이 무려 14년이 지난 지금 정민규 목사님. 당신의 생각과 뜻 안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 아브라함에 대한 제 생각이 목사님의 생각과 같았다는 말입니까?

- 같다 … 그 정도 표현은 부적합해요. 그건 두 개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들리니까요. 이 생각은 두 개의 내용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란 뜻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 목사님. 잠깐만요.

- 말씀하세요.

- 그 말씀은 마치 제가 목사님 생각이나 뜻의 분신 같다는 말로 들립니다.

- 아니죠. 그게 아닙니다.

- 그게 아님 뭡니까?

- 제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이 땅을 장악한 악과 불의를 종식시키려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하나라는 겁니다.

- ……

- 눈에 보이는 광기가 아니라 그 너머에 숨어 있는 광기를 보세요. 악마가 모든 걸 지배하고 있어요. 그 악마를 박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목사님의 뜻 안에 주어진 겁니다. 그걸 외면하지 마세요.

- 제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목사님.

민규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민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 그냥 전 제가 주워들었던 배움, 학습했던 결과물들 모아 논문 한 편 쓴 게 전부인 사람입니다.

*

유재환은 민규의 마지막 말에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미소와 차분히 가라앉은 침묵이 전부였다. 그 침묵엔 민규의 결단을 촉구하는 채근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시동이 걸려 있는 봉고차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김정은이었다. 그녀가 말없이 민규의 곁에 다가왔다. 그녀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현재 심정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규는 그렇게 느꼈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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