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마커스 보그의 고백>(비아)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께 매우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쓰신 책들을 통해 제가 품었던 신앙적 고민을 풀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꿈도 꾸기 어렵겠지만, 이역만리(異域萬里) 한국 땅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선생님의 저작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선물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흔히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세 번째 물결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바람이 한국으로 몰려왔을 때입니다. 뒤늦게 신학의 바다에 뛰어든 저는 <미팅 지저스>(홍성사, 1995)와 <예수 새로 보기>(한국신학연구소, 1997), <예수의 의미>(한국기독교연구소, 2001)를 읽고 갈릴리 해변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었고, <새로 만난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2001)을 통해서는 '제 맘대로 신앙'에서 벗어나 '초자연적 유신론'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신학 사유의 실마리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심장>(한국기독교연구소, 2009)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고, 그 결정판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2017)는 교인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가며 정말 큰 배움이 있었습니다. 관습에 머물러 있던 이들, 확신 없는 이들, 예수를 사랑하지만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 낡은 교리에 진절머리를 느낀 이들에게 선생님의 책은 시원한 생수 같았습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한국기독교연구소, 2011)나 <마지막 일주일>(다산초당, 2012)을 읽고 성탄절의 깊은 의미와 수난의 마지막 일주일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을 통해서는 예수 복음의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와 예수 복음의 가장 큰 왜곡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바울에 대한 깊은 오해들을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신앙 여정과 신학 배움의 길에서 선생님은 실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 확신들 |
2015년, 선생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괜히 울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그동안 저는 남모르게 선생님께 배우면서 꽤 사모하고 의지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선생님의 생전 마지막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사서 읽었습니다. 책의 원제목은 '확신들'(Convictions)이지만 한국어 번역 책으로는 <마커스 보그의 고백>입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제목에 넣을 만큼 한국에서도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께 가르침을 배운 이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한국판 책의 제목처럼 이번 책은 선생님께서 평생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오시면서 그 신앙의 여정에서 길어 올린 여러 신념을 고백적으로 다루고 있더군요. 세상은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지만 어쩌면 우리 삶에서 늘 곁에 두고 곱씹어야 하는 가치들은 역시 서너 가지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내밀한 고백을 기대하면서 책을 펼쳤습니다.
여느 책과 달리 이 책에서 제게 가장 신선했던 부분은 선생님의 신앙 여정과 더불어 미국 사람으로서 미국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비판적 성찰이 들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땅 한국은 지난 1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미국과 매우 밀접한 나라가 되었고, 특히 개신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나,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와 미국 개신교와 닮은 점이 많고, 또 그래서 동시에 반면교사로 삼으며 성찰할 것들도 많습니다. 책 초반에 선생님은 미국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말씀하면서 '보수 그리스도교인', '관습적인 그리스도교인', '확신 없는 그리스도교인',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교인', '진보 그리스도교인'으로 나눕니다. 각각의 교인들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자신이 관습적이고 다소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인에서 어떻게 진보적 교인으로 변해 왔는지 서술해 주신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라다가 확신 없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어 교회를 떠날 뻔했다가 새로운 종교체험을 통해 지금은 진보 그리스도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또는 한국 개신교는 미국과 매우 닮은 꼴이지만, 한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또 다른 토양이 있고, 지난 100년의 꽤 혼란하고 복잡한 역사 속에서 신앙인으로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교인의 특징을 구분하고 각각 장점과 약점을 서술해 주신 부분은 우리도 교회 혹은 교인들끼리 벌어지는 분열과 반목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교인들을 구분하셨는데, 그것은 '비판 이전의 순진한 단계', '비판적 사고의 단계' 그리고 '비판 이후 긍정의 단계'입니다.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 발달 단계 이론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이 분석은 우리들의 신앙 성찰과 성숙에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맹목적 신앙인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교양을 갖추고 건전한 시민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전 책들에서 다룬 몇 가지 신앙 주제들을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강조하셨더군요.
역시 그 첫째는 구원의 문제이지요. 아직도 '천국-지옥틀'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내세는 성서의 중심이 아니'라는 분명한 말씀은 정말 옳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 삶에서의 변화이고, 모든 왜곡된 억압과 소외, 배제로부터의 해방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종교적 인간의 깊은 내면의 갈망이 충족되는 것임을 너무나도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내세에 집중할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분열되고 왜곡되고 실제 우리 삶을 등한시하게 되는지 알려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이번 책은 역시 신약학자답게 성서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저도 진보적 목회자로서 어디에서나 성서를 제대로 읽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하는데, 아직도 문자주의적 해석에 머물러 있거나, 교리의 틀, 아니면 자기 욕망 달성을 위한 증거물 정도로 성서가 사용되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볼 때, 선생님의 지적은 하나하나가 보물입니다. 성서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둘도 없는 삶의 기준이지만 그러나 역시 선생님의 탁월함은 예수가 성서의 규범이 된다고 강조하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핵심을 찔렀기 때문에 인용하고 싶네요.
"하느님께서 책이나 가르침이 아닌 한 인격을 통해 당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고백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세계 종교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하느님이 책(토라와 꾸란)에 당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고 믿는다. 불교에서는 계시라는 개념을 쓰지는 않지만, 굳이 쓴다면 붓다라는 인물보다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고 여긴다. 붓다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건 그의 가르침이다. 힌두교 역시 마찬가지다. 힌두교에서 계시는 특정 인격보다는 전통의 가르침에 있다.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예수를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로 보았다. 성서가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책인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위에 올려놓는 것이자,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계시된 말씀보다 책에 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이 된 말씀, 성육신은 책 속에 있는 말씀보다 더 크다." (139쪽)
| 성서는 정치적이다 |
예수가 성서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역시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조차 성서를 통해 만나야 합니다. 그러니 성서는 정말 중요하지요. 선생님께서 이번 책에서 강조하신 대로 최소한 두 가지는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이고 진실일 수 있다는 것, 우리 삶에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즉 의미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선생님께서 강조하셨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단순히 윤리적 삶에 대한 강조나 종교개혁 정도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갱신에 머물렀다면 투석형을 받으셨겠지요. 바른 삶을 살라고 가르친 정도였다면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과 꿈은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악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우리의 삶 하나도 정치와 무관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선생님께서 미국의 개인주의, 능력주의에 기반한 자수성가형 인간을 이상으로 삼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신 부분은 매우 적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외침인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라'는 책임은 회피한 채, 그저 '개인의 따뜻한 행실과 자선'만을 강조하는 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하시고, 미국 예외주의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리셨습니다. 한국 사회도 점점 공공선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타서 능력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에 선생님의 가르침은 이 땅에서도 절실합니다.
더 나아가 선생님은 평화와 비폭력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짚어 주셨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에서 제한적 힘을 사용하는 '정당한 전쟁'으로, 폭력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성스러운 전쟁'으로 변해간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신학자로 성스러운 전쟁은 용납할 수 없음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자국의 이익이나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국 중심의 사유를 넘어서야지요. 자신의 나라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의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국가 이데올로기나 자본주의 이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이 전쟁 소식으로 가득한 것은 바로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의 열정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노력과 열망이 더 적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가슴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지요.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하지요. 아직도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깊은 회의에 빠져 이제 막 교회를 떠나려고 하던 그 시절,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던 그날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닮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또 사랑하게 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 사랑을 닮아갈 것이라 기대합니다. 좁디좁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의로운 자에게 불의한 자에게나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분의 넉넉함을 닮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사랑하다 보면 더 사랑스러워지는 그 사랑을 해 보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 때, 진정으로 제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를 물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픈 일을 하라!"(Dilige, et fac quod vis fac)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닮도록, 늘 하나님 곁에서 주님과 사귀고, 주님께 주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만연하고, 극우주의가 곳곳에서 불일 듯 일어난다지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마지막 책을 읽으며, 아쉬운 마음 너무나 많지만, 끝까지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신앙 여정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삶의 문턱들을 넘어가며, 결국은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이르리라 희망합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10년 전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도 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이제야 드립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빕니다.
한국에서 한 그리스도인이 드립니다.
한문덕 / 연세대에서 신학과 교직과정을, 도올서원과 태동고전연구소에서 동서양 고전을, 한신대 신학대학원과 연세대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및 종교철학(박사)을 공부했다. 신학과 동양 사상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리 삶에 알맞게 재구성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4년 11월부터 향린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