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9월 24일, 성령강림 후 열일곱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05:1-6, 37-45 / 출애굽기 16:2-15 / 빌립보서 1:21-30 / 마태복음 20:1-16

미국의 존 포드(John Ford) 감독의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는 영국 웨일스를 배경으로 광부 집안의 막내, 휴(Hughes)의 시선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이 탄광촌에서 지냈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영화는 시작하죠.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른이 된 휴는 "그곳에 함께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고 덤덤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휴의 기억에 저장된 가족 구성원 저마다의 이야기로 관객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y, 1941)' 필름 갈무리.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y, 1941)' 필름 갈무리.

영화는 적극적인 시선으로 대지가 풍요롭고 초록이 무성한 휴의 고향 '밸리'를 묘사하다가도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탄광 '쿰 론다(CWM RHONDDA)'의 어둡고 고된 노동 현장을 교차하며 보여 줍니다. 광부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아버지와 네 명의 형들이 하루 일당을 받아 집에 돌아오는 고단한 길, 노동자들의 행렬을 카메라는 길게 따라오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습니다. 온몸이 석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얼룩진 그들은 고된 갱도에서 살아남은 얼굴을 하고 웨일스어로 된 노래를 부르죠. 누가 시작한지도 알 수 없는 노래가 울리면 밸리 마을 전체가 노랫소리로 가득하고, 마을 사람들의 노래가 휴에게는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소리로 남습니다.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그들이 그들 되게 하는' 하나의 의례(ritual)였던 것입니다. 음악은 세월의 규모를 아랑곳없이 뛰어넘어 기억장치에 오랜 시간 각인시키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y, 1941)' 필름 갈무리.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y, 1941)' 필름 갈무리.

그것이 비단 소리뿐일까요? 휴의 기억은 철저하게 오감을 통해 나온 것들이었지요. 아름다운 웨일스 땅의 생명력 넘치는 언덕 위 양과 염소의 풍경은 한 편의 시처럼 그의 눈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가족들과 함께 풍성히 나누어 먹었던 빵과 소고기, 양고기의 맛은 그의 혀와 코에 여전히 남아 있지요. 교회 종소리도, 토슬 부인의 가게에서 산 토피 사탕의 달콤한 맛도 중년이 된 휴를 어느새 열두 살 휴의 시간으로 데려다줍니다. 이처럼 감각을 통과한 과거의 경험은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저장시켜 주어 현재의 나를 추동시킵니다. 그 모든 기억의 집합체가 결국은 지금의 '나'를 형성하니까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억도 구체적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지 두 달 십오일이 지난 시점, 그들은 지금 고기 가마 곁에 있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어요. 이집트의 재앙으로부터 구름 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홍해의 자박자박한 물길을 걸어 나온 기적적인 구원을 강렬히 경험한 그들도, 광야 위 허기 앞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노여워합니다(출 16:2-3). 노예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그들은 꿈꿀 것 하나 없는 한낱 노동자였으니, 잔인한 노동으로 혹사를 당하는 대가로 받은 치사한 고기 몇 덩이와 빵 몇 개가 그들의 하루를 그저 대수롭지 않게 적당히 만족하게 했습니다.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식솔들의 뱃속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삶은 그런대로 잘 지속됐으니까요. 성찰 없이 보낸 하루하루는 쌓여 어떤 세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드라마틱한 구원의 사건을 연이어 겪은 그들의 시간들도 공고하게 굳어진 노예의 정체를 균열 내기는 역부족이었죠. 지긋지긋한 관성은 다시 고개를 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고 이윽고 원망은 여호와의 귀까지 들리지요.

콜린 맥컬러-토마스 (Colleen McCulla-Thomas), '천국에서 온 만나'. 사진 출처 colleenmccullathomas.com
콜린 맥컬러-토마스 (Colleen McCulla-Thomas), '천국에서 온 만나'. 사진 출처 colleenmccullathomas.com
관성,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1)

인간의 몸과 마음이 관성적으로 움직이려는 습성은 현실의 익숙한 것에 안주하기 마련입니다. 나태함 또한 그 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운동에너지가 쓰이고 있고요. 안락한 관성을 깨기 위해 여호와의 처방은 바로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양식을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출 16:4). 저녁마다 메추라기가 아침마다 만나가 그들의 진에 덮히니, 아침저녁으로 배부른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출 16:12). 고기 가마 옆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던 노예였던 그들은 이제, 아침저녁이면 '하늘의 양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고 살리는 이는, 일한 만큼의 떡과 고기를 배급하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율법을 당부하시죠. 딱 하루만의 양식을 주워 담아 날마다 '먹이시는 하나님'을 체화하게 하려 하십니다. 더 이상 노예의 신분도 이집트 땅의 거주민도 아닌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양식을 경험하며 '약속된 하나님의 질서'를 몸으로 기억하게 하시지요. 이슬이 마른 후 광야의 지면을 덮은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을 매일 아침 '눈으로 보며', 해 질 녘 노을이 물든 광야의 풍경 아래 욕심 없이 하루만큼의 하늘의 양식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매일의 습관은 그들을 형성해 나갈 테지요. 감각을 통한 기억이 시간의 반복을 만나며 그들은 '하나님을 맛봅니다'. 고유한 루틴은 관성적 존재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균열된 틈으로 새로운 신념이 생기죠. 하늘의 양식을 통해 맛본 하나님을 그들은 얼만큼 인지하고 기억해 나갈까요? 

작자 미상, The Fall of Manna, 디트로이트 예술대학 소장.
German, c. 1470, The Fall of Manna, 디트로이트 예술대학 소장.
나의 푸르렀던 밸리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존 휴(John Hughes, 1873-1932)가 작곡한 찬송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Guide me, O my great Redeemer)'입니다. 새찬송가 377장에 수록된 이 곡은 CWM RHONDDA라는 찬송 곡조(Hymn Tune Name2))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는 이 찬송가의 작곡가인 존 휴의 실제 이야기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이고, 실제로 탄광촌의 이름이었던 쿰 론다(론다 골짜기), 즉 CWM RHONDDA를 휴는 곡조의 이름으로 채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각색을 하여 노동자들이 갱도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르는 노래로 연출이 되었고요. 실제로 휴는 웨일스 다울라이스(Dowlais)에서 태어나 자라며 어릴 때부터 광산의 문지기 일을 시작해 후에는 '론다 골짜기'에 있는 광산의 경리부장으로 살아갑니다. 신실한 집사로, 성가대 지휘자로 살며 어린 시절의 잊지 못할 고향의 정서를 담은 찬송가를 작곡한 것이지요.

휴가 기억했던 고향의 소리와 맛, 냄새와 풍경이 하나의 곡조가 되어 기억의 저장소가 된 것을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하늘 양식을 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늘의 양식을 맛보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되어 봅니다. 휴가 나의 푸르렀던 밸리를 기억하여 쿰 론다의 곡조를 지어 노래했듯이, 우리도 과거의 우리를 구원해 내셨던 '내가 맛보고 만져 본' 하나님을 노래를 통해 기억해 낼 수 있겠지요. 웨일스의 사람들은 이 노래를 축구장에서 다 같이 부르기도 하고, 영국 왕실은 결혼식3)과 장례식4)을 막론하고 그들의 정체성이 이 노래와 잇닿아 있는 만큼 자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버전으로 들어볼 텐데요. 첫 번째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1941)'의 한 장면, 광산의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르는 CWM RHONDDA이고, 또 하나는 Loosely jazz-based에 의해 재즈로 새롭게 해석된 버전으로 올해 6월 발표된 앨범, Interpretations Vol. 1: Hymns Old and New 중에서 들어 보시겠습니다. 매일의 양식이 하나님의 자녀로 나를 형성하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 생명의 양식 되시는 예수와 광산의 휴, 그리고 하늘 양식을 줍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란히 들어 보시지요.

1절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나는 순례자이니 나는 심히 연약해도 주는 강하옵니다
하늘 양식 하늘 양식 먹여 주시옵소서 먹여 주시옵소서

2절
수정 같은 생명수를 마시도록 하시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나의 주여 나의 주여 힘과 방패 되소서 힘과 방패 되소서

3절
요단강을 건널 때에 겁이 없게 하시고 저기 뵈는 가나안 땅 편히 닿게 하소서
영원토록 영원토록 주께 찬양하리라 주께 찬양하리라

주) 

1) 표준국어대사전
2) 고유한 멜로디를 지닌 찬송 곡조는 보통 찬송가의 오른쪽 부분 운율과 함께 표기되어 있음.
3) 윌리엄 왕자와 케이티의 결혼 예배 
4) 다이애나 왕비의 장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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