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9월 10일, 성령강림 후 열다섯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49 / 출애굽기 12:1-14 / 로마서 13:8-14  / 마태복음 18:15-20

요람 라난(Yoram Raanan), '엑소더스'. 사진 출처 chabad.org
요람 라난(Yoram Raanan), '엑소더스'. 사진 출처 chabad.org

유월절의 밤은 지난했던 이스라엘인들의 노예 생활이 저무는 날이자, 약속의 땅으로 가는 광야로의 걸음을 내딛기 위해, 낡은 시간을 벗고 새로운 정체를 입는 날이었습니다. 그 밤은 삶의 방향이 전환되는 밤이었죠. 한곳에서 정착하여 오랜 세월 동안 억압받았던 시절을 뒤로하고, 여호와의 지도자가 이끄는 한곳으로 일제히 눈을 돌리는 밤 말입니다. 모든 태의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재앙의 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은 살아남은 밤이었습니다.  

어린양 The Lamb-John Tavener

수많은 밤을 맞이했으나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의 밤은 각별합니다. 흠 없는 양의 죽음을 집집마다 목격하죠. 피의 냄새, 불에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우면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과 함께 식사가 시작됩니다. 유월절의 식사는 급하고 긴장이 서려 있어요. 그 식탁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지시한, 이집트를 향한 재앙의 절정의 날 밤에 펼쳐집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피의 재앙으로 발생됐습니다. 모세의 어린 시절 남자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던 시간이 소환되듯, 나일강이 일제히 피로 변하면서 시작되었죠. 히브리 어미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그 나일강은 80년 만에 다시 죽음의 강이 되어, 물고기 사체들이 떠올라 배를 드러냈고 악취를 풍기며 주변 모든 것을 피로 물들입니다(출7:17-21). 이어 개구리가 온 땅에 저주를 몰고 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He spake the word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Georg, Friedrich Händel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떼가 오며 그들의 온 영토에 이가 생겼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수많은 메뚜기가 몰려와 그들의 땅에 있는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들의 밭에 있는 열매를 먹었도다." (시105:31-35)

끔찍한 재앙의 출현에도 파라오의 마음은 완강하여 백성을 결코 모세의 뜻대로 보내 주지 않지요. 아홉 번째, 이집트의 모든 것이 흑암으로 완전히 뒤덮이고 난 뒤, 드디어 열 번째 재앙이 빼꼼히 고개를 든 날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구별'이 일어나는 절정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어린 시절 구원을 받듯,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의 날에도 어김없이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인해 구원받습니다. 그들을 지나쳐 간 죽음의 심판은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 갔고, 이제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유월절의 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절기로 대대로 지키고 기억하는 날이 됩니다.

그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치셨다 He smote all the first-born of Egypt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Georg, Friedrich Händel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다." (시105:36) 

죽음이 깃든 곳으로부터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린양의 죽음을 진정으로 목격하고 씹어 맛본 이들이었습니다. 생명을 얻은 것들은 지난밤 죽음의 자취로부터 건져 올려진 것이었으며, 두꺼운 어둠의 틈에서 희미한 빛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었습니다(출10:23). 모세도 다시 목격합니다. 갈대 상자를 띄워 유유히 받들어 인도해 주었던 죽음이 가득한 피의 나일강을 보며 그로부터 건져진 광랑한 생명을 실감합니다. 검은 어두움을 두르고 마주한 파라오의 음성은 흑암과 분노로 버무려진 얼굴 같았습니다. 모세를 향한 고함이 어둠과 함께 춤추며 궁정을 쩌렁쩌렁 울려 댔으나, 그 밤에 본 것은 다시는 결코 보지 않을 파라오의 얼굴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가 자랐던 곳과 배웠던 것이 깃든 어둠의 궁정과 완벽하게 결별을 선언합니다(출10:29). 파라오의 장자가 죽음을 당했듯이, 모세의 내면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두려움과 불안을 장사 지내고 궁정을 나섭니다.  

그가 두터운 어둠을 보내셨다 He sent a thick darkness(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중)-Georg, Friedrich Händel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출10:21)

소생되는 곳으로부터

열 차례의 재앙이 벌어지는 가운데, 모세는 두려움과 싸우며 민족의 지도자로서 조금씩 변모해 갑니다. 아니, 도망쳤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 모세는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중이지요. 재앙은 나일강을 피로 물들였고, 우박과 메뚜기로 땅을 황폐하게 하며, 죽음이 이르렀지만, 그 가운데서 모세는 오히려 소생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그들이 나를 믿지 않으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출 4:1)",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말하던 모세는 이제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등 뒤로 하고 언약의 땅으로 뚜벅뚜벅 걷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알지 못한 채로, 얼마큼 먼 거리인지 알지 못한 채로, 또 얼마나 돌아서 갈 길인지 알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앨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진 출처 flickr.com
앨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진 출처 flickr.com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영국 작곡가 존 태버너(John Tavener)의 '어린양 The Lamb' 그리고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집트의 이스라엘' 중 세 곡을 골라 보았습니다. 태버너의 '어린양'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크리스마스 예배에 종종 연주되는 곡이기도 합니다. 또 영국의 다이애나비 장례식에도 연주된 적이 있지요. 아이 같은 눈길로 성스러운 어린양을 응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에 대해 노래하는 곡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이듯 말입니다.

그리고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 중 고른 세 곡은, 열 가지 재앙 텍스트의 의미를 그림 그리듯이 반영하는 '워드 페인팅 기법'(word painting)으로 빼어나게 표현한 바로크 시대의 오케스트라와 합창 음악입니다. 파리떼를 표현하기 위해서 쏟아지는 32분음표의 바이올린 음형이라든지, 메뚜기떼의 낮고 무거운 첼로의 음형을 들어 보세요. 이집트의 장자의 죽음을 예고하고 여호와의 심판을 상징하는 '망치 코드'는 악보를 읽으며 귀로 들으면 더욱 더 생생하게 들릴 거예요. 마지막으로, 작곡가가 두터운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느리고 육중한 화성을 주목하여 반음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며 유월절의 아득한 밤을 느껴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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