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8월 20일, 성령강림 후 열두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33 / 창세기 45:1-15 / 로마서 11:1-2a, 29-32 / 마태복음 15:(10-20), 21-28

In His Great Time(그분의 완벽한 시간)

요셉이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길 없어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쫓아냅니다. 그리고 수년 만에 만난 형들 앞에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해요. 이것은 그의 형제들을 만난 첫날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어요. 그의 맏형 르우벤의 입을 통해 형제들의 죄를 돌이키는 말을 들었을 때도(창 42:24a)1) 그리고 그리운 아우 베냐민을 봤을 때도(창 43:30~31)2), 요셉은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한참을 울고 얼굴을 씻고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 그가 바로의 궁중에까지 울리도록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동안의 세월은 그야말로 모두에게 질곡의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후에 자신의 인생을 가리켜 험악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고백하는데(창 47:9), 요셉을 잃은 사건만큼 큰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들 또한 만만치 않은 광음을 보냈어요.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집요하게 따라다녔던 죄책감은 눈덩이마냥 불어났을 테고, 생의 고비고비마다 요셉의 채색옷은 트라우마처럼 그들을 긴장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의 시간도 어지간히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로 낯선 나라로 팔려 온 소년은 언어도, 관계도, 정체성도 벗겨진 채로 비참한 한복판에 삶이 아무렇게나 던져졌고, 부당하고 이유 모를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 냈죠. 이 모든 죄책감과 불안과 긴장이 뒤엉킨 시간들이 요셉이 울음을 통해 자기를 밝히며 한순간에 새로운 시간의 정렬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꿈꾸는 자, 요셉이 그간의 시간을 명쾌하게 '해석'하며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중략)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창 45:5~8, 공동번역)

요람·메이라 라남(Yoram and Meira Raanan), '형제들(The Brothers)'. 사진 출처 aish.com
요람·메이라 라남(Yoram and Meira Raanan), '형제들(The Brothers)'. 사진 출처 aish.com

요셉의 고백이 들어 있는 창세기 45장은 '드디어 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광란의 험악했던 시간을 이완시키며 속도와 긴장을 늦춥니다. 드디어 형제들은 서로의 목을 안고 울며, 입 맞추며 안고 웁니다. 눈물과 입김이 엉키고 모든 것을 담을 듯한 찰랑이는 눈빛이 안부와 함께 오고 갑니다. 부둥켜안고 우는 울음 안에 용서가 깃들고, 굳어진 심령 안에 안도감이 고개 들며, 입맞춤에 모든 것이 낫고, 울음으로 엉망이 된 얼굴에 하나둘 기쁨이 샘솟습니다. 이것보다 완벽한 이완은 없어 보입니다. 드디어 찾아오는 위대한 이완의 때는 온전한 평화의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A Great Time in Music(음악에서 위대한 순간이란)

완벽한 이완을 선행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다지도 만족스러운 종지(Cadence·마침)는 이들이 입맞추기까지 얼마만큼의 수축된 형태를 긴 시간동안 유지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음악에서 위대한 이완일수록 장엄한 해결을 위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미해결 상태의 투쟁을 최대한 지연시키지요. 그리고 지체되는 과정 속에 얻는 필연적인 덕목은 인내입니다. 풀어헤쳐진 무질서의 공간과 충족되지 못한 시간을 견디지만 그 안에서 좌절된 욕구는 해결을 소원하고 마냥 기대하게 되지요. 요셉의 기구해 보이는 삶의 조각들도 필연적 시간을 얻은 후에야 이유를 획득하고 완벽한 승리의 때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음악에 있어서 완벽한 종지라고 한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감격의 순간은 모든 음이 연주되고 난 뒤에 오는 여운餘韻의 때 일 것입니다.

After Cadence(모든 음이 사라지고)

한자에서 소리는 두 가지가 있는데, '소리 성'과 '운 운'입니다. 그러니까 성은 들리는 소리이고, 운은 성이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소리, 여운이지요. 모든 것의 이야기가 해결되고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드디어 시작되는 여운의 시간은 소리를 넘은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의 초대입니다. 종소리가 멀리멀리 퍼지는 시간이 데려오는 공간일 수도 있고,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트랙을 달려 마침내 피니시 라인을 밟고 난 뒤에 오는 멍멍한 순간일지도 모르지요. 연주회장에서 길고 긴 심포니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진 후 박수를 칠 수 없을 정도의 뭉클함이 찾아오는 '드디어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느긋하게 머무는 것을 선택한 이에게만 찾아오는 은은한 감격의 시간이기도 하지요.

요셉이 맞이한 여운의 시간은, 형제들의 질투와 시기로 촉발된 고단한 인생을 달리 해석하여 보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니(롬 11:29), 인생의 심포니가 긴장과 해결을 반복하고 그 모든 것이 완전한 종지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찾아오는 여운의 시간, 그 시간은 미리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을 안고 입 맞추는 시간입니다.

Even When He Is Silent(비록 그분이 침묵할 때라도)

오늘 우리가 함께 들어 볼 경건한 청음은 노르웨이 작곡가 킴 안드레 아르네센(Kim André Arneson)의 합창곡 '비록 그분이 침묵할 때라도(Even When He Is Silent)'입니다. 곡의 가사는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 쾰른에 숨어 있던 유대인이 쓴 것인데, 그곳에서 이 시는 벽에 긁힌 채 발견됐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진공상태의 시간,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작자 미상의 감정 상태를 작곡가는 유려한 화성의 움직임을 통해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연주되는 아카펠라 장르를 적극 활용하는데요. 소리가 울리고 난 뒤에 남는 잔향에 대한 의도적 장치가 곳곳에 있습니다. "신이 침묵할지라도, 태양이 비치지 않는다 해도"라고 메아리치는 부분은 '페르마타(Fermata·늘임표)'와 '숨표'의 활용이 적극적이어서 합창단의 화성 블렌딩(blending)을 귀가 끝까지 쫓아가게 만들지요.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태양을 믿네. 비치지 않는다 해도.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feel it not.
나는 사랑을 믿네.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I believe in God, even when He is silent.
나는 신을 믿네. 비록 그분이 침묵할 때라도.

꿈꾸는 자 요셉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고통스런 현실들을 살아 냈습니다. 꿈 안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찾으며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 존재를 더 깊이 조우하며, 결국은 그가 하려고 하는 말씀을 통찰하는 여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이 침묵 처럼, 들리지 않는 시간에 기대어 위로를 주는 노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킴 안드레 아르네센의 합창곡 'Even When He Is Silent'를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의 포옹 속에서 함께 듣겠습니다. 맨해튼소녀합창단(Manhattan Girls Chorus)의 소녀들의 목소리와 칸투스싱어즈(Cantus)의 남성의 보이스, 두 가지 버전으로 들어 보시지요.  

1)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2)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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