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성탄 예배가 서울 녹사평역 합동 분향소 앞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성탄 예배가 서울 녹사평역 합동 분향소 앞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57일째인 12월 25일 오전.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객들이 서울 녹사평역 광장에 설치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찾아왔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유가족들은 분향소 옆에 서서 추모객들을 정성스레 맞았다.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는 작은 포인세티아('축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성탄을 상징하는 꽃 - 기자 주) 화분과 크리스마스트리, 빨간 리본으로 포장한 선물 상자 등이 놓여 있었다.

이날 분향소 앞에서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함께하는 성탄 예배가 열렸다. 성공회나눔의집협의회·정의평화사제단·걷는교회·파주교회가 공동 주최한 '10·29 이태원 참사 추모와 연대의 성탄절 연합 성찬례'에는 유가족 20여 명을 비롯한 그리스도인·시민 100여 명이 발 디딜 틈 없이 자리했다.

참사 희생자 진세은 씨의 언니 진세빈 씨는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그는 종교가 없어 잘 모르지만, 종교의 근원은 위로와 유대라고 생각한다며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세은아 안녕. 벌써 크리스마스다. 우리 작년에 같이 벽에 크리스마스 장식 꾸며 놓고 사진 찍었는데 기억나? 네가 눈 참 좋아했잖아. 올해는 이렇게 눈 많이 쌓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우리 지금쯤이면 원래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눈사람 만들고 있어야 되잖아. 독일, 체코,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 그 아름다운 유럽의 풍경들을 너한테도 언니가 꼭 보여 주고 싶었어. 비행기를 무서워했던 너한테 이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는 걸 꼭 보여 주고 싶었어. 그런데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줄 몰랐어. 언니는 아직도 너한테 보여 주고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데 삶이 참 덧없고 부질없다, 그치?

 

너 올해 들어서 언니한테 계속 머리카락 좀 자르라고 잔소리했잖아. 그래서 며칠 전에 머리카락 40cm (잘라서) 소아암 환자들한테 기부하기로 했어. 네가 병원에서 아파하던 그 기억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해서 오늘도 힘겹게 병과 싸워 내는 아이들이 모두 다 너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네 이름 '진세은'으로 기부하려고 해. 너 관심받는 거 엄청 부끄러워했지만, 이번엔 좋은 일이니까 웃으면서 넘어가자.

 

몇 달이 지난 요즘은 이제 많이 아프진 않아. 추운데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녀. 너 좋아하던 미니스커트는 가끔씩만 입어. 그러다 감기 걸리니까. 늘 웃으면서 행복한 일만 기억하면서 그렇게 살자. 언니랑 엄마랑 아빠도 조금만 힘들고 조금만 아파할게. 어제도 언니 꿈에 나와 줘서 진짜 고마웠어. 계속 기다릴 거니까 심심하면 또 나와서 언니한테 재잘재잘 수다 떨어줘. 사랑해 세은아. 아프지 마."

참사 희생자 진세은 씨의 언니 진세빈 씨는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사 희생자 진세은 씨의 언니 진세빈 씨는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진 씨는 이태원 참사를 그저 먼 곳에 덮어 두기만 바라고 유가족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2항.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6항.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1항, 국가는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인간다운 생활을 즐기러 간 수많은 청년들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2항,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장례비·병원비 지급했으니 사회보장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감히 사람의 고귀한 생을 고작 금전적인 배상으로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은 돈이라는 재화 따위에 가족을 팔아넘길 수 있습니까. 생사를 넘나드는 그 수술실 앞에서, 우리도 하루에 한 번 볼 수 있는 세은이 병상에 무작정 카메라 수십 대를 대동하여 쳐들어간 그 높으신 분들, 사회복지 진정으로 하신 겁니까. 사진 찍으러 오신 겁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고귀하신 성함을 언급하면 어떻겠습니까. 6항, 국가는 재해 예방 했습니까. 그게 되지 않았다면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직무 유기에 대한 책임은 졌습니까.

 

길거리에서 159명의 청년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그 길거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을 통제하고 압박하며 본인 입맛에 맞는 기삿거리만 내보내고, 카메라 앞에서 막말을 하면서 분향소에는 극우주의자들의 온갖 현수막이 걸리고, 기어이 그들의 유가족에게 쌍욕을 들이붓게 만드는 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보호이며 사회복지입니까. 저는 오늘도 들었습니다. '그거, 우리 윤석열 대통령 곤란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나가 죽은 거'라고. 법 위의 법이 헌법입니다. 그 헌법을 지키지 않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합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되풀이됩니다. 우리들의 남은 기억은 당신들의 남은 생보다 훨씬 길게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 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유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 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세빈 씨가 애타게 호소하는 동안 극우 유튜버의 방해로 예배가 중단되기도 했다.

정의평화사제단 자캐오 사제(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길찾는교회)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 "이 공간은 애도와 추모의 공간이다. 카메라를 함부로 들이대시거나 모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하자, 좌중 사이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한 중년 여성은 "너희들이 안 하면 나도 안 해. 너희들이 말조심하면 오케이, 노 프라블럼. 나는 성공회 신부도 무섭지 않다"며 고성을 질렀다.

곳곳에서 "네가 사람이냐", "입 닫아라"라는 울분이 터져 나왔다. 경찰의 제지에도 여성은 현장을 떠나지 않고 광장 뒤편에서 모욕적인 발언을 이어 갔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참사 희생자 이지한 씨의 아버지 이종철 씨(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대표)는 결국 유가족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자캐오 사제는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성탄의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자캐오 사제는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성탄의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자캐오 사제는 설교에서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했다. 이태원참사시민대책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서야 한다.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이상민 행안부장관 같은 이들이 제대로 책임지고 물러서는 것, 희생자와 유족, 지역 상인과 주민, 생존자들에게 실질적이고 제대로 된 피해 지원을 하는 과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 길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로 불러 모은 성탄의 정신, 짙고 무거운 어둠 가운데 결코 꺼지지 않고 빛나는 빛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실현되는 길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자캐오 사제는 "작고 연약한 아기로 오신 하느님이 이태원 참사로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한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는다. 하느님은 이 땅의 가장 작고 연약한 자리, 고통과 슬픔, 소외가 흘러들어 고이는 자리에 오셔서, 그 자리에 버려진 듯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신다. 바로 이 자리에 슬픔을 억누르며 함께하고 있는 우리와 함께하신다"면서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또한 유족분들과 생존 피해자, 지역 주민과 상인분들을 홀로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날의 슬픔을 기억합니다. 그날의 충격과 아픔이 응어리가 되어 체한 듯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충격과 슬픔, 비극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결코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들고 먹고 즐기며 다시 일상을 산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거나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 충격과 슬픔, 비극에 대한 기억이 한처럼 남지 않으려면 우리가 다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히 애도하고, 그런 애도를 거치며 구성된 우리의 이야기가 기억으로 또 다르게 이야기되며 기억돼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을 덮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을 없었다는 듯이 누르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과 이야기는 사건에 대한 분명한 진실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우리의 온기가 만나 또 다른 기억과 이야기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참가자들은 합동 분향소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두 손을 모으고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가자들은 녹사평역 합동 분향소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두 손을 모으고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하는 시간도 있었다. '유족이 동의한 희생자를, 원하는 방식으로 공개한다'는 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의 원칙에 따라, 희생자 79명의 이름이 호명됐다. 이들은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희생자들과 유가족, 생존 피해자, 지역 주민과 상인, 구조자들에게도 위로가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들과 더불어 살며 아픔을 함께 나누게 해 달라고도 했다.

자캐오 사제는 참석자들에게 녹사평역 합동 분향소에 때마다 함께해 주기를, 유가족들과 상인들이 마음을 모아 이태원역에 재단장한 애도와 기억의 공간을 찾아 주기를 당부했다. 이어 '평화'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게 아니라, 짙고 어두운 어둠 가운데서도 빛으로 오신 하느님, 진실을 밝히시는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소개했다. 유가족과 참석자들은 서로를 향해 '평화'를 빌며 예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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