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아들 예준이 성소수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0.0001%'도 해 본 적 없었다. 어릴 때부터 똑바로 서서 사진 찍는 법 없던 유쾌한 아이였다. 커서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될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학창 시절을 거치며 하루가 다르게 의기소침해져 갔다. 어느 저녁 식사 시간, 예준은 식탁 위에 편지를 두고는 "다 읽고 나중에 만나는 게 좋겠다"며 집을 나갔다. 비비안(활동명)은 편지를 펼치며 눈에 들어 온 첫 문장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저는 남성 동성애자예요."

한결은 어렸을 때부터 가슴 제거 수술을 하고 싶었다. 가슴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고, 가슴을 이유로 여성으로 분류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매일 샤워를 할 때면 몸이 보이지 않도록 불을 껐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한결은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트랜스젠더'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던 어머니 나비(활동명)에게, 한결은 수술을 받은 후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성별대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나비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자녀 예준·한결을 둔 엄마 '나비'(사진 왼쪽)와 '비비안'의 이야기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자녀 예준·한결을 둔 엄마 '나비'(사진 왼쪽)와 '비비안'의 이야기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어느 날 자녀의 커밍아웃을 겪은 '나비'와 '비비안'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비는 34년 차 소방공무원, 비비안은 27년 차 비행 승무원이다.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자녀가 성소수자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때때로 마주했지만, 자신과 관련없는 다른 존재로 여겼다. 나와 다른 이를 타자화하는 일. 어쩌면 성소수자라는 단어조차 낯선 부모 세대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소수자 자녀들은 부모의 세계를 뒤흔들 강력한 물맷돌 하나를 던졌다. 가장 긴밀했던 세상과 가장 멀어질 각오를 하면서.

다큐는 자녀의 커밍아웃을 들은 부모들의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 준다. 나흘을 펑펑 운 이도, 자녀에게 "네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이도,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은 균열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만나면서 봉합되고 연결된다. 성소수자 가족을 받아들이는 낯선 경험이 세상에서 자신과 아이 단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의 시간을 겪었을 자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앨라이(Ally·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가 돼 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캐나다 퀴어 문화 축제에 예준과 함께 참여한 비비안이 밝게 웃는 장면은 영화에서 단연 압권이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캐나다 퀴어 퍼레이드에 예준과 함께 참여한 비비안이 밝게 웃으며 행진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단연 압권이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성소수자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비비안은 아들 예준과 함께 캐나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해 걸으며 "I LOVE MY GAY SON"이라고 적은 피켓을 머리 위로 높이 든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호응에 희열을 느끼면서, '왜 성소수자들이 일생에 한 번이라도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고 말한다. 반면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서 개신교 반동성애 혐오 세력의 거센 항의와 폭력을 목격하면서는 차별과 혐오에 노출된 성소수자의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맘 놓고 때릴 수 있는 세상. '우리 아이들이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깨달은 거죠. 부모님이 퀴어 축제에 나와서 그런 혐오의 시선을 대하면, 무서워서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데 나가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요. 그걸 보고 나면 또 투사가 되더라고요.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부모라도 싸워야지.' 그런 생각들을 다들 하는 것 같아요."

개신교 반동성애 혐오 세력은 2018년 10월 3일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한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들을 향해 고성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했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개신교 반동성애 혐오 세력은 2018년 10월 3일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한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들을 향해 고성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했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나비·비비안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활동가로 성장해 나간다. 예준의 애인을 만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쿨한 엄마' 비비안은 2019년 11월 13일 동성혼 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 진정 기자회견에서 나선다. 나비는 한결의 법적 성별 정정 과정을 통해 성기 모양에 근거한 이분법적 성별만을 인정하는 사회에 맞서 물음을 던진다. 2018년 10월 18일 성기 재건 수술과 생부의 동의서를 받지 못했다며 한 차례 기각 통보를 받은 한결은, 1년 후 법원으로부터 성별 정정 허가를 받게 된다.

물론 모든 성소수자의 부모가 자녀의 커밍아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그럴수록 성소수자부모모임은 매년 퀴어 문화 축제에서 프리 허그 캠페인을 열고,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등 성소수자 자녀·부모 가시화에 힘쓴다. 성소수자 부모는 모두 외롭고 힘들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무수히 다양한 정체성 속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너에게 가는 길'은 부모들이 성소수자 당사자에게 다가가는 여정이자, 스스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은 매년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하 성소수자들을 향한 지지의 마음을 담아 '프리 허그'를 진행한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성소수자부모모임은 매년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하 성소수자들을 향한 지지의 마음을 담아 '프리 허그'를 진행한다. 사진 제공 (주)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은 여성주의 미디어 공동체 '연분홍치마' 소속 변규리 감독이 나비·비비안의 일상을 따라가며 4년에 걸친 취재·촬영 끝에 만든 영화다. 성소수자부모모임 월례 정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변 감독의 제안에 나비·비비안은 성소수자 부모의 삶을 알리기 위해 참여했다. 2021 썸머프라이드시네마, 22회 전주국제영화제, 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3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11월 17일 극장에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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