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변곡점들을 맞이하게 된다. 내게도 뚜렷한 전환의 계기가 여러 번 있었고, 그중 하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가 될 수 없었던 교단 상황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던 상황은 30살이 넘도록 제주도 한 번 못 가 봤던 나를 미국으로 건너가게 만들었고,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질 다양한 경험을 했다. 세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났고,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 다른 교수·동문들도 만났다. 

그 경험들은 나의 안수 과정과 학위 과정의 '히든 커리큘럼(Hidden Curriculum)'이 됐다. 교육학 용어인 히든 커리큘럼은 '가려진 교육과정'으로,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은연중에 배우게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다양성 수용도·이해도'는 내가 속했던 미국장로교회 안수 과정과 클레어몬트신학대학교 학위 과정의 필수 기반이 되는 요소였다.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그 모든 과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인생의 히든 커리큘럼 스승들이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나의 '함께고통함께평화' 현장은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을 만난 즈음 알게 된 '하늘'이라는 분과 그가 대표로 있는 '성소수자부모모임(Parents and Families of LGBTAIQ People in Korea)'이다. 이 모임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LGBTAI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sexual, Intersex, Qustioner)로 알린 자녀의 모부와 가족, 당사자들의 모임이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며 서로 격려하고자 2014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함께고통함께평화'의 현장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이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홈페이지 갈무리
이번 글에서 소개할 '함께고통함께평화'의 현장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이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홈페이지 갈무리

나는 2004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2017년까지 성소수자 인권을 주제로 강의·설교 등 공적인 활동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독일 교회의 초대를 받아 인도에서 '여성, 가난 그리고 HIV/AIDS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 워크샵에 참여한 뒤 보고서 성격의 연구논문을 발표한 일도 있고, 개인적으로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성소수자와 지인들을 상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교회 내에 성소수자들의 아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았음에도, 성소수자 인권 문제와 관련한 어떤 공론의 장에 초대되거나 활동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맞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행사는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교회 내에 숨겨진 성소수자 인권 이슈를 대면하고 돌보라는 듯, 성소수자 인권 관련 사건·이야기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하늘'을 만난 건 2019년 10월 29일 장로회신학대학교 무지개 행동 피해 학생들이 기획한, '모든 사람의 수다회'를 통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하늘은 13년 전 아들의 커밍아웃이 가져다 준 자신과 가족의 변화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그는 "아들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2년간 교회 본당 안 기둥 뒤에 숨어 앉아 아들을 바꿔 달라며 하느님께 매달린 시간을 비로소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길지 않은 한마디에 성소수자 당사자인 아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알게 된 엄마 '하늘'의 아픔이 얼마나 깊었을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픔만이 아니라 자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한 그의 용기와 사랑 역시 온 청중의 박수를 받았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캄캄한 밤 시간이었지만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동트는 새벽 같은 친구가 됐다. '하늘'은 전화번호를 건네며, 자신을 포함한 성소수자와 모부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커밍아웃 스토리>(한티재)에 관한 설명도 해 주었다.

초대는 또 다른 초대로 이어지는 것일까. '모든 사람의 수다회'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하늘'은 내게 '성소수자 부모 정기 모임'에 와 줄 수 있냐고 초대했고, 나는 기꺼이 함께하겠노라고 응답했다. 코로나19 이전이라 모임에는 꽤 많은 청년과 모부가 함께했다. 모임 장소는 원형(Circle)으로 배치돼 있었는데, 원의 안쪽 자리에는 처음 나오신 모부들이, 바깥쪽 자리에는 자녀들과 다른 청년들, 성소수자부모모임 회원 활동을 하는 모부들이 자리했고, 나 역시 바깥쪽에 함께 앉았다.

사회자는 다양한 사람이 함께하는 모임이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고, 이해와 소통을 위한 자리이므로 부드러운 표현과 존댓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사진은 동의를 받아 촬영하고, 누구라도 불편하면 사진이든 표현이든 거절할 수 있다는 점도 말해 줬다. 이날 모임의 대화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 진행됐다.

처음 참여한 모부들이 털어놓은 마음은 제한된 지면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었지만, 함께 울고 웃으며 2시가량 대화를 나누고 모임을 마칠 즈음 돌아보니, 어느새 밝아진 표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모임이 지닌 깊은 연민과 사랑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임을 통해 깨달아 나누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지만 몇 가지만 나누고자 한다. 

첫째, 나는 모부들의 자기소개 방식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모임은 참여자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는 '모두의 시간'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한 부분에서 내 귀가 쫑긋 열렸다.

"저는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Bigender, Panromantic, Asexual)'로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의 엄마입니다. 활동명은 '나비'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모부들의 고유한 자기소개와 그들이 나눠 준 이야기는 재미도 있었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한 손에는 "나는 나의 게이 아들을 사랑한다(I love my gay son)"라는 피켓을, 다른 한 손에는 아들의 손을 잡고 캐나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했던 '비비안'도 알게 됐다. "성소수자부모모임 안에서 제 역할은 유일한 아빠?"라며 언제나 유머를 장착하고 소개하는 한 아빠는, 어느 인터뷰에서 "좋은 부모란 나쁜 부모가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부모는 자식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 같아요. 자식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도록 돕는게 착한 부모고, 그러려면 자식을 놓아야죠"라고 했다. 자식을 낳기만 할뿐 아니라 놓기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게이 아들을 받아들이면서 이 이슈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연구하며 전문가 활동을 하게 된 엄마도 있다. 이 모임에 함께하고 있는 참여자 중에는 아직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지 않고 있는 성소수자 청년들도 있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회원들은 자신의 자녀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품고 지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단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정체성'이나 '가족'은 없다. 자신이 살아온 규범적 경계의 외연을 되도록 평화롭게 넓혀 가고자 하고, 자기 정체성을 자녀의 정체성으로부터 표현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아들아 엄마는 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아들아, 엄마는 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둘째, 성소수자부모모임에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에 놀랐다. '하늘' 역시 교회 본당에서 반주를 할 만큼 성실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이성애자·신학자·목사인 내게 다가와 '권사'라고,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분들도 있었다.

급기야 작년 4월에는 내가 속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측 목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분은 총회 동성애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그분의 동의를 구하고 밝힌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분은 어렵고 복잡해진 마음을 열고 얘기할 사람을 찾다가 나에게까지 왔다며 자신의 심경을 나누고 돌아갔다. 나는 그분을 성소수자부모모임에 모시고 갔고, 그래서 어느 달에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목사 아빠 세 명이 모임에 참여한 날도 있었다.

성소수자들은 교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만일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성소수자가 있다면 그 교회가 성소수자 친화적 교회이기 때문이고,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면 그 교회가 그들과 관련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서이며, 만일 성소수자가 교회에 없다면 그들이 그 교회를 버린 것이다.

셋째, 성소수자 자녀를 편들고 자신들 스스로를 돕기 위해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같은 마음으로 동참한다. 소수자 인권 확장을 위한 목소리가 들려지는 현장 어디든 성소수자부모모임의 모부들이 있다. 1년에 한 번 있는 퀴어 문화 축제 때마다 모부들이 진행하는 '프리 허그'는 보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모부들은 "자녀들의 커밍아웃이 우리를 성숙한 시민으로 변화시켰다"고 즐겁게 증언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활동을 고맙게 여긴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020년 1월, '이돈명 인권상'을 시상했다. 시상식에서 '하늘'은 "차별과 혐오로 인해 벽장에 갇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혐오가 무섭고 고통이 힘들어 먼저 가신 분들께 이 상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을 향한 사회적 인정과 치하는 올해도 이어졌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활동을 기록해 온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하늘' 대표(사진 왼쪽)와 프리다. 사진 제공 프리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하늘' 대표(사진 왼쪽)와 프리다. 사진 제공 프리다

'하늘'은 내 곁에도 함께해 줬다. 2020년 10월 30일 차별금지법 제정과 교회 개혁을 위한 '예장통합 교회에 외치는 종교개혁 선언문' 발표일에도 그 자리에 찾아와 나를 격려하며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상처를 품으며 자기 고통을 성찰한 자들의 자비는 연대로 이어진다. 이 사실은 '함께고통함께현장' 어디에서도 드러난다. '여성'이라서 31살에 한국 밖으로 나갔던 나는, 이제 '성소수자 앨라이(Ally)'라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단 밖으로 나왔다. 이제 한국 안에서 내가 깃들 만한 교단을 향해 발길을 내딛으려 한다. 그 연대의 길에서도 '하늘'과 나는 서로의 친구일 것이다.

"'하늘'은 왜 '하늘'이에요?" 상대가 말하기 전에는 사적인 질문을 잘 하지 않아 활동명의 뜻도 잘 모르는 채 3년째 친구로 지내 온 '하늘'에게, 이 글을 쓰며 처음으로 그 뜻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에요. 잊지 못하고 있어요. 늘 기억하려고 제 이름으로 붙였어요. 또 저의 신앙과도 연결된 이름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런 모습으로 잘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영혼 구원의 소망도 담겨 있어요."

부드럽고 단아한 모습만큼이나 아름다운, 모든 존재를 향한 '하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이, 한국교회 교우들과 하나님께 드려지길 바란다. 함께고통함께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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