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3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영화 평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정한 님이 쓴 글입니다. 평론 대상 영화는 폴 슈레이더 감독의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2017)'입니다. - 편집자 주

폴 슈레이더의 영화 '퍼스트 리폼드'(2017)는 시작 숏(shot)부터 관객을 묘한 분위기로 이끈다. 카메라가 천천히 다가가 하얀 교회 건물을 비춘다. '퍼스트리폼드처치'는 그다지 큰 교회가 아닌데도 카메라가 땅의 시점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수직적 효과를 두드러지게 하며 일종의 위엄이나 권위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한편 어둡고 흐린 날씨와 함께,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가 한 앵글에 담긴 교회는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위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초라해 보이는 교회, 그리고 시점의 주체를 땅(지구)으로 삼은 이 숏은 '퍼스트 리폼드'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는다.

이 신비한 도입 숏에는 4:3 비율의 화면도 한몫한다. 4:3 비율은 상대적으로 단일 피사체에 대한 집중도를 향상시키고, 수직적 효과를 보다 잘 나타내 피사체를 한 프레임 안에 꽉 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소 답답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데, 이를 통해 '퍼스트 리폼드'의 주인공 에른스트 톨러 목사가 지속적으로 겪는 내면의 고뇌와 심리적 고통을 잘 나타내 준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 갈무리
영화에 등장하는 퍼스트리폼드처치의 모습. 영화 '퍼스트 리폼드' 갈무리

아들이 죽은 후 아내와 이별해 홀로 살아가고 있는 톨러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의욕을 상실한 것같이 보인다. 하루하루 겨우 살아 내는 것처럼 보이는 톨러는 육필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1년 뒤에는 일기를 찢고 불태우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작고 낡은 곳곳을 겨우 수리해도 이내 다시 고장 나는 퍼스트리폼드처치는 '관광 교회'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제스퍼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대형 교회 '풍요의삶교회'의 지원 덕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퍼스트리폼드처치는 관광 대상으로 전락해, 250주년 기념 예배에도 지역 출신 정치인이나 기업가를 초청해야 할 처지인, 허울뿐인 교회다. 교회는 교회의 본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톨러 역시 예배 형식을 그저 재현하고 제스퍼가 지시하는 대로 업무를 처리하며, 주체가 아닌 객체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교인 메리의 남편이자 급진적 환경 운동가인 마이클과 대면하며 희열을 느낀다. 톨러는 이후 몇 차례의 사건을 겪으며 그간 자기 내면의 고통에 침잠한 채 외면해 왔던 교회의 부패한 현실과 죽어 가는 생태계의 위기를 목도하고, 마이클이 이루지 못했던 소명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슈레이더는 젊은 시절 비평가이자 이론가로서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를 집필해 영화의 '스타일'이 드러내는 초월성을 이론화했다. 이 초월성은 배우의 감정이나 연기 혹은 음악 등을 통해 만드는 초월성과는 다른 것으로, 초월적 이미지 자체보다는 "초월에 접근하는 방식을 재현"하는 것이다. 슈레이어가 천착했던 '초월적 스타일'이 '퍼스트 리폼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슈레이더가 '신비한 마법 여행(magical mystery tour)'이라고 칭한 장면에 앞서, 톨러가 집에 찾아온 메리를 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 주러 나가는 장면이 초월적 스타일을 잘 보여 준다. 톨러의 내면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은 텅 빈 집을 4:3 비율 화면이 멈춰진 채 담고 있는데, 보통의 영화가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 움직이거나 혹은 멈춘 화면의 프레임 안에 피사체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반면, 여기서 톨러는 화면의 '외부', 혹은 세계의 외부로 걸어 나갔다가 메리와 함께 돌아온다. 톨러의 내면을 나타내는 텅 빈 세계로부터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메리와 함께 들어오는 이 숏을 통해, 그의 내면에 모종의 변화가 찾아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 바깥으로의 이행을 통한 초월성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메리는 남편 마이클과 했던 명상의 일종인 '신비한 마법 여행'을 톨러와 함께 한다. 어쩌면 코믹하게 혹은 섹슈얼하게 그려질 수 있는 장면에서 둘의 몸이 포개지는데, 카메라는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숏을 길게 잡으며 관객 또한 마법 여행으로 초대한다. 슈레이더의 말대로라면 관객들이 그 장면을 보고 "생김새가 어떻게 다른지, 얼굴형은 어떤지" 관찰하며 점차 그 명상의 시간에 참여할 때, 톨러와 메리는 느닷없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한편 마법 여행이 시작되려는 순간, 톨러 위에 있는 메리의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일종의 장막이 톨러를 감싸고, 그렇게 둘은 공중에 떠올라 아름다운 지구 곳곳을 비행한다.

생태계의 맑고 푸름을 한껏 누리며 비행하던 톨러가 메리의 머릿결을 걷어 내는 순간, 즉 자신을 감싸던 장막을 걷어 바깥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기술 문명의 세계로 진입해 파괴된 지구의 참상과 마주하게 된다. 상징 세계 바깥을 체험하며 실재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이 마법 여행으로 톨러는 더 이상 좌절과 자기 파괴 안에 갇혀 있을 수 없게 된다. 내면의 좌절과 외부의 고통 속에서 갈등하며 술에 소화제를 섞어 마셨던 톨러가, 이제는 그저 고뇌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 포스터.

성서의 다니엘서에서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요한계시록에서 사탄과 싸워 물리치는 군사로 나타나는 천사 '미카엘'을 암시하는 마이클은 창조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분투했고, 그 죄악에 맞서기 위해 자살 폭탄 테러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어떤 좌절감 때문에 홀로 자살한다. 33살의 나이에 죽은 마이클, '마리아'를 상징하는 메리와의 만남을 통해 톨러는 마이클이 이루지 못한 미션을 이어 받는다.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지역 출신 정치인·목사·기업가가 모인 퍼스트리폼드처치 250주년 기념 예배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실행하기로 결단한다.

여기서 등장 인물들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하자. 33살의 마이클(미카엘)이나 임신한 메리(마리아)와 같이 다소 직접적으로 성서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징검다리로 보인다. 이들의 뚜렷한 상징적 이름과 비교했을 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주인공 톨러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종을 '울리다'의 영어 표현은 'ring'이 아니라 'toll'이다. 이는 '조종弔鐘'을 울리는 것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행위다. 따라서 톨러(toller)는 조종을 울리는 사람을 의미하며, 그가 알리는 것은 좁게는 '교회'의 죽음, 넓게는 '생태계'의 죽음일 것이다.

퍼스트리폼드처치는 우리말로 '제일개혁교회'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리폼드처치'는 개혁교회를 의미하고, 그 앞의 '퍼스트'는 그 교회가 뉴욕 올버니 지역에 처음 세워진 개혁교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교회는 '리폼드처치', 즉 과거형 시제로 '개혁된 교회'를 의미한다. 종교개혁으로부터 500년, 그리고 교회 설립으로부터 250년이 된 과거의 역사를 함축한 이름이다.

영화는 '퍼스트 리폼드'라는 과거 시제를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이야기 형식은 철저히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된다. 이야기의 시점이 톨러 목사의 일기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500)과 250년 전 퍼스트리폼드처치 설립(-250)의 숫자를 따른다면, 영화의 현재 시점인 2017년은 '0'의 시간으로, '현재'를 강조하고 있다.

영화라는 형식의 특성상, 시간 순서의 제약 없이 과거를 회상하거나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지만, '퍼스트 리폼드'는 오롯이 시간의 정방향을 따라가며 '현재' 시점을 꼭 붙들고 있다. 이렇게 과거-현재의 시간 관계를 이용한 영화 구성은 그 자체로 슈레이더가 실행한 초월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기술 문명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 갈무리
영화는 기술 문명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 갈무리

이제 영화의 결말부를 이야기하자. 다분히 당혹스러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랑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 폭력적 저항에서 자기 파괴로 이행하지만, 파괴하는 양쪽의 행위 모두를 지양하는 비폭력적 사랑을 이루라는 교훈적 가르침일까? 슈레이더의 초월적 스타일을 고려한다면, 마지막에 톨러와 메리가 조우하는 장면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로 직전 제스퍼는 잠긴 문을 열지 못했지만, 메리는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와 있다. 게다가 슈레이더는 해석의 자유를 관객에게 넘긴다면서도 "방이 이전과 달리 밝아졌으며 (메리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러닝타임 내내 고정돼 있던 카메라 앵글은 톨러와 메리가 키스하는 순간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역동적인 장면을 만든다. 그리고 관객이 이 느닷없는 키스로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을 때 화면은 암전된다.

해석되지 않는 이 환상 속의 키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톨러가 자신의 몸에 감은 철조망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 톨러와 메리가 몸을 더 강하게 밀착할수록, 몸에 감긴 철조망 때문에 더 큰 고통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포옹과 키스라는 행위가 함의하는 것이 '윤리적 이상에 다가서는 쾌락'이라고 상정해 보자. 쾌락으로 향할수록 수반되는 고통은 더 강해지지만, 그 고통을 경유해야만 비로소 윤리적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이러한 양태, 즉 '고통을 수반한 쾌락'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가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철조망이 파고드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쾌락은 톨러가 진정한 주체로 태어나고 있음을 함의하는 장면이다.

톨러가 충만한 주체로 태어나는 도중에 화면은 암전되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종결을 통해 관객은 다음 이야기로 이끌려 간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과거-현재'의 구성 이후, 즉 미래에 관한 질문이다. '최초의 개혁(first reformed)' 이후 우리 눈앞에 놓인 이 암흑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암울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톨러의 고뇌와 함께 우리에게도 여러 선택지가 던져진 셈이다. 직접적 대상을 향해 폭력적 수단과 함께라도 조종을 울릴 것인가? 혹은 불의한 희생을 막기 위해 자기 파괴로써 '저항의 장례'를 치를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잉태한 이에게 입 맞추며 더 나은 사랑을 일궈 갈 것인가? 충만한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0의 시간'은 현재인 동시에 공백의 시간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무궁무진한 미래를 향한 선택지가 놓여 있기 때문이고, 창조적 행위의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과 더불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몽타주를 재조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흥미로운 방법으로 재조립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것이 될 것"이라는 슈레이더의 말을 참조한다면, 과거의 산물을 딛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메시지는 구체적인 해답이 아니다. 초월적인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함으로써, 오히려 괴로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것은 아닐까. "Will God forgive us?"

이정한 / 감리교신학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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