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은 하나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이 흐름을 바꿀 만한 뾰족한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 개혁'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접근하기보다 교회가 바꿔 나가야 할 것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교계에는 젊은이들의 목소리, 특히 여성들의 목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외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겠지요. <뉴스앤조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성 신학생·사역자들의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 기자 주

- 이런 가정이 좀 웃기긴 하지만, 본인이 남자였다면 그냥 별 고민 없이 목사가 되셨겠네요.

- 어우, 날아다녔겠죠~(웃음) 진짜 날아다녔을 것 같아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실 제가 사역할 때는 정말 열심히 했고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를 많이 찾아 주셨거든요. 만약 제가 남자였다? 그럼 벌써 서울 한복판에… 와….(웃음)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김예리 씨(33)는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다녔을 것"이라고 우스개를 던졌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7년간 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일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역도 꾸준히 뛰었다. 찬양과 율동이 '특장점'이었다. 주변에서 섭외가 잦았다. 날아다녔을 것이라는 말은 수사적인 과장이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좀 더 진중했다.

"적어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교회에 망설이지 않고 이력서를 내 볼 수 있을 정도는 됐을 것 같아요. 되고 안 되고야 제가 정하는 일이 아니니 모르는 거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자신감과 용기는 있지 않았을까…. 여자였는데도, 그래도 이 로컬 안에서는 많이 찾아 주는 사람이었니까, 아마 남자였다면 자신감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지영 씨는 찬양 사역자로 살고 싶다. 
예리 씨는 지역에서 찬양·율동 강사로 사역을 종종 다녔다. 

이 당차면서도 진중한 인재는 현재 목회를 접은 상태다.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알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만두지 않겠다'는 각오로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각오는 두 학기 만에 꺾였다. 당시는 페미니즘을 공부했던 때도 아니었는데, 그가 교회에서 보고 경험한 일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한 차별이 명백했다. 감정 소모가 심했다. 불만들을 기도로 풀어내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보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다고 느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목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제가 정말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도 소셜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과 성경 말씀을 나누는 모임을 해 봤어요.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말씀 나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성경 이야기를 전해 주는 걸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어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속마음은 다시 목회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마음따라 해낼 자신이 없어요. 내가 목회를 원한다고 해서 교회에 만연한 이 성차별적 현실을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난 이제 그런 게 다 보이는데. 나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목회자 세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내 '내 안에 그런 지속적인 힘이 있을까', '다시 시작한다면 이번에는 멈추지 말아야 할 텐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도전을 못하는 거죠."

각오하고 들어간 신대원에서 두 학기 만에 그만두게 됐다. 
각오하고 들어간 신대원에서 두 학기 만에 그만두게 됐다. 
마음은 청소년 사역, 현실은 유치부 사역

어영부영 신학대학교에 진학했다. 가정 형편 등 여러 상황이 겹쳐 원래 가고 싶었던 대학에 못 가게 되면서 길을 잃었다. 마침 교회 전도사가 신학대학교에 진학해 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기독교교육학과에 가게 됐다. 예리 씨에게는 입학 계기보다 졸업까지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순간 불타오르는 뜨거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휴학 중 교회 수련회에서 소명을 받는 뜨거운 체험을 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목회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확신을 갖고 신대원에 입학했다. 신대원에 가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예리 씨도 그랬다. 여성이어서 좀 더 힘들 거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목회자의 길을 가며 힘들어하는 여성을 많이 봤다. '여성이지만 현실을 이겨 내 보면서 목사 안수를 받으리라', '여자라는 이유로 그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년 후 학교를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엄청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교회라는 조직·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관행처럼 진행되는 많은 일이, 명백하게 틀린 부분마저도 고쳐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모습이 싫었어요. 예를 들어, 제가 교회 사역할 때 여성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그분은 그냥 '심방 목사'라는 타이틀로 계속 정체돼 있고, 남성 목사들만 자꾸 바뀌어 가며 교구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분이 다른 남성 목사보다 안수도 먼저 받고 교회에도 먼저 왔는데 말이죠. 그 모습이 제 미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여성 사역자는 특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남성 사역자는 기타도 칠 줄 모르고 특별히 잘하는 것 없어도, 교육부서 하다가 때 되면 안수받고 부목사나 담임목사로 가는데 말이죠. 그냥 설교만 할 줄 알아도 앞으로 잘 나가는데. 왜 여성 사역자는 꼭 특장점이 있어야 하고, 잘하는 게 있어도 계속 제자리일까…. 이런 불만들이 조금씩 쌓여 갔던 것 같아요."

목회자 세계에서 '다과상 차리기' 같은 일은 여성들이 챙기는 관행도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남성 파트타임 전도사들 먹을거리도 한참 선배인 여성 목사가 챙겨 줬다. "아니, 상하 관계를 그렇게 따지는 집단에서 왜 이런 일은 성별로 나뉘는 거냐고요. '부엌일'이라고 하는 것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여성 사역자에게 맡겨졌어요."

그렇다고 교회나 교단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소수의 여성 목사들을 봐도 존경스럽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엿보이는 남성적인 권위가 불편했다. 그들은 교회 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기보다 이미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자기 권위를 행사하는 것 같았다. "다른 남성 목회자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이더라고요. '저기까지 올라가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 사역자는 '특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특장점이 있어도 제자리인 경우가 흔했다.
여성 사역자는 '특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특장점이 있어도 제자리인 경우가 흔했다.

7년간 사역하며 교회 3곳을 거쳤는데, 만년 유치부였다. 하고 싶은 건 청소년 사역이었다. 청소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유독 마음이 갔다. 사역자가 아니라 그냥 교인으로서 교회를 다닐 때는 언제나 청소년부 교사였다. 사역지를 찾을 때도 언제나 청소년부 사역을 지원했지만 결과는 유치부였다. 유치부가 싫었던 게 아니다.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 교회에 중등부 사역자로 이력서를 냈는데 거기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가 대놓고 공고에는 못 썼지만, 청소년부 사역자는 남자를 원한다. 근데 이력서를 보니 너무 마음에 든다. 우리 교회에서 유치부를 담당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제 이미지가 유치부 사역자는 아니지 않나요? (예리 씨는 숏 커트에 파마머리, 캐주얼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역지는 다 유치부였어요. 미혼 여성 전도사는 청소년부를 할 수 없다는 유리 천장이 있는 거죠. 외부 사역할 때는 청소년부에도 많이 나갔는데, 그것도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더라고요. '여성 사역자가 한 번 와서 하는 건 괜찮지만 매주 있는 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유치부 사역은 즐겁게 했는데, 사역지를 옮길 때 이력서 내는 과정은 매번 힘들었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이력서를 낸 게 서른 살 때인데요.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청소년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또 좌절된 거예요. 저에게는 어느새 유치부 사역이 특장점이 돼 있었던 거죠. 남성 사역자에게는 한 번도 안 해 본 일도 가능성을 보고 맡기는데, 여성 사역자에게는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거 해'라는 식이에요."

"치마 입어 볼 생각 없냐", "머리 길러 볼 생각 없냐"는 말도 교회에서 숱하게 들었다. 개중에는 정말 호기심에 그런 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복장과 헤어스타일은 여성 사역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는 이도 있었다. "중고등부 학생들만 해도 말로 상대할 수 있거든요. 근데 유치부 아이들과는 몸으로 놀아 줘야 해요. 근데 치마를 입으라니 어쩌라는 거야. 자기들이 유치부 시켜 놓고.(웃음) 머리 얘기 나올 때도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이게 편해서 그래요'라고 답하고 말아요. 저는 이게 좋거든요."

20대부터 짧은 머리였다. 짧은 머리가 좋아서 하고 다닐 뿐이다. 
20대부터 짧은 머리였다. 짧은 머리가 좋아서 하고 다닐 뿐이다. 
결혼과 육아, 나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접한 건 신대원을 그만두기로 작정한 이후다. 그전에는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강성 이미지가 떠올랐다.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다. 그랬던 예리 씨도 가정·학교·교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부당함은 늘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번뜩이는 계기였다기보다는, 인생에서 누적된 경험들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장치였다. 생각의 흐름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겪었던 부당함에 언어를 붙일 수 있게 된 것뿐.

"인터뷰 끝나고 집에 가면 어두워질 거 같은데요. 제가 만약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두운 길을 걷는 것조차 무서워져요. 제가 머리가 짧고 옷을 편하게 입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를 남성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조금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는 자신을 '비혼주의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에도 결혼과 육아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상대방의 가족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예리 씨에게는 쉽지 않은 일로 다가왔다. 육아는 더 어렵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책임질 만한 깜냥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은데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이 세상에 내던져 놓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신대원은 남성 학생들에게는 한편으로 '짝 찾기'의 장이었다. "여기서도 짝 못 찾으면 바보다"라는 말이 남성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돌았다. 결혼·육아에 관심이 없었던 예리 씨는 그런 분위기가 싫었다. 예리 씨가 있는 자리에서 남성들이 "멀리서 찾을 이유 뭐 있어. 여기 있잖아", "여자 입장에서는 남자들 많으니 골라 갈 수 있는 거 아냐?"라고 말하는 일도 있었다. "어후… 지금 생각해 봐도 진짜 너무 싫어요.(웃음) 아니,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니까?!"

"결혼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교회가 결혼을 신성시하면서 권하는 건 좀 갸우뚱해요. '돕는 배필'이라는 말을 남편 뒷바라지하는 정도로 생각하면서 결혼을 추천한다는 건, 여성들을 그 정도로 본다는 의미 아닌가요? 출산의 고통도 일종의 저주로 해석하잖아요. 저는 그런 게 싫어요. 결혼과 육아를 생각하면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제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자유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안타까운 건 여성 사역자들이 아이를 낳으면 열에 아홉은 그만둔다는 사실이에요. 제 주변을 봐도 너무 아까워요. 달란트가 참 대단한 사람들인데…. 이런 얘기하면 좀 그렇지만, 지금 남편보다 월등히 잘하는 사람들인데 말이에요. 그냥 사모와 엄마 역할만 하면서 지내는 거예요."

대부분 여성의 삶이 남편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수렴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 면에서 예리 씨는 최근 어머니를 새삼 존경하게 됐다. 어머니는 수년 전부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10km를 달린다고 한다. "여성으로 살면서 자기 신체 건강을 유지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근력 운동은 20대 남성보다 50대 여성에게 더 필요한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정말 존경스러워요. 남들은 엄마랑 만나서 쇼핑 가고 한다는데, 저희는 만나면 운동 가요."(웃음)

나만 단단해져서 될 일인가…
비슷한 어려움과 문제의식을 가진 여성 사역자가 많을 텐데, 이야기 나눌 공간이 부족하다.
비슷한 어려움과 문제의식을 가진 여성 사역자가 많을 텐데, 이야기 나눌 공간이 부족하다.

신대원은 이미 접었고, 지금은 일반 직장에서 일하며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싶다는 삶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그 도구가 목회자였고 이미 2년 전 그 길에서 돌아섰지만,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역에 대한 열망을 발견하고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교계가 여성 사역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면 예리 씨도 좀 더 편하게 선택할 수 있을까.

"안타깝다는 감정이 지배적이에요. 교계를 봐도 그렇고 나를 봐도 그렇고…. '내 내면이 좀 더 단단해지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만 단단해져서 될 일인가' 싶은 거예요. 이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힘들 것 같아요. 어떤 변화의 실마리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교회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예리 씨는 여성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함께 모여 이야기해야 뭐라도 나올 텐데, 그런 장 자체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과 같은 젊은 여성 사역자와 신학생, 목회자 아내 등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한데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없으니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도 '교회나 교단의 힘 있는 사람들이 나서 줘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역사는 민중이 만들었다는 말도 있듯이 교회 안에서 작은 독서 모임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거죠. 나만 불편한 게 아니라는 공통의 문제의식이 생겨야 할 것 같아요. <비혼주의자 마리아>(IVP) 같은 현실 고발적이면서도 쉬운 책들을 읽으면 어떨까요. 좀 더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우리는 성경을 남성 중심적인 사고로 봐 왔잖아요. 성경 자체가 쓰인 배경이 고대이기 때문에, 여성 이야기는 숨겨져 있거나 행간에 있죠. 하나님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성경을 지금 시대에 맞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봐요. 급변하는 사회가 성경을 다시 보게끔 도전하고 있는데, 정작 교회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성경 속에 숨겨진 여성 이야기를 찾고 이야기하면 그 뒤는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요? 이상적이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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