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2018년 5월에서 8월까지

"이창기 학생은 근신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봉사 100시간, 반성문 제출, 지도 교수와의 면담을 이행해야 합니다. 징계를 받은 학생들은 신학대학원장과 본인들이 사역하고 있는 교회 담임목회자들과 함께하는 2박 3일 기도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2018년 7월 26일, 약 두 달간의 조사를 거쳐 징계위원장이었던 신학대학원장이 통보한 징계 내용이다. 그렇게 나와 내 친구들은 모교 장로회신학대학교로부터 부당한 징계를 받았다. 2018년 5월 17일, 당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던 나는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 아이다호데이)'을 맞이해 '성소수자들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자 친구들 7명과 무지개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일렬로 앉아 채플에 참석했다. 예배 후 우리끼리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이후 우리의 행동은 소위 '장신대 무지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막론하고 개신교 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어떻게 해서 '퍼포먼스'라는 단어가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단어를 붙이기에 우리의 행동은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무지개 퍼포먼스'보다는 '무지개 행동'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소극적인 무지개 행동의 실상은 '옷 색깔을 맞춰 입은 것' 외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얌전히 예배를 드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실천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날 이후 학교는 조사위원회와 징계위원회를 꾸렸고 남은 학기와 방학 기간 우리를 수차례 소환한 끝에 결국 징계를 내렸다.

누구는 '근신', 누구는 '엄중 경고', 누구는 '정학'. 신대원장의 통보를 듣고 있는데 정신이 멍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왜 모두가 같은 행동을 했는데도 징계 수위가 다른지, 옷 색깔을 맞춰 입고 얌전히 예배에 참석한 것과 그들이 내세운 징계 사유(교수 지도 불이행, 수업 방해, 불법 집회 개최, 학교 명예훼손)는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의문만 우후죽순으로 늘었다.

'장신대 무지개 행동' 학생들이 2018년 5월 17일 채플 후 찍은 기념사진. 사진 제공 이창기
'장신대 무지개 행동' 학생들이 2018년 5월 17일 채플 후 찍은 기념사진. 사진 제공 이창기

주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연락해 왔다. 위로해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민한 문제인 줄 알면서 왜 그랬느냐", "때와 방법이 잘못됐다"는 식의 질책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친척과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의 연락이다. 전화를 건 친척은 처음에는 괜찮냐는 말로 나를 걱정해 줬지만, 대화가 끝나갈 무렵 "근데 너도 동성애자야? 넌 아니지?" 하며 차별적인 질문을 던졌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고등학교 동창은 소식을 들었다며 만나서 밥 한 끼 먹자고 말했다. 처음에는 위로해 주려는 줄 알고 나갔지만, 식사 자리에서 그는 대뜸 "왜 동성애를 찬성하냐. 동성애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와 국가에 혼란을 초래한다"라며 허위·왜곡 정보와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소셜미디어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너 동성애자냐?"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하루는 지인이 어느 노회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라면서 링크를 공유했는데, 확인해 보니 '장신대를 동성애로부터 구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내 이름과 소셜미디어 프로필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공개돼 있었다. 사찰이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적잖이 실망했고,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받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소셜미디어 게시글도 '전체 공개'에서 '친구만'으로 변경했다.

징계를 받고 얼마 후 재심을 청원하기 위해 신대원장을 찾아갔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신대원장을 포함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교수들의 답변은 이러했다. 

"(징계는) 너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도 고심 끝에 눈물로 결정했다.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교단을 떠나라."

당시 명성교회 부자 세습 문제를 두고 학교와 교단·명성교회 측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징계는 명성교회와 그 지지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했다. 세습 통과를 위한 전략으로 소수자 혐오를 택한 세습 찬성 측과 그것을 용인한 교단, 이들의 빗발치는 항의로부터 벗어나고자 우리를 징계했던 학교, 이해보다는 질책을 내뱉었던 주변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낀 나는 곧바로 휴학계를 냈다. 

학교는 휴학을 처리해 줄 수 없다며 시간을 끌었다. 학칙에는 휴학이 안 될 만한 사유가 명시돼 있지 않아서 교학처에 이유를 물었지만, 내규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말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조사와 징계 과정에서 우리 입장과 해명을 무시하고, 재심 청원도 딱 잘라 거절하더니 휴학도 마음대로 못하게 했다. 자칭 '선지 동산'이라는 이름과는 모순되게 교권을 이용해 학생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이 조직의 실태가 보였다. 동산이 아니라 감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휴학이 왜 안 되는지 계속 따져 묻자, 학교는 얼마 후 마지못해 휴학계를 처리해 줬다. 장신대 대학부 신학과에 입학해 4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와 곧바로 신학대학원까지 진학했던 나는, 불과 한 학기 만에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학교 탈출, 절망과 희망을 맛보다 

학교를 탈출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한편으로 내 마음은 학교·교단에 대한 분노, 기독교·신학에 대한 회의감, 진로에 대한 고민과 좌절, 나를 대놓고 질책하거나 교묘하게 학교를 편드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나와 친구들은 학교를 상대로 법적 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수자인권위원회의 도움으로 2018년 12월 4일 징계 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변론을 위한 공판이 두 번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징계 효력 정지 가처분을 따로 신청했다. 이 건에 대해 법원은 2019년 5월 17일 "본안인 징계 무효 확인소송에 대한 판결이 나기 전까지 징계 효력을 정지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7월 서울동부지법은 본안에 대해 "징계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처분 신청도, 본안도 모두 승소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일이 터져 버렸다.

법원은 2019년 7월 18일 장신대 무지개 퍼포먼스 학생들에 대한 징계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법원은 2019년 7월 18일 장신대 무지개 퍼포먼스 학생들에 대한 징계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이번에는 학교가 아니라 교단이었다. 아니, 교단과 학교의 '컬래버레이션'라고 해야 할까. 부당 징계 당사자 5인 중에 한 명인 A와 우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또 다른 친구 B는 군종사관(군목) 후보생이었다. 둘은 목사가 되기 위해 2019년 6월 6일 목사 고시에 응시했고 합격점을 받았다. 그러나 교단 내 동성애대책위원회의 개입으로 수차례 불려 가 사상 검증을 당했다. 결국 고시위원회는 A와 B를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당시는 교단 총회 개최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고, 장신대 교수들은 두 학생의 불합격 사건과 관련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학생들'이라는 복수 표현 대신 '학생'이라는 단수 표현이 적혀 있었다. 예상대로 '학생'은 부당 징계 피해자 A를 배제한, B만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얼마 뒤 열린 예장통합 제104회 총회에서 규칙부는 고시위원회의 불합격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20대의 절반 이상을 목회자가 되기 위해 살아온 A와 B의 꿈은 좌절됐다. 특히 A는 학교와 교단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 우리가 징계를 받을 당시 신대원장은 분명 "징계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으나 그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 일은 비단 A와 B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지개 행동 8인 모두와 교단 내 모든 성소수자들 및 앨라이(Ally, 지지자)들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2020년 5월 14일 학교를 상대로 다시 한번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재판은 연기됐고, 올해 3월 31일에야 비로소 첫 공판이 열렸다. 학교 측 변호인은 판사의 질문에 "징계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고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하지만 교단 산하 신학교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2019년 A와 B가 목사 고시에서 탈락했고, 이듬해에도 고시위원회가 응시자 중 몇 명을 '동성애 옹호자'라는 이유로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떻게 여전히 징계가 '보호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는지 따지고 싶었다. 지난번 소송도 쉽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번엔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에 함께 참석해 준 지인들과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장통합 104회 총회 규칙부는 A, B를 목사 고시에서 탈락시킨 고시위원회의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예장통합 104회 총회 규칙부는 A, B를 목사 고시에서 탈락시킨 고시위원회의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친구들과 학교를 상대로 두 차례나 소송을 제기했지만 사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징계를 받은 후에도 무작정 학교로부터 뛰쳐나왔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일단 회피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징계 이후 겉으로는 학교·교단을 향한 분노·실망감을 표출했지만, 속으로는 '이러다 진짜로 큰일 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 학교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 간 친구들은 학교 주변에서 강사를 초청해 연속 강연을 열기도 했고, ''라는 제도 밖 학교를 만들어서 활동을 이어 갔다.

단순히 겁이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나는 아르바이트와 군 복무를 핑계 삼아 친구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3년을 보냈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나는 '학교에 남아서 싸움을 이어 갈 걸 그랬나', '왜 나는 친구들만큼 판단력이 빠르거나 말을 잘하거나 똑똑하지 못할까', '왜 더 용기 내지 못할까', '어쩌면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렇게 원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중 2020년을 맞이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춰 버렸던 그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는 회복의 계기가 됐다. 교육전도사로 일했던 교회와 사회 복무를 했던 장애인 직업 재활 훈련소에서의 업무량이 현저히 줄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나에게 장신대에서 징계를 받은 일은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대처해 갈 것인지, 계속해서 신학을 한다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갈지, 신학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등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고민거리들과 충분히 씨름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생각이 정리됐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친구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손가락질하던 나쁜 버릇도 고쳤다. 힘든 시간을 겪어 온 나 자신을 위로했고 나만의 결대로 당당하게 투쟁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서 2021년이 왔고 나는 누구보다 든든한 내 자신의 지지자가 돼 있었다.

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시간과 더불어 3년 동안 학교 밖에서 만난 여러 사람이 보여 준 연대가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말 많은 사람이 내 곁을 지켜 주고 있었다. 학문의자유와 다양성을 상실한 장신대에 실망한 신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위로와 소망을 전한 신학자 H, 기자회견·재판 등 학교와의 투쟁 현장에 늘 함께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멘토이자 친구인 실천신학자 F, 억울한 징계를 당한 후배들을 위해 글을 써 주고 발로 뛰며 선배 목회자들에게 연대를 요청한 학부 선배 L, 학교와의 법적 투쟁에서 큰 도움을 주신 민변 소수자인권위원회 변호사님들, 학교는 외면했던 우리 이야기를 기사화해 학교·교단의 불의를 폭로해 준 언론사 기자님들, 여러 성소수자 인권 단체 활동가분들, 예장통합 선배 목회자들, 장신대 선후배와 친구들, 타 대학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겪고 먼저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친구들, 타 교단 사제·목회자·신학생들,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도 연대의 손을 놓지 않았던 7명의 장신대 무지개 행동 친구들,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족들과 애인, 생각이 달라도 열린 마음으로 응원해 준 고등학교 단짝 Y와 G,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관계를 맺게 된 여러 성소수자들이 곁에 있었다. 이들에게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듣는 말이 있는데, 그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지난 3년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무지개 퍼포먼스 당사자분들이 꼭 목사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소수자·약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회자를 찾아 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할 터. 이 응원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고 그 말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한다. 이렇게 소중한 지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던 어느 날, 혼자서 찬양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자매·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스무 살 이후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성문 밖 예수'를 알게 됐다면, 징계 이후에는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던, 고통당한 자와 함께하는 '참사람 예수'를 만나게 됐다.

"무지개 퍼포먼스 당사자분들이 꼭 목사가 되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은 지난 3년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무지개 퍼포먼스 당사자분들이 꼭 목사가 되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은 지난 3년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장신대 채플에서 무지개 행동을 취한 날로부터 어느덧 3년이 지난 지금, 함께했던 8명 중 대부분이 학교를 떠났다. 나는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3명과는 종종 만나서 시간을 보내 왔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간간이 주고받는 연락 외에는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할 기회가 생겨서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몸은 흩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종의 '무지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3년 전 장신대에서도 우리는 느슨한 연대 속에 각각 학교생활을 하다가 5월 17일 '성소수자들과 함께 살자'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예배당에 모였다. 중요한 것은 연대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때와 방법을 잘못된 선택했다고, 소수자 인권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산재해 있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소수자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도 더 거세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더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저 앞에 있는 차별의 벽이 영원할 것처럼 견고해 보이지만, 이제는 장신대 무지개 행동 8명뿐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손과 연결돼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더욱더 다양한 '무지개 퍼포먼스'와 무지갯빛 사랑으로 그 벽을 허물어 내고야 말 것이다. 교회 내 차별 철폐를 위한 우리들의 무지개 행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창기 / '장신대 무지개 퍼포먼스' 8인, 이로 인한 신대원 부당 징계 피해자 5인 중 한 명. 징계 이후 학교와 교단에 환멸을 느껴 휴학과 군 복무로 지난 3년을 보냈다. 얼마 전 소집 해제가 됐고 현재는 장신대 복학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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