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뜻깊은 순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민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해 많은 고초를 겪은 봉화 척곡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3월 4일 청량리역에서 풍기행 기차를 탔습니다. 객석이 텅텅 비어서 외진 지역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이문동교회에서 고등부 전도사를 할 때 많이 도와주셨던 최갑도 목사님(풍기 성내교회 원로)과 이번 순례를 기획한 교회사학자 임희국 교수님(장신대 은퇴)을 만나 우선 가톨릭 우곡 성지로 향했습니다. 안광덕 목사님(봉화 반야교회) 부부가 현장 안내를 해 줬습니다.

유학자 농은 홍유한은 우리나라 첫 가톨릭 신자로 기림을 받고 있습니다. 농은은 성호 이익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실의>와 <칠극>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주일을 정해 지키며 가톨릭 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우곡 성지에는 홍유한의 묘와 순교한 그 후손 13명의 가묘가 있었습니다. 뒷산 묘지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는 '15처 표지석'들을 살펴보며 그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척곡교회 명동서숙에 도착하자 작년에 부임한 박영순 목사가 반갑게 맞아 줬고, 한옥 예배당에는 김영성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립자 김종숙 목사(1872~1956)의 손자인 김 장로님은 사라질 뻔한 척곡교회를 되살린 분입니다. 연세가 96세인데 잠시 기도회를 할 때 악보도 없이 피아노 반주를 하셨고, 척곡교회 역사를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2013년에 발간한 <봉화 척곡교회 문헌 사료집>에다 손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글씨를 적어 선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김 장로님은 2003년 명동서숙 교장이었던 선친의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은퇴 후 80세를 바라볼 나이에 미국에서 귀국했습니다. 그는 척곡마을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명동서숙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경북도청, 봉화군청, 영주노회 등에 수시로 찾아가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이 문화재로 인정받도록 하는 등 감춰진 한국교회 보물들을 발굴했습니다.

봉화 척곡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봉화 척곡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척곡교회는 대한제국 탁지부(오늘날 기획재정부) 관리였던 김종숙이 관직을 내던지고 처가의 고향에 내려와 세운 한국인 토착 교회입니다.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줄기 사이에 있는 산골 오지입니다. 김종숙은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開明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사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19년 장로가 됐고, 해방 후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1907년 예배당을 세우기에 앞서 사설 교육기관인 명동서숙부터 지었습니다. 규암 김약연 선생이 북간도에 세운 명동서숙과 이름이 같습니다. 봉화 독립 투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북간도로 전달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일부러 동일한 이름을 썼던 것 같습니다. 산골짜기에 위치했지만 이곳까지 찾아와 배우고자 했던 청년이 꽤 많았으며 여학생 기숙사도 한 칸 있었다고 합니다. 명동서숙은 정식 학교가 되지 못한 채 운영되다가 1943년 폐교됐습니다. 

척곡교회는 설립부터 독립운동과 깊이 연관돼 있었습니다. 김종숙의 처남 석태산은 봉화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었으며, 그를 비롯한 정용선·김명림 등 독립 투사들은 척곡교회를 독립운동 자금을 만주로 전달하는 장소이자 중요한 회합장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경상북도 일대 주재소를 습격하고, 친일 부자들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에 보냈습니다. 척곡교회는 처음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지만 3·1 만세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김종숙은 1920년대에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해방 직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봉화 의병장 석태산은 소백산에서 잡혀 현장에서 처형됐습니다.

척곡교회 예배당은 1909년 건립됐습니다. 지역 부자 최재구가 땅을 내놓았고 김종숙의 헌금으로 건축비를 충당했습니다. 예배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15평 정도되는 미음(ㅁ) 자 기와집으로 세웠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가 대부분 기역(ㄱ) 자 또는 한일자(一) 초가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습니다. 출입문은 건물 왼쪽과 오른쪽에 솟을대문처럼 지어 남녀 출입구를 구분했습니다. 뒷산으로 연결된 뒷문은 예배 인도자가 드나드는 문이자 독립운동가들이 발각될 경우 피신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합니다. 1921년 5월, 안대선(Wallis J. Anderson)선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척곡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면려회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공경과 섬김을 받으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귀한 먹거리를 주시니, 때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敬事天父 賜我食物 每番不忘 阿們)."

척곡교회에서 드리는 이 식사 기도문은 북간도의 명동교회·명동서숙에서 드렸던 식사 기도와 같았다고 합니다. '식기도 소고'에서 김영성 장로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에서의 식기도 때에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밥 한 그릇을 위하여, 더 시간이 있을 때의 식기도에는 굶주리는 세계의 인류를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의 식기도를 드리기를 부탁한다." (<봉화 척곡교회 문헌 사료집>, 427쪽)

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척곡교회는 온갖 핍박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 역사적 가치와 교회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명동서숙과 함께 문화재청 등록 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됐습니다. 2011년에는 교회에 보관된 기록 5점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90호로 지정됐습니다. 1907년~1955년까지의 세례인 명부, 1921년 면려회 회록 등입니다. 그 외에도 1910~1930년대에 간행된 서적들이 있습니다. 2009년 7월 예장통합 총회는 척곡교회를 한국기독교사적 제3호로 지정하는 예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큰 봉화 척곡교회지만 몇 년 동안 담임목사 없이 어려움을 겪었고, 잠시 부임했던 목사와 성도 간 갈등으로 예배를 따로 드리며 법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019년 5월 17일, 척곡교회는 창립 112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교회당 복원 헌당식을 했습니다. 110년 만에 담장과 솟을대문을 복원하고 일본군 접근을 감시하려고 뚫은 담장 구멍도 재현했습니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제6대 박영순 담임목사 취임 축하 예배로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습니다. 최갑도 목사님은 이날 "약한 자 위해 헌신한 예수님을 닮아 지역사회를 섬겨 가길" 바란다고 설교했습니다.

척곡교회는 현재 상담학을 전공한 박영순 목사와 교우 10여 명, 교회학교 학생 15여 명이 함께 아름답게 가꿔 나가고 있습니다. 산골 교회에 학생 15명이 출석하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이 학생들의 부모님이 비신자라는 점입니다.

풍기를 떠나기 전, 커피숍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번 순례에 많은 도움을 주신 최갑도 목사님과 임희국 교수님이 이 지역 교회들의 오랜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했다니 기대가 큽니다. 봉화 척곡교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 이 지역을 새롭게 밝히는 믿음과 삶의 터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품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이근복 /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