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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준다. 그래서 시골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화려한 꿈을 찾아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에 대한 환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곳에 오면 성공할 것 같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같이 여겨진다. 이곳만큼 세련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곳은 없다. 모든 과학과 산업과 기술과 지성이 모여 있다. 도시라는 우상은 시민들에게 성공을 보장해 주고 인생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디 그뿐인가. 도시의 삶은 인간 생애 주기에 따른 교육·복지 시스템이 편성돼 윤택하고 편리하다. 이곳은 지상낙원이라 불릴 만큼 모든 것을 갖췄고 사람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도시의 실상은 어떠한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누군가의 기획에 의해 움직인다. 도시에는 기본권과 생존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도시가 계속 개발되고 있지만 도시의 영성은 고갈되는 것 같다.

김승환 박사의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새물결플러스)는 현대 도시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하고 새로운 도시로의 비전과 대안을 제시한다. 도시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부터 인문학·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도시를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도시를 장악하는 정사와 권세가 사라지고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기까지 교회가 해야할 역할도 살핀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다양한 책과 논문을 섭렵한 저자의 수고와 노력이 돋보인다.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 도시에 관한 신학적 성찰과 상상> / 김승환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48쪽 / 1만 4000원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 도시에 관한 신학적 성찰과 상상> / 김승환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48쪽 / 1만 4000원
도시병

도시의 대표적 문화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다. 도시는 자본의 통제를 받아 움직인다. 사람들은 자본을 소비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확인한다. 도시에서는 비인간화가 일어나고 비인격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도시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자본이 넉넉한 사람이고 모든 도시민의 목표는 부유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 '소유'로 평가받는 곳이 도시다.

땅·주택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한다. 그러나 공간도 가진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지, 없는 자에게는 몸과 마음을 둘 수 있는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 원하지만 없는 자들에게 이는 사치일 뿐이다. 공적 공간마저도 모두를 위한 유익과 편리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도시의 삶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메마르게 만든다. 사람은 관계적인 동물인데, 자본이 목적이 된 인간에게 상대방은 협력과 배려의 대상이기보다는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사람은 영적 피조물이기에 쉼과 위로와 충전이 필요한데, 숨 막히게 돌아가는 도시에서는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속성速成으로 움직이는 도시에서 인간은 숙성되기는커녕 '속성의 도구'로 전락한다.

교회마저도 도시병

도시에는 수많은 편의점이 있어서 그 지역 문화를 바꾸고 삶의 리듬을 재편성한다. 편의점은 사람들의 일상을 움직인다. 도시에는 그와 비슷한 수의 교회가 있다. 교회는 지역 주민이 환영하고 칭찬하는 곳이 돼야 한다. 지역의 유익과 공공선을 위해 협력하고 섬겨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와 가치는 편의점보다 미비하다. '영적 구조선'이라는 고유한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눈물에다 밥을 말아 먹는 도시민이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 화려한 도시를 찾아 꿈을 품고 왔지만 패배와 절망을 안은 사람들이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 방황하는 이들이 바른 방향을 발견하는 기적의 장소, 온갖 상처와 찢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다시 힘을 얻고 인생을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은혜의 장소가 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어떠한가. 도시 속에 존재하면서 세속 교회가 됐다. 세상의 논리와 방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가르친다. 인생의 성공 비법과 처세술을 성경으로 기가 막히게 포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여 회개하는 일 대신 욕망을 부추긴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광경은 욕망의 도가니처럼 보인다. 도시화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도시화된 교회를 본다.

도시는 타자를 위한 곳이다

솔직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일에 부담을 느낀다. 도시에 관한 저자의 깊고 넓은 연구를 필자의 설익은 창조물로 대변하는 게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밑줄 그어 가며 나름 집중해 읽어 본 결과, '도시는 타자를 위한 곳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은 도시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를 바라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을 위한 인생의 디딤돌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수만을 존재하지 않듯, 도시는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은 기쁨과 행복이 넘쳤지만 아담 자신이 주인(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모든 관계가 파괴됐다. 동산에서 쫓겨나 자신의 힘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자기가 주인이 돼 사는 삶은 피 흘리는 전쟁·경쟁·복수라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도시 속에 인간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성을 쌓고 벽을 세운다. 자신에게 손해가 오면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은 모든 관계를 적대화하고 파괴한다.

도시의 의식은 환대·포용과는 거리가 멀고 타자를 적대시한다. 도시에는 예언적인 기능이 있다. 도시의 어떤 공간은 신성하고 거룩하게 조성돼 시민들이 영적·관계적으로 살도록 도와야 한다. 과연 어느 장소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도시는 나를 위한 곳이라고 주관화하며 사는데, 어디에서 도시를 타자를 위한 곳으로 객관화할 수 있을까. 도시민을 인간답고 존귀하게 살도록 도와줄 공간이 절실하다.

사랑은 방향을 바꾼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사랑의 힘은 마음과 삶의 방향을 전환한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사랑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랑의 방향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전환하고 자기를 제일 마지막에 두게 한다. 도시는 이미 기계화·과학화해 첨단을 달리고, 사람들은 명예와 부가 행복을 줄 것이라며 여기에 목매어 살고 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가 돼 아프기만 하다. 도시는 내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도시의 노예로 만든다. 더 치열하게 살고 더 노력하고 더 분투해야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채찍질한다. 결국은 피 흘리는 괴물 노예로 만든다. 교회는 이러한 도시 한복판에 존재한다. 교회는 도시민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소망을 줘야 하는가.

모두가 주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교회는 예언자가 돼야 한다. 아프고 상한 자들에게는 피난처·안식처가 돼야 하고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회복의 장소가 돼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교회는 잘못된 주인 의식을 깨부수고 인간이 피조물임을 알게 해 사랑의 방향을 바꾸는 곳이 돼야 한다. 도시는 나를 위한 곳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곳이며,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고, 도시 속 교회는 외쳐야 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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