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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터지는 기독교 관련 뉴스가 신자들 마음을 복잡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일반 사회와 시민들은 교회를 향해 불편한 시선을 보낸다.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걸려 있는 시국인데도, 부산에 있는 한 대형 교회가 예배를 강행하면서 정부의 방역 지침을 기독교를 향한 핍박과 탄압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상주에 있는 인터콥선교회 BTJ열방센터는 마지막 시대에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황 가운데 목숨을 걸고 모여, 많은 사람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어느 종교나 자신들이 믿는 교리와 신앙 내용이 보편적 진리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보편적 진리를 상실한 채 상식이 실종된 모습을 사회에 보여 주고 있다. 일반 종교도 폭력성과 위해성을 보이면 사회악으로 인식될 수 있다. 지금의 교회가 그런 것 같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교邪敎처럼 인식되는 듯하다. 복음은 공공성을 추구하면서 공동선을 위해서도 봉사해야 하는데, 지금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구가 돼 버렸다.

현재의 기독교가 보여 주는 현상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한 지도자를 숭배하듯 따르고, 추종자들이 지도자에게 저항하는 이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전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근대성을 부정하면서 군사정권과 합력해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만들더니, 이제는 정치 영역에 들어와 사람들을 정치에 끌어들이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 모든 종교에 근본주의가 있듯이 기독교에도 근본주의가 있는데, 정치화하면서 여러 좋지 못한 사례를 남기고 있다.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새물결플러스)은 현대 기독교와 교회의 문제를 사회적이고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탁월한 연구서다. 신자들에게 있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적으로 접근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 중독을 경험할 수 있다. 중독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개인적으로 겪은 심리적 절망 혹은 사회적 혼란 등으로 발생하는 외상에 의한 경우가 적지 않다. 외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존재와 집단을 의지할 때 종교 중독이 발생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이 존재와 집단이 부패해도, 여전히 이 존재와 집단을 통해 정체성과 의미를 얻는다. 특정 존재와 집단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필자는 책에 있는 내용을 녹여 내 필자의 언어로 정리하면서 현대 기독교가 지닌 문제를 분석하면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현대 기독교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피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작성됐다. 필자도 저자의 원인 분석과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했다.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 -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정치신학적 비판> / 박성철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30쪽 / 1만 3000원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 -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정치신학적 비판> / 박성철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230쪽 / 1만 3000원
변질된 기독교와 복음, 오해를 낳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다. 기독교인은 기독교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만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타 종교를 배척·공격하거나 파괴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정신과 사상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향해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할 수도 없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죽고 난 후 저 세상에서 눈물과 슬픔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는 보증수표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면서, 그렇게 거듭난 사람의 지성과 사상의 확장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넓혀 나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사회에서 혐오하는 집단이 됐다. 정통 교리를 믿으면서 교회를 다니는 '정통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일조차 우습게 돼 버렸다. 복음은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이용하고 타인을 미워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복음은 놀라운 자유를 줘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무서운 독약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가 품고 있는 놀라운 능력은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는 데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죄를 짓게 하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 모습이 아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어야 하는데, 듣기 싫은 소식이 됐다. 우리 영혼을 부요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물질을 부요케 해 주는 것으로 변질됐다. 기독교의 신비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알아 가면서 변화되는 데 있는데, 이제는 기독교와 교회 때문에 예수님이 오해를 받고 있다.

종교 중독의 특징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곳이 아니다. 특정한 사람이 사유화하는 공간이 돼 버렸고,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 세습'의 문제는 교회가 개인의 재산이 됐다는 데 있다. 복음과 신앙은 우리에게 자유를 줘야 하는데, 교회가 그 자유를 빼앗고 침범하는 곳이 됐다. 교회는 천하보다 한 영혼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그 영혼을 위해서라도 큰 사업도 중단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데, 집단을 한 영혼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교회보다 권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보다 큰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나라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교회 성장에 몰두하는 것으로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따라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으로 존재 목표를 삼고 있다. 그렇게 권력을 추구하면, 권위주의가 발생하고 차별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영혼 섬김이 아니라 성장과 유지에 초점을 두니까 권력형 리더십의 목회자가 탄생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체제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신자들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형식을 지키는 것을 신앙이 좋은 기준으로 착각하면서 거짓된 안위를 지키는 데 몰두하게 된다. 교회가 정한 법과 규칙은 완전할 수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교회에 순종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가르친다.

이 같은 가르침은 신자들을 종교 중독으로 이끈다. 종교 중독자들은 자신의 집단과 지도자에게 종속된 채로 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예속한다. 자신들만 옳다고 하면서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적으로 여긴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피해를 보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진리를 따른다고 착각하면서 피해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극단적 폐쇄성으로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폭력성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중독됐을 때 발생하는 폐해를 기억하면서, 우리 신앙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낳은 폐해

어느 종교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근본주의는, 그 종교가 지닌 전통과 질서와 사상을 고수하게 만든다. 정통을 더 견고히 하는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대륙의 과학과 이성이 주류가 되어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게 되면서 발생했다. 기독교 근본 교리를 사수하려는 이들을 근본주의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근대성과 현대성을 부정하고, 정통과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적으로 여기면서 과격성을 드러낸다.

근본주의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위험과 불안에 노출돼 있는 사람들에게 도피와 안식처 기능을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바른 신학과 해석을 통해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과학을 악으로 여기고, 이성을 죄악시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과학과 이성을 오해해서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키는 교리의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근본주의는 권력과 아주 친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권력이 자신들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듯, 근본주의도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차별 기제를 작동하게 해 근본적 교리와 모든 것을 기독교의 주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면서 파괴적 행동을 더욱 부추긴다. 자본주의를 신성한 것으로 받고 경제적 차별까지 정당하게 여겨 사회 양극화를 더욱 자극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념, 도덕적 신념, 종교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신앙의자유를 주고 믿음을 따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는 권위주의적이고 차별적·공격적 성향을 보인다. 사회문제로 발생하는 사람들의 신음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아주 배타적이다. 이 같은 근본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면, 그 종교는 심각한 병에 든 것이다.

교회 우상화,
교회주의의 문제점

앞서 언급했듯이, 현대 기독교의 문제 중 하나는 교회가 거의 우상이 됐다는 데 있다. 성전은 이미 이 땅에서 사라졌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모신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성전인데도, 교회를 성전으로 여기고 신성시한다. 신자 한 명 한 명이 교회이고, 그가 가는 곳이 예배 처소가 될 수 있는데도, 교회로 모이는 '집단'을 절대화한다. 물론 공간이 갖는 특별한 역할과 기능도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중개자로서 예수님 사역을 이어 가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그 집단만의 이익과 체제를 위한 곳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체제 유지와 집단 존속을 목표로 삼으면, 교회는 기업화·대형화해서 세상을 따라가는 곳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해야 하는데, 교회의 말에 더 권위를 부여하고 교회 지도자의 말을 법처럼 여길 것이다.

교회는 우리 일상을 파괴하고 자유를 침범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일상을 돕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면서 주님을 위해 살도록 지원하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화 물결을 막지 못하고 대기업이 되면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만지지 못하고, 기계처럼 돌아가는 곳이 됐다. 일과 체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일종의 기도의 변질이다. 예수님이 엎으신 성전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가.

전체주의는 역사적으로 인간을 도구화하고 희생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했다. 체제를 위해서라면 어떤 선동·차별·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이 안에 녹아 있는 정신은 사탄의 정신이다. 반대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허물어뜨린다. 교회가 전체주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보편적 원리와 일반 상식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위한 곳이 된다면, 이 사회는 교회를 더욱더 혐오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회 모습

교회가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반사회적인 집단이 됐다.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정부가 방역 지침을 내렸어도 지도자가 예배하자고 말하자 예배당으로 모인다. 이런 모습은 믿음이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중독돼 있는 것만 같다. 예수님은 제발 모이지 말라고 하는데, 자기들의 열정과 열심으로 모이는 데 힘쓴다. 교회가 예수님에게 수치가 되고 있다. 세상으로 들어가 눈물 흘리는 자들의 손을 잡아 줘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교회가 모이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분쟁·내전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생명과 안전을 위해 국가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도, 복음의 서진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순교하겠다면서 기도하고 훈련한 후 그 지역에 들어가는 선교 단체가 있다. 자신들의 당위·명분이 국가를 위협하거나 국가에 피해를 주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종교성이 채워져야 만족을 느끼니 타인의 피해와 고통은 심각해도 괜찮다. 예수님은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섬겼는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이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이익을 위해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들을 통해 정치의 방향과 노선은 선택할 수 있다. 교회는 사적 집단이 아닌 공적 집단이다. 사회에 유익한 공동체가 돼야 한다. 복음은 공공성을 지니면서 공동선을 추구한다. 교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세력을 형성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곳이며, 하나님나라는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곳이니 신자들은 구원을 위한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이 나온다. 공동체 내에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교회는 타인을 위한 급진적 섬김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데, 타인을 차별하고 배격하는 곳이 됐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은 우리를 이기적이고 독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이타적이고 온유한 심령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지닌 복음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교회가 어떤 곳인지 질문하게 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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