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회복적 정의'를 모르는 사람, 그냥 한번 들어 본 사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 (농담이니 진지하게 읽지 마시고….) 아무튼 나는 '그냥 한번 들어 본 사람'에 속했다. 회복적 정의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 보기는 했는데 잘 몰랐다. 뭔가 좋아 보이는 것, 이상적인 것 정도의 의미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두둥)

지난해 11월 말 출간된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피스빌딩)는 회복적 정의 개념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이 어떻게 시작돼 퍼져 나가고 있는지 담고 있다. 가히 회복적 정의의 한국형 교과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 나 같은 사람이나 회복적 정의에 대해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 개념이 잡힌다. 회복적 정의라는 게 의외로 깊고 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450쪽이 넘는다는 게 함정….)

그렇다면 이 책을 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과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를 설립한 이재영 원장이다. 그는 20년 전 한국에 최초로 회복적 정의를 도입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다. 긴 시간 회복적 정의 운동을 해 온 사람이 쓴 책답게, 회복적 정의 개념을 물 흐르듯 쉽게 잡아 주고 사법·학교·가정·도시·조직·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이재영 원장은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워드 제어(Howard Zehr, 1944~) 교수의 설명을 종합해, 회복적 정의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회복적 정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이자 방식으로서 어떤 잘못(범죄)에 연관이 있는 가능한 모든 사람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피해가 최대한 치유되도록 함께 피해와 필요를 확인하고 책임과 의무를 규명해 가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77쪽)

회복적 정의는 개념의 생소함 때문에 흔히 '응보적 정의'와 비교 설명된다. 응보적 정의는 쉽게 말해 '잘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응보적 정의는 가해자 처벌에,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회복적 정의가 응보적 정의의 반대되는 개념이거나, 회복적 정의 운동이 응보적 정의를 대체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재영 원장은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정의에 다다르기 위한 여러 패러다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재영 원장을 1월 14일 경기 남양주시 덕소에 있는 '피스빌딩'에서 만났다. 누군가는 회복적 정의를 지극히 이상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복적 정의는 이미 세상에 스며들어 치유를 시작했다. 이 원장의 말마따나 회복적 정의는 이상적이라기보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이 지면에 회복적 정의 개념을 다 담지는 못한다. 인터뷰를 보고 좀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책을 사서 읽어 주십사….

덕소에 있는 피스빌딩 1층은 카페다. 카페가 아주 예쁜데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인터뷰는 허름하고 작은 방에서 진행했다. 인터뷰 끝나고 아쉬워서 찍은 사진 한 장. 뉴스앤조이 구권효
덕소에 있는 피스빌딩 1층은 카페다. 카페가 아주 예쁜데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인터뷰는 허름하고 작은 방에서 진행했다. 인터뷰 끝나고 아쉬워서 찍은 사진 한 장. 뉴스앤조이 구권효

-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를 쓰게 된 계기는.

한국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을 초기부터 했던 사람이다 보니, 그간 강의하고 활동했던 내용을 정리해 자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또 하나는 나름대로 회복적 정의의 적용 범주를 다시 한번 정리해서 자료화하고 싶었다. 회복적 정의를 적용하는 범위가 다양하게 퍼지고 있고, 그에 따라 방법론을 얘기하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회복적 정의가 근본적으로 어떤 뿌리에서 나왔는지, 어떤 이론적 배경이 있는지 개괄하는 게 운동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앞으로 회복적 정의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이 책을 가이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다.

- 원장님은 회복적 정의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됐나.

캐나다메노나이트대학교(CMU)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메노나이트교회를 접하게 됐다. 그때는 나도 화해나 평화, 정의를 어떤 개념으로만 이해했다.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들어서 아는 수준이었다.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다르더라. 작은 교회였는데 늘 세계의 분쟁 상황을 이야기하고 기도했다. '나에게는 평화가 추상적인 고백인데, 이 사람들에게는 실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졸업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 영역을 좀 더 공부하고 싶었다.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교(EMU)에 갈등 전환 석사과정이 있다기에 지원했다. 거기서 하워드 제어 교수에게 수학하게 됐다. 공부하고 나서 회복적 정의를 한국에 알려야겠다는 나만의 소명 의식이 생겼다. 이후 2000년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에서 10년간 평화 교육을 했고, 지금까지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한국평화교육훈련원·한국회복적정의협회 등을 만들어 꾸준히 회복적 정의를 알려 왔다.

-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가 '비판받는 회복적 정의' 챕터였다. 회복적 정의에 대한 오해부터 합리적인 반론까지 문답 형식으로 충실히 기록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쓴 이유가 있다면.

지금까지 회복적 정의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을 쓴 것이다. 내가 그 부분을 쓰면서 '합리적 질문'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응보적 정의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회복적 정의가 반드시 증명해 나가야 할 어젠다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사법 정의' 중심으로 가고 있다. 총칼로 다스리던 시대에서 법과 제도로 다스리는 시대가 된 것은 분명한 발전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법원 결정이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시대가 됐다. 학교도 종교 기관도 마찬가지 아닌가. 법정 다툼으로 천문학적인 사회비용이 발생하지만, 정작 사법 정의로는 피해자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고 가해자도 처벌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잘못을 빌 뿐이다. 왜 이래야 하는가.

사법 정의로 대표되는 응보적 정의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문제를 사법 정의 하나로 풀려고 하는 것은 문제다. 정의가 무엇인가. 정의의 궁극적 목적은 회복일 수도 있다. 회복적 정의는 정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정의 패러다임이 사법적 개념의 정의로만 인식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드러나야 할 정의는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종교 관점에서는 용서가 정의일 수 있고, 역사 관점에서는 치유가 궁극적 정의일 수 있다. 또한 남북문제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화해와 통합이 최고의 정의일 수 있다. 따라서 잘못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사법적 관점으로 모든 정의 패러다임을 이뤄 낼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36쪽)

회복적 정의는 이상적인 개념 같지만 듣다 보면 설득된다. 되게 상식적인 내용이기 때문. 뉴스앤조이 구권효
회복적 정의는 이상적인 개념 같지만 듣다 보면 설득된다. 되게 상식적인 내용이기 때문. 뉴스앤조이 구권효

- 책을 읽어 보니, 사법과 교육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가 많이 보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별히 두 영역에서 많이 퍼져 나간 이유가 있을까.

회복적 정의는 사법 영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사법 분야에 많이 퍼져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청소년 사법 문제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청소년을 처벌할 때 교육적·선도적 효과를 더 많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는 경찰이 적극적으로 회복적 정의에 관심을 쏟고 있다.

학교 영역은 당시 시대상과 맞물려 보급된 측면이 있다. 10여 년 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더 이상 체벌로 학생들을 규율하지 못하게 됐다. 생활지도에 혼란이 생기면서 회복적 생활교육이 조명을 받게 됐다. 교사들은 현장에 있으니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대화 모임의 필요성을 경험적으로 느낀 면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은 뭔가 좋다 싶으면 짧은 시간에 확 퍼지는 특징이 있다. 장단점이 있다. 몇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회복적 정의가 제도화한 것을 보면 정말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제도만 앞서 가면 단명할 수밖에 없다.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를 쓴 이유 중 하나다.

-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원장님이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이끈 경험담이었다. 글로만 읽어도 긴장되더라. 또 어떻게 그런 극적인 중재나 화해가 이뤄질 수 있나 싶었다.

2006년부터 한 8년간 대화 모임을 적극적으로 했던 것 같다. 지금도 형사사건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처음 맡았을 때가 기억난다. 이론적으로 강의만 했던 걸 실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이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 개입하나'라는 걱정도 한 게 사실이다. 지금은 의뢰가 많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때는 정말 어렵게 겨우 들어온 사건이었다. 이게 잘못되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지하철 타고 가면서 정말 기도 많이 했다.(웃음)

수많은 대화 모임을 경험했고 항상 끝나고 나서는 '역시 안 하는 것보다 낫구나'라고 느꼈다. 사건마다 당사자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이들의 욕구는 자기 얘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야기하기 전에는 자기가 진짜 뭘 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싸움에는 익숙해지고 있는데 정작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채우지는 못하는 것이다. 싸움 자체가 본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 폭력 문제가 있었다. A가 B를 폭행한 사건이었는데, B와 그의 부모 요구는 A를 전학 보내거나 절대 한 반에 묶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대화 모임을 하다 보니, 가해자 A가 "B 사정을 들어 보니 내가 정말 잘못했고, 다른 애들이 B를 괴롭힐 때 내가 보호해 주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B도 A가 자기를 보호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 A와 B가 꼭 한 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합의됐다. 대화 모임을 하기 전과 정반대 상황이 된 것이다.

주변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마다 잘돼?"라고 묻기도 한다. 뭔가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다기보다는 몇 가지 장치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에 입각한 대화 모임은 자발성이 우선이다. 사전 모임을 통해 대화 의지가 있는 사람만 참여하게 된다. 물론 다들 극적 화해를 바라고 참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법절차를 거치며 너무 지치고 실익도 없다고 느낀 이들이 최악을 피하려고 참여하는 경향이 크다.

이런 상태에서 제3자가 컨트롤하는 대화에 참여하면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전혀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옛날 마을 공동체 문화에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들이 자꾸 마주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자연스럽게 갈등이 다뤄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문가의 시대에는 다들 대리인을 내세우고 누군가 결정을 내려 주길 바란다. 응보적 정의에 익숙하다 보니 당사자 간 대화 자체가 잘못됐다는 선입견도 있다. 하지만 안전한 공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누구나 다 잘할 수 있다.

나는 피해자가 왜 어렵고 불편한 회복적 대화 모임에 나오려고 결심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이끌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모든 피해자들에게 회복적 접근의 기회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몫으로 남겠지만, 그 기회 자체가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가해자 처벌에 집중되어 있는 사법절차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높이기 위한 사회 공동체의 노력이 강화된다면 더 많은 피해자들이 더 빠르고 직접적인 피해 회복의 기회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78쪽)

'이론은 좋으나 실천은 어렵다.' 이재영 원장이 숱하게 들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대화 모임을 통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 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이론은 좋으나 실천은 어렵다.' 이재영 원장이 숱하게 들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대화 모임을 통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 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책에서 종교 기관의 역할을 종종 언급했다. 지역사회 내 조정자 역할이나 '피해 회복 기금' 운영 주체로서의 역할이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과연 지금 교회에 그런 역량이 있는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십수 년 전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 가서 강의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분쟁이 표면화하기 전이었고, 사랑의교회가 '정감(정직과 감사) 운동'을 벌이는 중 회복적 정의 개념을 알고 싶다고 해서 갔다. 그때 막 예배당 신축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서 내가 피해 회복 기금 얘기를 꺼냈다. 건축 기금 중 5억 원 정도만 피해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기금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박수도 받고 반응 좋았다.(웃음) 하지만 얼마 후 교회 문제가 터졌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 됐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사법기관과 공조하면서 재판 목록을 훑어볼 일이 있었는데, 한 교회에 소속된 교인 두 명이 맞고소를 했더라. 교회가 커서 아마 두 사람은 같은 교회 교인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전화했더니 그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더라. 벌써 두 교인이 각각 이런 문제로 재판을 하게 됐다며 기도를 받고 갔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기도들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하는가.

나는 폭력 사건을 맡으면 직접 현장에 가 보기도 한다. 대부분 인적이 드문 공터 같은 곳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주변을 보면 교회가 여러 개 보인다. 여기서 폭력이 일어나는 순간에 교회에서는 예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천국이 담벼락 하나를 못 넘는구나.' 한국교회에 목회자 자질이나 대형화, 자본주의에 잠식된 모습 등 여러 문제가 있다. 나는 그와 함께 전혀 터치되지 않은 부분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책에도 썼지만 교회가 화해·치유 센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말로만이 아닌 진짜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을 텐데. 나는 대화 모임에서 화해가 일어나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성령이 운행하신다면 이런 모습이겠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나도 가끔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화해의 영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영이 일할 수 있는 통로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을 때 '예배하는 곳'이라고 답한다면 나는 틀렸다고 본다. 하나님이 예배가 없어서 서운해하실까. 예수의 역할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예수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셨다. 그를 따른다는 팔로워들이 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 위기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위기는 현실이고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위기 가운데서 희망도 못 찾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힘을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으로 훈련받은 개인들에게서 본다. 회복적 정의 전문가가 많아지고 있고 이들이 각 영역에서 화해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 중에는 교인들도 있을 텐데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교회에서도 그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 본다.

이 부분이 더 좋았다고 가리키는 이재영 원장. 뉴스앤조이 구권효

- 마지막으로 책 홍보의 시간이다.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를 통해 바라는 게 있다면.

나는 책 제목에서 '회복적 정의'보다 '세상을 치유하다'라는 말이 더 좋았다. 주변에서는 되게 진부하다고 했다.(웃음) 눈에 띄는 제목을 찾자고 했는데 내가 결국 이걸 못 버렸다. 책 쓰면서 생각해 봤다. '내가 지난 20년간 활동하면서 속에 있는 열정이 나온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건 결국 이런 치유의 통로가 되거나, 사람들이 치유받았다고 얘기할 때였던 것 같다. 정의가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큰 힘이 있을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세상에 왜 이리 희망이 없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책을 보시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회복적 정의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피해를 줬으면 피해를 회복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은 가해자에게 책임은 많이 부과하는데 피해자는 회복이 안 되고 있다. 피해자는 왜 계속 소외돼 있는가. 결국 관점 문제다.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한다. 실천은 두 번째다. 한번 고민해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지금 혹시 잘못 가고 있는 거 아닌가' 이런 고민이 들어야 변화를 위한 시도도 생긴다고 본다.

회복적 정의와 응보적 정의 두 패러다임의 공통점은 단순하게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같다는 점이다. (중략) 두 패러다임을 통해 정의라는 스펙트럼 위에 더 (또는 덜) 회복적인 요소와 더 (또는 덜) 응보적인 요소가 다양하게 측정되고 접목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 있다. 결국 정의 패러다임으로서 회복적 정의가 이룬 가장 큰 기여는 응보적 정의 관점으로 획일화되어 온 정의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다양한 관점으로 확대시켜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확장된 다양성 위에 좀 더 창의적인 정의 이해와 실천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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