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인권조례는 대한민국헌법 10조에 근거한다. 이 헌법 원칙에 입각해, 지역 주민의 인권 보장을 실현하고 이를 위한 기초 자치단체의 목적과 책무·권한을 규정하는 것이다. 일부 보수 개신교가 인권조례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로 제정을 저지하는 운동이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나,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기초 자치단체는 점점 늘고 있다.

<뉴스앤조이>는 2019년 11월 말 '개신교와 인권조례' 시리즈를 통해 전국 기초 자치단체의 인권조례 제정 현황을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이후로 지난 1년간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취재한 결과, 전국 8곳에서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극우 반동성애 진영의 집단 항의로 좌절을 겪은 곳도 있지만, 집단 민원을 '뚫고' 때로는 '피하며' 기본 조례를 제정한 사례가 더 많았다.

지난해 12월 31일 조례를 정식 공포한 서울 금천구를 시작으로, 2020년 1월 서울 중랑구, 3월 경남 김해시, 7월 서울 강서구, 8월 인천 부평구, 9월 경기 부천시, 10월 서울 송파구가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가장 최근 제정된 곳은 인천시 동구로, 동구의회는 12월 8일 본회의에서 표결한 끝에 인권조례 제정안을 4대 3으로 통과시켰다. 이를 포함하면 기초 단체의 인권조례 제정률은 46.4%(105곳)다.

인천 퀴어 축제 개최지 동구·부평구
2020년 나란히 인권조례 제정 성공
2019년 거센 반발 겪은 부천도 제정

올해 인권조례를 제정한 인천 동구와 부평구는 각각 역대 인천 퀴어 문화 축제가 개최된 동인천역 북광장(동구 송현동)과 부평역 북광장(부평구 부평동)이 있는 곳이다. 반동성애 집단의 성소수자 혐오 시위가 난무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 두 곳에서의 조례 제정은 더욱 뜻깊다. 인권조례를 발의한 동구의회와 부평구의회 의원들은 인권조례가 구민들의 인권 의식 향상 및 인권 보장을 위한 조례라며, 일부 개신교계 주장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수차례 강조해 왔다.

수년 전부터 인권조례를 제정하려고 시도했으나 반동성애 진영 반대로 수차례 부침을 겪었던 부천시도 올해 9월 결국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부천은 유독 교계의 외풍이 거센 지역이었다. 부천시의회는 2019년 인권조례를 한 차례 발의했다가 철회했고, 문화 다양성 조례 제정에도 실패했다. 성평등 기본 조례 개정안에서는 '성평등 전문관'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등 압력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올해 인권조례 제정 국면에서도 반동성애 진영은 가만있지 않았다. 사랑제일교회(전광훈 목사) 및 극우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던 8월 말, 부천시청·의회 앞에서 반대 집회를 예고했다. 부천시는 이들의 집회를 금지했으나, 반동성애 진영은 법원에 집행정지 신청까지 불사하며 반대 시위를 했다.

하지만 시의회는 찬성 16, 반대 10, 기권 2로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 내용이 타 기초 단체에 비해 후퇴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기본적인 계획 수립 및 인권 교육 등 인권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조례를 제정한 8곳 가운데 인천 동구와 부천시, 서울 금천구 등 3곳은 이른바 반동성애 진영에 '좌표'가 찍힌 곳들이었지만 조례를 제정해 냈다. 이전까지 반동성애 진영에 좌표가 찍혀 민원 폭탄을 떠안고도 조례 제정에 성공한 기초 단체는 2016년 충남 청양군 1곳밖에 없었는데, 지난 1년 동안 3곳이나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항의를 이겨 낸 것이다.

행정안전부 '입법 예고 시스템' 타깃
'좌표 안 찍힌' 곳은 무난히 제정
인천광역시 동구의회는 12월 8일 본회의를 열고 4대 3으로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입법 예고 사실이 알려지며 수백 건의 반대 민원이 들어왔지만, 이 압력을 이겨 내고 조례를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동구의회 홈페이지 갈무리
인천광역시 동구의회는 12월 8일 본회의를 열고 4대 3으로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입법 예고 사실이 알려지며 수백 건의 반대 민원이 들어왔지만, 이 압력을 이겨 내고 조례를 제정하는 데 성공했다. 동구의회 홈페이지 갈무리

반면, 서울 송파구·강서구·중랑구와 인천 부평구, 경남 김해시는 개신교계의 조직적 반대를 겪지 않고 무난하게 조례를 제정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 지역들은 조례 제정안 입법 예고를 '엘리스'라 불리는 자치 정보 법규 시스템(elis.go.kr)에 올리지 않고, 자체 시·구청 또는 의회 홈페이지에 예고했다는 것이다.

반동성애 진영은 엘리스를 통해 검색되는 인권·성평등 관련 조례를 타깃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초 자치단체들은 개신교인들의 집단행동을 피해 갈 수 있었다. 담당 공무원의 착오로 엘리스에 입법 예고를 올리지 않은 중랑구는 결과적으로 '좋은 실수'를 한 셈이 됐다.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가 없는 지역들에서는 동성애의 '동' 자도 거론되지 않았다. 보수 정당 의원들도 인권조례에 이견을 보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오히려 인천 부평구의 경우에는 국민의힘 소속 구의원이 구청장의 인권 보장 책무를 "할 수 있다" 또는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권고적 규정 대신 "하여야 한다"는 의무로 제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례를 의무 규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보수 개신교계의 압박에서 자유로웠던 서울 송파구는, 아예 인권조례 제정뿐 아니라 구청장의 책무를 임의규정이 아닌 강행규정으로 하고, 2022년 인권센터까지 개소하는 것으로 규정을 못 박았다.

김해시 인권조례를 대표 발의한 김진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12월 7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국민의힘 의원들도 인권조례 필요성에는 동의한 상태였다. 과거에 교계 분들이 오셔서 타 의원이 발의한 다문화·성평등 조례에 반대하는 등 시련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조용했다. 교계 반대가 없어서인지 의회에서 조례를 제정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제정 이후에도 교계에서 전화를 받은 적 없다"고 말했다.

김진규 의원은 "시의원으로서 먼저 조례를 제정해서 시민들에게 이로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일부에서 반대한다고 인권조례를 만들지 않아서는 안 된다. 요즘은 제정 이후 이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조례만 만들었다고 되는 건 아니고, 조례가 잘 실행되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 인권조례를 대표 발의한 박성희 의원(더불어민주당)도 8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종교 단체 등에서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압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조심스럽게 발의했지만, 무난히 잘 만들었다. 나도 교인인데 우리 목사님께 인권조례 내용을 보여 드리니 잘했다고 칭찬하시더라"고 말했다.

박성희 의원은 "인권조례는 꼭 필요하다. 인권에 대해 잘 모르는 구민이 많다. 인권조례의 도움과 혜택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이들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했고, 무엇보다 구청장의 책무를 의무로 규정하지 않으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조례 내용을 대부분 강행규정으로 만들었다. 국민의힘에서도 전혀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와주려 했다"고 말했다. 송파구청은 1년간 연구와 준비 기간을 거쳐 2022년 인권센터를 개소할 예정이다.

'좌표 찍힌' 곳은 여전히 민원 폭탄
"동성애 조례 아닌데 동성애에만 매몰"
반동성애 진영은 의령군청 앞에서 인권조례를 철회하라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의령군청이 행정안전부 시스템에 인권조례를 입법 예고하자 이를 보고 몰려든 것이다. 결국 의령군 인권조례는 무산됐다. 유튜브 갈무리
반동성애 진영은 의령군청 앞에서 인권조례를 철회하라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의령군청이 행정안전부 시스템에 인권조례를 입법 예고하자 이를 보고 몰려든 것이다. 결국 의령군 인권조례는 무산됐다. 유튜브 갈무리

반면, 인권조례 제정안을 엘리스에 입법 예고했다가 반동성애 진영의 레이더망에 걸린 기초 단체들은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 했다. 올해에는 경남 의령군(군수권한대행 발의), 인천 남동구(구의원 발의), 경기 여주시(시장 발의), 강원 정선군(군수 발의)이 개신교인들에게 항의를 받고 인권조례 제정을 포기했다. 충북 청주시는 입법 예고 후 시의회에서 의안을 다뤘으나, 상임의원회가 부결해 지역 인권 단체들이 반발했다. 2019년 입법 예고 후 1300여 건의 반대 민원에 시달렸던 서울 강남구도 현재 심사 보류 상태에 놓여 있다.

이항진 시장이 인권조례 제정안을 발의했던 여주시는 올해 1월 20일부터 2월 3일까지 반대 의견 1946건을 받았다. 민원이 집단적으로 쇄도하자 여주시는 공개적으로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 시장은 2월 5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정부와 경기도가 권고하는 사안이라고 할지라도 여주시민의 정서와 뜻에 반한다면 조례를 만들지 않는 것이 맞다. 인권조례 입법 예고를 시작한 뒤, 언론 보도 및 SNS를 통해 해당 조례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 2월 3일에는 여주시기독교연합회 회장님과 목사님들께서 시장실로 찾아왔다. 저는 '입법 취지와 상관없이, 기독교 정체성과 충돌하는 관계로 여주시기독교연합회에서 인권조례 제정 철회를 권고한 바, 이를 수용한다'고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 인권조례 제정이 부결된 의령군에서는 11월 18일 군청 앞에서 반동성애 진영의 시위까지 열렸다. 의령군청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화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받았고 팩스도 마비될 정도였다. 메일도 여러 통 왔다. 800여 건이 접수됐는데 1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반대 의견이었다. 사실 조례라는 게 의령군민을 위해 제정하는 건데, 절반 이상은 타 지역 분들이 민원을 넣었다. '의령이 고향이라 민원을 넣었다'는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조례가 유별난 내용도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표준 조례를 기초로 우리 군 실정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성소수자) 단체에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런 단체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군에 성소수자가 몇 명인지 통계도 없다. 노인·아동 등 모든 군민을 위한 건데 동성애에만 매몰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지방선거 전까지는 조례 제정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선군도 인권조례 제정을 포기했다. 군청 관계자는 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접수돼서 세세히 검토한 후 진행하자는 취지로 일단 절차를 정지했다"고 말했다. 강원도에서는 2019년 강릉시·속초시·삼척시가 인권조례를 제정하려다 반대 민원에 시달려 철회한 바 있다. 군청 관계자는 "여러 사례를 보니 한 지자체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인 것 같다고 느꼈다.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 해결하기보다는 국가인권위원회 및 인권위 강원사무소 등을 통해, 반대 쪽과의 접점을 찾는 등의 노력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천 남동구 인권조례를 대표 발의했던 황규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은 12월 7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입법 예고 후 특정 소수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나왔다. 그들을 어떻게 해 주겠다는 게 아니고,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를 보장하고 국비 사업으로 인권 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견이 있었다. 일단 조금 더 가다듬고 보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권조례는 공무원들의 인권 감수성을 향상해 인권 약자가 받는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고, 주민들의 인권 의식도 높여 서로가 존중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이다. 사진은 2019년 금천구청 직원 인권 교육 모습. 사진 제공 금천구
인권조례는 공무원들의 인권 감수성을 향상해 인권 약자가 받는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고, 주민들의 인권 의식도 높여 서로가 존중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이다. 사진은 2019년 금천구청 직원 인권 교육 모습. 사진 제공 금천구

한편, 올해 서울에서만 4곳이 인권조례를 제정하면서 이제 인권조례가 제정되지 않은 서울 내 기초 단체는 용산구·광진구·마포구·강남구·강동구 등 5곳만이 남게 됐다. 광진구는 2016년 인권조례를 발의했다가 반동성애 진영의 항의를 받고 철회했고, 지난해 입법 예고한 강남구는 올해 10월 구의회에서 안건 심사가 보류됐다. 강동구는 인권조례 제정안이 발의됐으나 대표 발의한 의원이 성매매 의혹으로 논란이 되고 있어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용산구는 발의 시도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마포구는 올해 8월 국민의힘 이민석 구의원이 인권조례를 내놓았다가 좀 더 가다듬어 다시 내놓겠다는 이유로 철회했다. 당시 정의당 마포구위원회가 내용이 부실하다며 내실 있게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는데, 이후 이 의원은 발의를 철회했다. 이민석 의원은 8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보수 교계의 반대 등 외부 압력 때문에 철회한 것은 아니다"며 "입법 예고 후 받은 의견을 반영해서 검토하려는 목적이다. 내년 상반기에 다시 발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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