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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 이상웅 지음 / 솔로몬 펴냄 / 469쪽 / 2만 5000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 이상웅 지음 / 솔로몬 펴냄 / 469쪽 / 2만 5000원

10년 전 읽었던 책이다. 수정을 거쳐 타 출판사에서 재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다시 꿈틀거렸다. 며칠에 걸쳐 이상웅 교수님의 박사 논문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다 읽었다. 에드워즈의 주요 저작을 면밀히 분석·연구해 그의 성령론을 정립한 탁월한 책이다. 에드워즈는 그의 인생에서 두 번이나 부흥을 경험했기에 부흥·신학·성령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빚진 마음이 있다. 나 같은 무명인이 에베레스트에 비유되는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전국 목사들을 불러 모으고 정치 목사들을 동원해 비성경적·비신학적 성령 운동을 펼친 전광훈 때문에 괴로워했던 20대 중반 시절, 제3의 물결과 신사도 운동 등으로 혼란했던 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난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는 전광훈에 물들어 있어 예배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교회에 갈 때도 영적인 혼탁함 때문에 힘겹게 신음했었다. 그때 만난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한 줄기 빛이자 힘이었으며, 바른 신학과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 되었다. 신앙·감정·교회·목회자가 무엇인지 검은 베일이 벗겨지는 경험을 하고 그 비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당시 출간된 이상웅 교수님의 책을 밑줄 그어 가며 열심히 읽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그 의미와 가치가 여전히 살아 있고 많은 유익과 도전과 성찰을 준다. 에드워즈는 칼뱅을 비롯한 여러 개혁주의자 전통을 따라 삼위의 사역과 구속, 성령의 역할을 인정한다. 그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은 삼위 구속 사역의 결정체로 성령을 말하면서 성령에 우위를 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에드워즈의 부흥론을 연구·분석해 성령론을 세우는 작업을 한다.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회심과 이신칭의로 주어지는 전가 교리에서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영적인 일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하는 그의 성령론은, 기도·찬송·예배 등 경건한 일에  많은 비중을 둔다.

성령의 공동체적 역사는 개인적 역사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영이 개인 영혼을 변화시키고 거룩을 추구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평화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부흥의 때에는 각자의 일상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오히려 절제하고, 탐욕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살게 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회심과 구속에서 성령의 전적 주권을 강조한다. 회심 때 영혼은 새로운 본성으로 변하고 영적 원리와 하늘에 대한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에드워즈는 이 회심을 경험한 자가 믿음을 소유해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본받을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비신자와 회심하지 못한 자를 위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인류 창조보다 한 영혼의 회심이 더욱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첫 창조 때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던 세력이 없었지만, 타락 이후 구속을 향해 달려가는 역사에서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큰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죄의 세력에서 건져 내는 회심은 첫 창조보다 더 존귀한 일이다.

나는 이 책이 이 시대에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혼의 변화와 회심 때문이다. 부흥의 때에는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일도 있었지만 메마른 마음을 가졌던 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됐다. 교회를 습관처럼 다니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고 영적인 일에 무관심했던 이들이 깨어나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지식만 추구하는 메마른 신앙의 모습 혹은 지식·분별력 없이 열광적인 박수만 쳐 대는 모습으로 양극화 돼 있다. 신앙의 모습은 다양하기에 이 극단에는 구원이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차원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개인 영혼의 상태와 신앙 수준을 점검하고 바르게 세워 나갈 수 있는 기준과 나침반이 된다.

에드워즈 당시에도 찰스 촌시를 중심으로 하는 반부흥론파와 제임스 데븐포트를 중심으로 하는 열광주의가 있었다. 그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 잡힌 부흥론·성령론의 기준을 세운다. 에드워즈를 교훈 삼는다면 현대 교회의 잘못된 성령 운동을 개혁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갈 수 있다.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에드워즈는 한 영혼의 회심이 내면의 변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변화와 공동체·사회의 회복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그의 성령론은 이타적이고 사회적이다. 오늘날 예배에 목숨 건다면서 정부 방역 지침에 순응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무리를 보면 에드워즈는 뭐라고 말할까.

에드워즈는 회심은 열매를 통해 진실 여부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성경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허물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학은 거짓 신학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교회를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로 세우는 것이며,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회심은 영혼을 표독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부드럽게 변화시킨다.

오늘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목사와 성도의 모습은 잘못된 성령을 받아 거짓 회심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성령님은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시는 거룩한 영이다. 그런데 직통 계시와 개인 성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 때문에 성령님이 거칠고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영이 되고 말았다.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악령의 역사처럼 비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이 성령님의 역사 운운하며 모인 광화문을 누가 은혜와 축복의 장소라고 하겠는가.

에드워즈는 삼위 하나님의 사회성과 관계성을 중시하고 삼위의 연합에 있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다.성령님께서는 개인의 변화를 넘어 사회와 관계의 변화까지 이루어 가신다. 에드워즈를 통해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균형을 본다. 그의 성령론을 통해 오늘날 교회의 성령론을 점검해 본다.

약 300년 전에 나온 책이 오늘날 과연 얼마나 유효하고 적실한지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옛 신학자를 스승으로 삼아 교훈과 가르침을 받는 것에 과연 어떤 유익이 있을까. 물론 우리는 과거 선배들에게 함몰되어 맹종해서는 안된다. 우리 과제는 성경을 근본으로 하여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회와 세상을 오늘날의 맥락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과서다. 무엇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모든 것의 기준을 성경으로 삼았던 그는 우리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다. 신비한 체험과 다양한 은사를 강조하기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믿음을 통한 인격적 성숙을 강조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말이 정치적으로 변질돼 버린 시대,  그 참된 의미를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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