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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용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 지은 사람을 용서(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빚)를 용서(탕감)하여 주시고(마 6:12)."

교회에 다닌다면 자주 고백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의 중요성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용서'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중요성을 알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단연 큰 주제는 '사랑과 용서'다. 물론 사랑 속에는 용서가 포함된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다. 또한, 우리가 서로 용서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두 가지 용서'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두 가지 용서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기도의 뜻이다. '두 가지 용서'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두란노)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같이'라는 말은 조건절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이다. 어쨌든 이 기도 속에는 용서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기도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거짓 기도이다. 예수님은 기꺼이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셨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조건·무제한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용서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회복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회복 문제에서도 재출발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깊이 깨달았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에게 언제나 용서할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용서가 교회에서 잘 설교되지 않는 일은 충격적이다.

잃어버린 언어 '용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비아)에서 "'죄', '참회', '구원'의 언어가 오늘 교회에서 잃어버린 언어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용서' 또한 잃어버린 언어 중 하나다. 나도 20여 년 설교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주제로 설교한 적 있지만, '서로 간 용서'를 주제로는 거의 설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설교자로서 직무 태만의 큰 죄를 지었다.

예수님 말씀대로 가해자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을 때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가 누구더라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매우 엄중한 말씀이다. 용서 문제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용서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용서를 구했을 때 용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내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용서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은 없다. 작은 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큰돈을 잃어버리거나 큰 사고가 당하는 경우, 극단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상황에도 적용된다. 개인적 관계 혹은 부부 관계에도, 직장·사회·정치 영역에서도, 국가 간에도 용서가 필요하다.

국가 간 사례로는 일본과 독일이 있다. 독일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서 유대인에게 저지른 국가의 잘못에 대해 적극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지만, 국가 차원에서 흔쾌히 용서를 빌었던 사례가 없다.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존감 상실, 우울증,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예수님께 묻자,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6-11)"

우리 중 죄 없는 자 누구인가. 돌 던질 자 누가 있겠는가.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에서 신약 속 '서로'(알렐 론)라는 낱말에 관심을 보인다. "실로 초대교회 신학의 한 중요한 대목이다"고 지적하면서 "서로 사랑하라", "서로 고백하라", "서로 용서하라" 등 수많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대해 말한다. 교회 공동체처럼 큰 죄든 작은 죄든 죄를 지은 자들이 서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따로 없다. 모든 죄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 마지막 대목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고 언급했다. 자크 엘륄은 <뒤틀려진 기독교> 첫 부분에서 "기독교는 행위를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반성서적으로 뒤틀려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엘륄은 역사적 교회가 실천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크게 안타까워했다.

용서, 제자의 표지

용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놀라운 표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용서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때야말로 보복이 필요한 때다. 폭력적 자기방어를 정당화할 때가 있다면 바로 이때다. 하지만 예수님은 피 튀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원수들을 편들며 하나님께 청원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24)."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하셨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2-13)."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는 원수를 친구로 대한다. 이러한 용서에는 위험이 따른다. 용서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목숨을 희생하고서라도 더 많이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옛 규칙을 따라 보복한다면 증언·구속·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불의 가운데서도 기꺼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 사랑의 능력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방어를 포기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2)."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요 18:36)."

예수님은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폭력적 보복을 철저히 거부했다. 에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생각해 보라.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 22:42)." 단순히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일에 순종으로 따르겠다는 고백에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짙은 그늘 속에서도 용서하는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예수님의 헌신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증오가 가득한 곳에서 끝없는 용서를 베푸신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운명과 씨름하면서, 이와 같은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으셨다.

예수님의 행동 중 많은 것이 노골적 저항의 형태를 띤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에 맞서, 악이 아닌 선으로 저항하라고 가르치셨다.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 수단을 들고 악에 저항하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폭력에 호소하는 그 순간, 우리 안에는 악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과 똑같아지고 만다.

물론 무저항적 측면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문할 도구 십자가를 지고 간다. 도망하거나 싸우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불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악한 권력자들이 폭력을 가해 올 때도 하나님의 참으시는 은혜로 대응한다. 예수님은 용서를 실천한다. 혹독하게 자신을 고문하는 원수들을 사랑한다. 참으시며 무저항적 하나님 사랑을 실천한다.

이 사랑은 어떤 것보다 힘이 있어 원수를 친구로, 악인을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무저항적이고 담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곧 무저항인 사랑은 악의 고통스러운 가시를 흡수해 버릴 만큼 강력한 힘이 있다. 저항, 곧 악에 도전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무저항적 아가페에 비추어 점검받아야 한다.

예수님 메시지는 분명하다. 폭력은 물리적이든 감정적이든 결코 하나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을 가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통을 흡수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혁명적 반도들을 거부하여 고통을 막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적 저항까지도 부정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 곧 인내하는 은혜와 용서하는 사랑의 능력을 보여 주는 모델이 되셨다.

하나님나라 시민이 되는 길

우리 사회 근간에서는 보복적 앙갚음에 대한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세상은 보복의 체계로 계산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의가 지배하는 곳이다. 간디는 "눈에는 눈은 전 세계를 눈멀게 한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 용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 죄를 언제나 용서할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용서해 주셨고, 더불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중요성에 비해 용서 문제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용서를 인생이라는 칠판에 잘못 쓴 글자를 지워 버리는 지우개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생각을 끔찍하게 여길지 모른다. 예수님은 온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언제나 이웃들 죄를 용서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요구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이며, 그리스도와 닮아 가는 고난이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베풂과 용서>(복있는사람)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 군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 한 마을을 급습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건을 전한다. 터키 한 장교가 부하들을 인솔해 아르메니아 한 가정을 약탈했다.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늙은 부모를 죽였고, 딸들은 부하들에게 노리개로 주었다. 자신은 제일 큰딸을 무자비하게 성폭행했다.

얼마 후 이 큰딸은 기적적으로 탈출해 간호사가 되었다. 세월이 꽤 흐른 후, 이 여인은 상처를 입은 터키 군인들을 보살피는 병동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병원에 후송되어 온 군인 한 사람을 열심히 간호하다가, 그가 바로 자기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다 준 장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장교는 간호사 도움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간호사는 정성을 다해 그 장교를 치료했다.

터키 장교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 간호사 옆에 서 있던 의사가 말했다. "이 간호사의 정성 어린 간호가 없었더라면, 당신은 죽었을 것이오." 장교가 간호사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왜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살려 주었소?" 간호사가 대답했다. "나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늘 우리를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를 입힌 모든 이를 간호사처럼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 용서란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럴 때 평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제일가는 자격은 용서에 있다.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뿌리박고 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나 이웃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나라 시민이 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나라 시민이 되기 원한다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원로목사,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지도위원, 성서한국 이사, <축복의 혁명>·<하나님나라>·<상처 입은 치유자 반 고흐>·<용서>(대장간)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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