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도들의 모임(congregation)이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하시고, 성전과 교회를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등이 있는 조직체(organization)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함께 있는 유기체(organism)인 것이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장소가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회중이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도가 있으면 그것이 교회요, 보이는 장소가 없어도 성도가 함께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전이자 교회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을 지낸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 1917~2005)는 <교회>(IVP)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총회(the assembly of God),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the dwelling), 하나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이라고 정의한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lbos, 1909~2007)도 <바울신학>(솔로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전자에는 구속사적 의의가 있고 후자에는 기독론적 의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경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엡 1:23; 골 1:24; 고전 12:1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엡 1:22, 4:15).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다(고전 12:27; 엡 5:30; 롬 1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성도(롬12:4)가 바로 교회요 성전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12절에는 '몸'이 세 번이나 나오고 13절에는 '한 성령', '한 몸'이라는 표현이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성전을 보게 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전,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인 성전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건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에베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이루어진 성전을 본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수 그리스도는 건물의 '모퉁잇돌' 같으신 분이다. 모퉁잇돌은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처음 놓이는 돌이며, 모든 선과 방향의 기준이 되는 매우 중요한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잇돌이며, 성도는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낱개의 돌이다. 모퉁이 돌과 하나하나의 돌이 함께 모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듯이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성도가 그 지체가 되어 성전을 이루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위 구절은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교회와 성전을 예배당 건물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비유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을 이해할 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자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 실체(예배당)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너희도 산 돌(living stone)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이라고 한 것은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그리스도는 '모퉁잇돌'(벧전 2:6)이요, '머릿돌'(벧전 2:7)이요, '부딪치는 돌'(stumbling stone)(벧전 2:8)이시다. 성도 또한 그리스도가 산 돌이신 것 같이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인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여기서 '제사장'은 목사가 아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 구절은 교회 주보에 잘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도와 맞게 이 구절을 인용해야 한다. 예배당 건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예배당이 곧 교회라는 생각에서 인용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에는 '집'이 두 번이나 나오고 '기둥과 터'라는 표현이 나온다. 자칫 건물을 교회 또는 성전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 본 대로 기둥과 터와 집은 단지 구약 성전 건물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건물 자체가 교회라는 말이 아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함께하심'(Immanuel)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구약의 성전인 집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신약적 의미에서 예배당은 신성한 곳이 아니다. 성도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고 그곳이 바로 성전이며 교회다.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고전3:9)."

우리는 '그분의 집'이다. 우리가 곧 성전이요 그의 교회다. 인간의 위대성은 '상징적 존재'라는 것이다. 최대의 상징은 언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인간만의 독특성이요, 다른 존재와의 놀라운 차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다양한 의사 전달을 한다. 원숭이, 개, 그리고 새가 그들 나름대로 말을 하지만, 동물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단지 기호적인 면에서일 뿐이지 인간의 언어와 차원이 다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 등 언어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언어가 단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잘못된 언어 사용은 잘못된 사고를 만들고 잘못된 행동을 유발한다.

변증학자 버나드 램(Bernard Ram, 1916~1992)이 말한 대로, 성경 속 인물의 말과 행동은 상징으로 가득하다. 상징을 모르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이 말은 상징적 표현이다. 신구약 전체 문맥을 알지 못한 채로 이 말을 보면,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읽히는 우스운 일이 발생한다.

'성전'의 의미는 상징적이면서 예언적

성경을 읽을 때 구속사적 관련성 없이 신약과 구약을 따로 나누어 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신구약 내용을 본래 전하고자 하는 말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구약만을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면,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성전에서 제사하고 유월절을 지키려고 1년에 1번씩 이스라엘에 가야 할 것이다.

성전을 구약적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성경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읽을 수 없다.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던 성전은 훼파된 지 오래고(A.D. 70년), 지금 새로 거대한 성전을 지으려 해도 그 자리에 이미 이슬람교의 황금 성전에 건재하게 있기 때문에 감히 지을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예배당을 두고 성전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사람이 지은 제한된 장소가 어찌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겠는가.

구약 학개서에 나오는 '성전을 지으라'(학 2:6-9)는 말씀을 예배당을 지으라는 말로 인용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학개 선지자가 한 말은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말이다. 참된 성전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예배당을 지으려는 목사들은 갑자기 구약에 있는 성전이라는 말을 앞세워 온갖 거짓으로 성도들을 속인다.

이 세상 종교들 가운데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을 비롯해 웅장한 성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신구약이 말하는 성전은 그들이 말하는 성전과 전혀 의미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청년 예수께서 하신 "이 성전을 헐라"(요 2:19)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시고, 결국 자신이 성전이라는 말 때문에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막 14:53-65).

예배당 건물은 '성전' 아니다

히브리서는 유대 기독교인을 상대로 쓴 책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도 할례, 정결법, 성전, 십일조 등 구약의 문자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들을 깨닫게 하려고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손으로 짓지 아니한, 즉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장막이다. 둘째,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다. 여기서 장막은 성막-성전과 같은 뜻이다. 예수님이 성전이며, 그 성전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더 크고 완전한 성전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말인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는 함부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사람이 지은 집이 성전일 수 있겠는가. 나아가서, 건물이 성전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구속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성전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는데, 우리가 예배당을 성전이라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거니와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한다면 성전 모독, 진정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분명한 이단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자 예언이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다 보니,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목사가 제사장인 줄 안다. '제단'이라는 말도 별생각 없이 튀어나온다. '제물'이라는 말도 그렇다. 어떻게 목사가 제사장인가. 지금 어디에 제단이 있는가. 심지어 제단이 법궤이고 여자는 제단 위에 올라갈 수 없다느니, 일천 번제를 드려야 한다느니 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신약성경에 예물, 제단, 제물, 제사, 제사장 등 구약적 용어가 나오는데, 지금도 이런 용어를 사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이자 비유적 용법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이후 성도들은 이러한 용어를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세계적 신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 1939~)은 로마서 12장 1절을 주석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구약 제사를 종결시키는 최종적인 제사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구약 제사 용어가 사용된 것은 기독교 용어로 전용되기 이전의 유대교 용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제의적 의식으로 날마다 동물들을 바치는 것이 특징인 구약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헌신적 삶이 특징인 신약의 시대로 가는 것을 보여 준다"라고 말했다.

구약의 언어들은 구약적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청중에게 분명히 구약적 의미를 설명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신구약 성경 맥락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구약과 달리 신약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제물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구약의 제물은 신약의 헌금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적 용어는 상징, 비유, 모형(이 중요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 202~230쪽 참고)으로 사용한 것으로 신약을 사는 우리에게는 폐기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교회에서 '성가대'라는 말을 생각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신구약 성경에는 '성가'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찬양', '찬송'이라는 말은 300번 이상 나온다. 음악을 분류할 때 민요·가요·동요·성가 등의 용어를 쓴다. 성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지 '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찬양(찬송, 찬양은 같은 말이다)을 드리는 것이고, 찬양대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넓게 보면, 찬양을 함께 부르는 성도들도 찬양대라고 할 수 있다.

교회=건물은 교회론의 오류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처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성전이다(고전3:16). 앞서 말한대로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의 유기체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무엇인가. 예배(kerygma)가 있고, 교육(didache)이 있고, 봉사(diakonia)가 있고, 교제(koinonia)가 있다. 성전이 건물일 수 없는 것과 같이 교회 또한 건물일 수 없다(예외적으로 건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를 건물로 생각한다면, 교회론에 대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교회=건물'이라는 도식 때문에 한국교회가 할 일이 건물 짓는 일이 되어 버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많은 교인이 예배당 짓는 일을 교회의 가장 큰 일로 여기는 심각한 현실에 이르고 말았다. 교회론적 오류 때문에 교회가 성전인 줄 알고 예배당 짓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다니,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한국교회를 '나와라, 돈 내라, 집 짓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예배당은 빌레몬의 집일 수 있고, 마가의 다락방일 수 있고, 초가삼간일 수도 있고, 임시 건물일 수도 있고, 학교 강당일 수도 있고, 비닐하우스일 수도 있다.

물론, 필자도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예배당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건물이 필요하면 그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지을 수 있고 또 지어야 한다. 그러나 무리하게 예배당을 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큰 예배당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성도들의 눈물을 생각한다. 예배당, 성전을 지으면 복 받는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거짓말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예배당을 지을 경우가 있다면, 건축적인 면에서 조형미와 영성이 흘러나오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예배당 건물들은 누더기로 입힌 것 같이 볼썽사납고 유치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조그만 예배당이라도 잘 가꾸면 좋은 분위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설계한 프랑스 시골 마을에 있는 롱샹성당은 20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24.7m×12.8m)이지만 1년에 1000만 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성당.

한국교회가 초대형 교회가 많이 있는 것이 자랑일 수도 없지만, 돈 많은 교회는 투기를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세계적 예배당을 짓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당'이라고 부르자

지금까지 나는 구약의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과 교회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 교회가 단지 건물이 아니라는 점을 살폈다. 최소한 우리는 성전이 성경의 거대 담론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필자는 본고에서는 성전의 기초적 의미만을 생각했으며, <성전을 헐라>를 집필할 계획이다).

나는 지금까지 예배당이라는 말을 써 왔다. 그러나 이 예배당이라는 단어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연 교회가 모이는 곳을 '예배당'이라 해도 좋은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들어왔던 시점, 지금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성도들이 모인 곳을 '회당'이라 불렀다. 그런데 1960~1970년대에 와서는 '예배당'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순복음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예배당을 '성전'이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에는 예배당이 성전이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때부터 건물 중심 성장주의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과연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를 예배당이라 해야 옳은가. '예배당'이라는 말보다 '교회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교회론적 측면에서 바르다고 생각한다.

교회에는 예배·교육·봉사·교제 등 다양한 기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예배당'이라는 말은 교회가 예배하는 곳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 같다. 물론 예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그러나 비약적 경제성장으로 웬만한 예배당에 한 교회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예배·교육·봉사·교제 공간이 따로 있다는 면에서 교회당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에 대해 "뭐 그렇게 까다롭게 할 필요가 있느냐", "그동안 쓰던 대로 쓰면 되지 않느냐"라는 반응을 많이 받아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미 지적한 대로 신학적·실천적 면에서 한국교회에서 언어 오용으로 발생한 잘못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 폐해 또한 크지 않은가. 성경적 언어는 바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국교회에서 크게 오용되는 말 하나가 '은혜'다. 은혜는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그런데도 '은혜'를 '대충'의 의미에서 사용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바바라 브라운 테이러(Barbara Brown Taylor, 1951~)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비아)에서, 성경에 나오는 죄, 회개, 언약, 은혜, 구원 등의 중요한 언어들이 그 뜻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하면서 살아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관행이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성전과 교회를 모독하지 말자. 좋은 관행은 이어 가되, 잘못된 관행은 속히 없애자.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이 글의 내용을 더 자세히 알려면, 졸고 <성경의 제사>(대장간)를 참고하라].

박철수 / 목사, <축복의 혁명>·<하나님나라>·<두 개의 십자가>(대장간) 저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